미니멀리즘의 의미에 대한 단상
결코 단순하지만은 않은 미니멀리즘에 대한 생각의 조각들
#1. 단순
뜨거운 아침 햇볕에 눈을 뜨자마자 더듬더듬 아이폰을 찾는다. 애플은 본질적인 기능에만 충실한 최소주의를 지향하는 브랜드다. 수많은 기능을 두루 갖춘 덕에 편리함과 피로함을 동시에 가져다주지만, 어쨌든 애플의 단순한 외형과 직관적 인터페이스는 미니멀리즘 미학이라는 종목에서 우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출근길에 올라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얼마 전부터 한국에서도 쓸 수 있게 된 애플 뮤직. 첫 화면을 마주하니 취향에 맞게 큐레이팅을 해주겠다며 좋아하는 장르와 음악가를 묻는다. 선택지를 따라가니 듣고 싶지 않은 음악은 꾹 눌러 지우라고 안내한다. 너무나 다양해 어떤 곡을 재생 목록에 담을지 늘 고민이었는데, 싫은 것을 지우고 나니 메뉴가 단출해진다.
#2. 비움
너무 많은 것에 귀를 기울이면 진실과는 멀어진다. 모바일 메신저 프로필에는 일찌감치 ‘더 적게, 하지만 더 좋게(less but better)’라고 적어두었다. 단 몇 분 만에도 수천 개씩 쏟아지는 개개인의 이야기들. 정보와 감상을 구분하고, 필요한 것을 취하기 위해 각종의 상태를 시시각각 들여다보는 기자의 업무는 머릿속을 쉽게 지치게 한다. 하루에 얼마만이라도 스마트폰을 멀리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며 메신저 프로필 문구를 바꾸는 모습이 우습다. 필자와 같이 모든 것이 과잉인 시대에 정신적 피로함을 느끼는 사람들 덕에 대형 서점에서는 ‘단순함’ ‘버림’ 등의 키워드가 유행이다. 옷가지를 버리고 냉장고를 비우는 방법부터 느리게 걸으며 단순하게 생각하는 법까지, 또다시 정보의 홍수다. 사람들은 비우기 위한 지식을 채우기 위해 애를 쓴다.
패션, 인테리어, 먹는 것과 운동하는 것 등 많은 분야에서 ‘단순성’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문제는 단순성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데 있다. 모든 것을 덜어냈을 때 비로소 본질만 남는다는 문장을 읽으며 ‘버림을 위한 열망’의 모순에 대해 생각해본다. 선의 미학을 위해 손잡이를 달지 않아 한참을 머뭇거리게 만드는 문 앞에서, 이미지를 드러내는 것 외에는 그리 기능적이지 않은 의자를 바라보며, ‘비움’의 진정한 의미를 떠올린다. 반복되고 증폭되었을 때의 압박, 절차가 되어버린 것들이 주는 피로함에 대해 생각한다.
미니멀리즘 작곡가들의 의도와 시도
미니멀리즘의 의미에 대한 사색 끝에 미니멀리즘 음악이 주는 매력을 돌아본다. 미니멀리즘 음악가라 불리는 미국의 작곡가들은 무엇을 의도했을까. 애초에 ‘비움’이란 이들에게 불가능한 목표다. 작곡이란 흰 오선지에 음표를 채워나가는 작업이다. 미니멀리즘 음악은 점진성을 갖지만 방향성을 지니지 않는다. 지속성을 띠지만 이는 무엇을 표현하기 위함이 아닌, 어떠한 효과를 생산하기 위함이다.
테리 라일리(1935~)는 같은 음, C(도) 음을 수없이 두드리는 ‘인 시(In C, 1964)’라는 곡을 썼는데, 이 곡을 듣다 보면 초반부의 C는 미지의 세계로 가는 길목을 표현하고, 중반부의 C는 표류를 시작하게 하는 촉매제로서 기능하며, 후반부의 C는 안착한 세계에서 무언가를 찾는 과정이 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라일리는 C 음으로서 파편을 만들고, 이것들을 하나의 세계로 엮는 것으로 작품 번호를 달았다. 미니멀리즘 작곡가들은 ‘주입’을 통해 ‘형상’을 만든다. 끝을 알 수 없는 ‘반복’과 미묘함을 띠는 ‘변주’들로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고, 감상자로 하여금 그 세계를 ‘표류’하게 만든다.
미니멀리즘 음악의 계보는 1935년, 미국 아이다호의 작은 목장 마을에서 태어난 라 몬테 영(1935~)으로부터 시작된다. 광활한 평원에서 비밀스러운 자연의 소리를 감상하며 자란 영은 베베른의 추종자로서 그의 작품세계를 탐닉했다. 오랜 연구 끝에 베베른의 12음렬을 완전히 새롭게 해석했는데, 모든 음이 회귀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음들이 지속성을 띠어 통주저음 선율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이러한 지속성을 겉으로 드러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테리 라일리는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 앞으로 돌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라 몬테 영으로부터 배웠다’고 말하며 영이 제시한 음악세계를 잇는 한편, 그 안에서 조성이 드러나도록 했다. 스티브 라이히(1936~)는 그 과정을 정립하고 깊이를 부여했으며, 필립 글래스(1937~)는 새로운 영토를 개척함으로써 동력을 불어넣었다. 그 이후 존 애덤스(1947~)가 미니멀리즘 작곡가 리스트에 추가되었고, 브라이언 이노(1948~), 데이비드 보위(1947~2016) 등 당대의 대중음악가들이 이들과 긴밀하게 교류하며 후대에 영향을 미쳤다.
미니멀리즘 음악의 확장은 현재진행형이다. 무한히 반복되는 선율로 인한 감정의 상실을 통해, 또 목적을 지운 방황을 통해 가슴 속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 싶다면, 다음 장을 넘겨 미니멀리즘 음악을 경험하고 느껴보길 바란다. 선율은 원상태로 회귀하겠지만, 듣는 이의 마음에는 각기 다른 파동이 존재할 테니 말이다.
미니멀리즘 음악의 특징과 변천
전통에 저항하던 단순한 음악이 스타일을 입고 대중적 지지를 받기까지
미니멀리즘 음악은 의도적으로 리듬이나 선율, 화성 등을 단순화시킨 작곡의 한 스타일을 말한다. 이 음악은 ‘최소한의 요소로 만들어진 음악’이라 부를 수 있으며, 그 이름을 빌려온 미니멀리즘 미술과의 연관성을 통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 보통 미니멀리즘 미술은 장식적인 것이 빠져 있고 기하학적인 특징이 강조되며 표현적 테크닉이 회피된 것이라 묘사되는데, 이는 미니멀리즘 음악을 설명하는 말로도 설득력이 있다.
미니멀리즘 음악은 몇몇 ‘미니멀리즘 음악의 테크닉’을 사용하는 음악으로도 정의할 수 있다. 이를테면 미니멀리즘 음악은 반복을 자주 활용하며 화성적으로 정체되어 있는 음악이다. 또한 이 음악은 저음 지속음(drone)이나 지속적인 비트 혹은 맥박처럼 일정한 리듬으로 흐르는 펄스(pulse)를 갖는다.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 음향을 구축하며, 최초 청취 시 이 음악의 작동 방식을 알아챌 수 있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청취 도중 심리적이고 음향학적 효과로서 의도하지 않았던 선율 등이 인지된다는 측면에서 메타음악(meta music)적이기도 하다.
또한 미니멀리즘 음악은 정치적·미학적으로도 정의할 수 있는데, 이 경우 1960년대 초기 미니멀리즘 음악과 1970년대 중반 이후 변화된 미니멀리즘 음악이 확연하게 다른 양상을 보인다. 초기 미니멀리즘 음악은 기존의 서양 음악 전통에 대항하는 정치적 포지션을 취하며 미학적으로 독특한 영역을 구축한다. 반면 1970년대 중반 이후의 미니멀리즘 음악은 특정 미학이나 정치적 맥락 혹은 지역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의 ‘스타일’ 혹은 ‘테크닉’이라는 측면에서 정의된다. 초기 미니멀리즘 음악이 최소한의 ‘수단’으로만 구성된 전위 음악에 가깝다면, 변화한 미니멀리즘 음악은 좀 더 복합적인 음향 안에 미니멀리즘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전통에 대항한 단순한 음악
‘클래식 미니멀리스트’ 혹은 ‘미니멀리즘 음악의 창시자’로 불리는 라 몬테 영(1935~), 테리 라일리(1935~), 스티브 라이히(1936~), 필립 글래스(1937~)는 공통점이 많다. 이들은 모두 1935~1937년 사이에 태어난 미국인들이며 1960년대의 대항문화와 다운타운 맨해튼 신을 경험했고 각각 아프리카 가나의 타악기 음악, 인도네시아의 가믈란 음악, 인도 음악 등 다양한 비서구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이들 모두 전문적인 음악 교육을 받았지만 아카데미에 머무르지 않고 자유 작곡가로 활동했다는 점, 작품 활동 초기에는 생계가 어려워 스스로 앙상블을 구성하고 기존 작곡가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곡과 연주를 병행했다는 점도 동일하다. 이런 네 명의 미니멀리스트가 ‘단순한 음악’ 혹은 ‘반복하는 음악’을 만든 것은 이들이 처했던 음악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이들이 처음 미니멀리즘 음악을 시도했을 때 미국 음악계에는 두 가지 부류의 기성 음악이 있었다. 첫 번째는 쇤베르크(1874~1951)와 베베른(1883~1945)을 거쳐 배빗(1916~2011)으로 이어진 음렬음악 전통이었고, 두 번째는 존 케이지(1912~1992)와 그의 제자들이 확립해놓았던 불확정성 음악 전통이었다. 이들은 음렬 음악과 불확정성 음악 모두에서 이미 끝났다고 선언한 ‘명확한 조성’과 ‘지속적인 펄스’를 다시 사용함으로써 그들의 기성세대에 저항한다. 라일리의 ‘인 시(In C, 1964)’는 당시의 아카데미와 전후 음렬음악의 헤게모니 앞에 놓일 때 그 정치적인 맥락을 드러낼 수 있다.
새로운 듣기의 자세를 제안하다
초기 미니멀리즘 음악은 미학적 측면에서도 서양 음악의 전통을 거부한다. 전통적인 서양 음악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음악적 이벤트는 통제된 끝 혹은 종합(Synthesis)으로 결론 맺으며, 작곡이란 ‘유기적인 전체’를 만드는 행위다. 하지만 미니멀리즘 음악에서는 이와 같은 서양 음악의 패러다임이 거부된다. 미니멀리즘 음악은 목적론적이지 않은 진행을 하며 외부의 대상을 지시하거나 재현하지 않고 오직 그 자체의 현존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이는 미니멀리즘 음악이 음악 안의 논리적 인과관계를 제거함으로써 음향 그 자체를 자율적인 것(autonomous)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이 재질라(1940~)와 함께 작업한 ‘꿈의 집 78분 17초(Dream House 78′ 17″, 1974)’는 이런 종류의 미학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 작품은 78분의 지속음으로 ‘존재’하며 그 안에는 어떤 음악 요소도 ‘발전’하지 않는다.
대신 미니멀리즘 음악은 음악을 듣는 새로운 방법을 제안한다. 미니멀리즘 음악을 듣는 청자는 음악 속에 등장하는 매우 미세한 변화에 집중하게 되며, 이런 변화를 감지하는 것이 작품의 주요 이벤트가 된다. 이런 감상 방식은 라이히의 ‘진자 음악(Pendulum Music, 1973)’이나 글래스의 ‘5도의 음악(Music in fifths, 1969)’을 듣는 데 적용해볼 수 있다. 청자는 이 작품들을 들으며 음향 안에서 점진적으로 벌어지는 리듬이나 음색의 변화 등을 기민하게 청취할 수 있다.
이렇게 초기 미니멀리즘 음악은 당시의 기성 작곡계 그리고 서양음악의 전통에 반대하는 포지션을 취한다. 이것은 이 음악이 부분적으로는 ‘대중음악’과 연결되어 있으며 ‘비서구 음악’에서 수많은 영감을 받아 태어난 음악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미니멀리즘 음악, 인기를 장착하다
초기 미니멀리즘 음악은 극도로 단순한 형태였지만 이제 이 음악은 점차 복잡해지고 짜임새가 다채로워졌으며 화성적인 진행을 포함하게 되었다. 이 음악은 8분음표로 이뤄진 5도 음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5도의 음악’에서 벗어나 여러 개의 부분이 등장하는 ‘변화하는 부분의 음악(Music with Changing Parts, 1970)’으로 변모하는가 싶더니,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글래스웍스(Glassworks, 1981)’ 같은 형태로 진화했다. 초기 미니멀리즘 음악을 가장 잘 설명했던 ‘미니멀리즘 미학’은 서양 음악에 내재한 ‘목적론적 진행’을 배격했지만 변화한 미니멀리즘 음악 안에는 종지 진행이 노골적이다. 라일리의 1973년 작품인 ‘G-노래(G-song)’가 그 예다. 이 음악 안에는 네 마디 단위로 반복하는 ‘예측 가능한’ 종지가 두드러진다.
미니멀리즘 음악은 미국 안에서 인기를 얻으며 번영했고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글래스의 음악으로 대표되는 무언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 음악은 더는 전위적이거나 기성세대에 저항하기 위한 음악이 아니며, 전 세계 콘서트홀과 오페라하우스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미니멀리즘 음악의 작곡가 목록에도 네 명의 클래식 미니멀리스트 이외에 존 애덤스(1947~), 메러디스 몬크(1942~), 마이클 니먼(1944~), 루이 안드리선(1939~), 아르보 패르트(1935~) 등이 추가되었다.
스타일을 입은 미니멀리즘 음악
미니멀리즘 음악은 이제 일종의 ‘스타일’이나 ‘테크닉’적 측면에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 ‘미니멀리즘 스타일’을 보여주는 곡으로 라이히의 ‘18명의 음악가를 위한 음악(Music for 18 Musicians, 1976)’을 꼽을 수 있다. 이 음악은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리듬형의 흐름이 일관되고, 작은 단위의 리듬으로 구축된 짜임새가 점진적으로 확장되어 클라이맥스를 만들고 그 이후에는 쇠퇴하며, 작품의 섹션들은 연속적인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곡 전반에 걸쳐 중단 없이 계속되는 펄스가 존재한다는 점, 밝은 느낌을 주는 음색을 갖고 있고 화성적으로 단순하다는 점, 친숙한 3화음이나 7화음 그리고 온음계적 화성 재료를 주로 사용한다는 점, 유려한 선율이 부재하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한발 더 나아가 미니멀리즘 음악이 ‘테크닉’적 측면으로 정의될 수 있다면 애덤스의 ‘화성학(Harmonielehre, 1985)’ 같은 작품이 미니멀리즘 음악의 목록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곡에서는 전형적인 미니멀리즘의 화음 반복이 등장하는가 싶더니 곧 이 화음들이 불규칙한 당김음 짜임새로 변한다. ‘미니멀리즘적인 반주’ 위에 ‘낭만주의적인 선율’이 얹혀 있는 부분도 등장한다. 미니멀리즘 음악의 테크닉을 활용해 새로운 진행을 만들어낸 것이다.
패르트의 음악도 비슷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패르트의 음악 안에는 ‘음과 화성의 제한적인 사용’, 그리고 ‘반복’ 등 다양한 미니멀리즘 음악의 테크닉이 드러난다. 그리고 여기에 다양한 종교적 텍스트들, 의식이나 예배를 암시하는 음악 형식 등이 결합된다. 이를 통해 패르트의 음악은 숭배나 명상 같은 특유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며 종교적이고 전통적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1984년 발매된 음반 ‘타블라 라사(Tabula Rasa)’가 좋은 예다. 이런 부류의 음악은 ‘영적 미니멀리즘(Holy Minimalism)’이라 불린다.
상당수의 작곡가가 ‘미니멀리즘 음악’이라는 이름 아래 조성을 다시 사용하고, 리듬이 강조되는 대중친화적 음악을 작곡한다. 그래서인지 미니멀리즘 음악은 콘서트홀에서부터 영화음악과 광고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발견된다. 이 음악이 20세기에 등장한 현대음악 사조 중 ‘유일하게 살아 있는’ 음악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미니멀리즘 음악 만끽하기
그렇다면 어떤 곡을 들을까? 창작자, 연주자, 평론가가 추천하는 미니멀리즘 음악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작품
최우정(작곡가)
♬ 스티브 라이히 ‘드러밍’(1971)
의식하지 못한 가운데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아주 미세하고 느린 변화들이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폴리포니의 향연. 그 움직임 속에서 악보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또 다른 성부들이 생성되어 나오는 듯 들리는 건 단지 환청일까?
♬ 필립 글래스 ‘미녀와 야수’(1946)
다양한 사건, 인물, 정서를 극도로 제한된 도구로 표현한다. 미니멀리즘 양식의 음악으로 어떻게 드라마를 구축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 전체적으로 모노톤인 것 같지만 그렇기 때문에 음 하나, 움직임 하나의 변화가 크게 느껴지고 그것이 극에 효과적으로 조응함을 알 수 있다.
♬ 모턴 펠드먼 ‘로스코 교회’(1971)
하나의 선율, 하나의 울림, 그리고 그 사이의 침묵. 음악은 그 침묵으로부터 나온다. 투명한 깊이, 깊은 투명함이라 할 수 있는 상태가 창조된다. 단순하고 조용하며 깨끗하고 느린, 소리와 침묵의 교대를 통해 작품은 우리를 음악 너머의 어떤 개인적이며 공동체적인 기억의 공간으로 이끈다.
송현민(음악평론가)
♬ 필립 글래스 ‘메터모포시스 I – V’(1988)
전환·변신을 뜻하는 제목 때문인지 피아노곡이지만 하프는 물론 가야금으로도 연주된다. 그 어떤 악기 소리로 들어도 ‘글래스표 음악’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반복 기법의 핵을 담은 곡. 들을 때마다 상상해본다. 하루 만에 모든 걸 잃고 정처 없어진 이가 야밤의 텅 빈 도로를 달릴 때, 스치는 쓸쓸한 야경을 담은 영상에 이 음악이 입혀진다면.
♬ 스티브 라이히 ‘드러밍’(1971)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컴퓨터에 버퍼링이 걸린 줄 알았다. 무율악기인 타악기만 사용하는 이 곡은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만 줄 뿐, 귀 기울일만한 음악적 메시지를 던지진 않는다. 이 곡의 재미난 부분은 곡의 후반부다. 무한반복으로 달군 열을 서서히 식히는 라이히만의 재치가 돋보인다.
♬ 아르보 패르트 ‘타블라 라사’(1984)
비발디 ‘사계’의 냄새가 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아르보 패르트가 작곡한 ‘사계’라고 생각한다. 이 곡을 듣고 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면 기존의 ‘사계’가 다시 들린다. 미니멀니즘의 음악적 기능성이 20세기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임수연(피아니스트)
♬ 존 애덤스 ‘화성학’(1985)
이 곡의 첫 번째 악장은, 애덤스가 꿈속에서 샌프란시스코의 베이 브리지 위를 달리던 중 배 한 척이 마치 로켓이 발사되듯 수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작곡했다고 한다. 두 번째 악장은 전설 ‘피셔 킹’을 차용, 세 번째 악장은 자신의 딸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듣는 내내 풍부한 상상력이 느껴지며 한 편의 드라마틱한 영화가 펼쳐지는 듯하다.
♬ 필립 글래스 ‘매드 러시’(1979)
피아노 솔로 곡으로, 단조 화음이 주를 이루고 있어 안정적이고 차분한 느낌을 준다. 현대인에게 명상과 같은 효과를 줄 수 있는 작품으로, 심신이 복잡하고 뇌를 쉬게 하고 싶을 때 들으면 좋을 것.
♬ 스티브 라이히 ‘6중주’(1984)
4명의 타악기 주자와 2명의 키보드 주자를 위한 작품. 필자는 서울시향 타악기 팀과 연주를 가진 바 있는데, 무한히 반복되는 비트가 고조되어 후반부에는 정신이 혼미해졌고, 마치 혼을 불러내는 의식을 치르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어딘가에 자신을 내던져 미쳐보고 싶을 때가 있다면….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 개빈 브라이어스 ‘예수의 피는 결코 나를 저버리지 않네’(1971)
영국의 개빈 브라이어스(1943~)처럼 감성적인 미니멀리즘 음악을 쓴 작곡가가 또 있을까 싶다. 그는 부랑자들을 촬영한 친구의 영화 필름 중 한 노인의 노래를 발견한다. 단 13마디 볼품없는 짧은 노래지만, 작곡가는 이를 200회 가까이 반복하며 현악 4중주부터 오케스트라와 합창까지 변주되는 반주를 붙였다. 이 작품을 듣다 보면 어느덧 눈물이 흐른다.
♬ 루이 안드리선 ‘국가’(1976)
미니멀리즘 음악은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발전했는데, 유럽 대륙에서는 유독 네덜란드가 이 대열에 동참했다. 그 주동자급에 루이 안드리선(1939~)이 있다. 그는 ‘국가’에서 플라톤의 ‘국가론’을 가사로 하여 ‘정치에서 음악의 역할’이라는 진지한 메시지를 직선적인 사운드로 호소한다. 집요하게 밀어붙이는 불협화음과 반복 구조에 세뇌당하지 않을 수 없다.
♬ 마이클 토케 ‘네 개의 잠언’(1993)
미니멀리즘의 막강한 영향력은 ‘포스트미니멀리즘’ 시대를 열었다. 재즈와 팝의 이디엄을 활용한미국의 마이클 토케(1961~)도 그중 한 사람이다. 기악과 분절된 노래가 어우러진 ‘네 개의 잠언’과 후속작 ‘잠언서’(1996)에서는 기준 패턴이 다양하게 변형된 형태로 반복되면서, 일률적이면서도 쉼 없이 이어지는 변화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한다. 작곡가 특유의 밝은 분위기에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도 어른거린다.
최수열(지휘자)
♬ 테리 라일리 ‘인 시(In C)’(1964)
현대음악을 자주 연주하면서도 미니멀리즘 음악을 무대에 올린 경험은 단 두 번이다. 테리 라일리의 ‘인 시’는 거의 모든 것을 연주자에게 맡긴다. 작곡가는 단지 한 장의 악보에 53개의 패턴만을 제시한다. 어떤 악기로, 어떤 순서로, 어떤 빠르기로 연주하든 자유다. 이에 무한한 가능성이 존재하며 각 연주마다 새롭게 태어난다. 필자의 무대 역시 그랬으며, 심지어 리허설 때와도 또 다른 음악이 탄생했다.
♬ 존 애덤스 ‘그랜드 피아놀라 뮤직’(1982)
‘인 시’와는 반대로 이 곡은 철저한 약속을 요한다. 템포, 셈여림 등 정확한 지시 사항이 악보에 꼼꼼히 기입되어 있다. 완벽한 연주를 선보이려면 30분의 연주 시간 동안 쉴 틈 없이 박자를 계산해야 한다. 음악의 어디쯤에 와 있는지, 단 한 순간이라도 한눈을 팔았다간 다시는 길을 찾지 못하게 된다. 청중은 음형의 반복을 통해 긴장을 풀지만, 연주자들은 온 몸이 경직되는 경험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