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노래했던 작곡가와 아침을 꿈꾸는 연주자의 동행
진중하고 깊이 있게 음악을 대하는 자세와 말수가 적다는 것까지 닮은 두 오랜 친구. 곤지암뮤직페스티벌 음악감독과 한국플루트교육자협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는 플루티스트 필립 윤트와 피아니스트 프레디 켐프가 10월 23일 예술의전당에서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해 직접 편곡한 브람스 가곡 ‘수호천사’와 슈베르트 ‘시든 꽃’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선보인다. 금속의 악기로 따뜻하고 묵직한 음색을 표현하며 깊은 감동을 선사하는 필립 윤트. 철학과 유머러스함이 어우러진 그의 이야기는 진정성과 따뜻한 인간미를 풍기는 연주와도 닮았다.
지난 9월 브람스 가곡 ‘수호천사’를 담은 신보를 발매했다.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편곡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무엇인가?
플루티스트는 보통 낮은 음역대나 어둡고 따뜻한 음색을 표현하기보다는 그들의 기교나 밝은 음색을 자랑하려 한다. 이런 양상은 음악을 더 크게, 더 빨리 연주하도록 만들었다. 나는 음악을 플루트에 맞춰 편곡하려 하지 않았고, 음악 그 자체의 위대함을 있는 그대로 담으려 했다. 브람스 같은 작곡가들이 오늘날 모던악기의 가능성을 알 수 있었다면, 아마 더 많은 플루트를 위한 레퍼토리가 존재했을텐데….
10월 23일 예술의전당에서 음반 발매를 기념하는 연주회를 갖는다. 브람스와 슈베르트의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특별한 이야기가 담긴 의미 있는 곡을 연주하고 싶었다. 많은 플루티스트가 슈베르트의 ‘시든 꽃’을 죽음과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어두운 곡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겐 정반대로 느껴졌다. 마지막 부분을 들어보면, 이 곡을 완전히 다른 곡으로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새로운 화음이 등장한다. 가사는 이렇다. ‘5월이 오면, 겨울은 사라진다.’ 이 모든 슬픔이 지나고 나면, 새로운 희망이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한편 브람스는 자신이 쓴 대다수 작품에서 사랑과 죽음, 그리고 상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시를 수집함으로써 스스로를 위로했고, 자신의 영혼을 치유했다. 그는 인상적인 문장을 음악으로 만들 때, 단어가 지니는 의미와 음악을 분리해 생각했고 자신만의 해석을 담고자 했다. 이러한 점이 가장 잘 드러난 곡이 바로 가곡 ‘수호천사’다. 가사는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순간의 마지막 분투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나 정작 멜로디는 투지력이 넘치는 당당함이 아닌, 교회 성가와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이번 음반과 공연을 통해 거의 연주되지 않는 이 아름다운 작품을 세상에 꺼내놓고 싶었다.
최근 브람스 작품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플루트를 위한 곡을 전혀 쓰지 않은 브람스에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어린 시절 브람스의 음악을 즐겨 듣는 편은 아니었다. 어릴 때, 운 좋게도 거의 매주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거나 리사이틀을 가지면서 플루트를 위한 거의 모든 클래식 레퍼토리를 연주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먼저 연주를 위해 탐구할만한 작품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 도전할 수 있는 작품을 찾던 중, 현대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전통음악과 민속음악에 흥미를 느껴 호주 원주민이나 캐나다 원주민들과 함께 연주하며 발칸 음악을 음반에 담기도 했다. 또 고악기에도 흥미를 느껴 바로크 스타일의 해석을 공부했다. 이런 시도들은 음악에 대한 식견을 넓혀주었고, 연주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여러 도전 끝에 정통 클래식 레퍼토리를 연주할 때만큼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엔 브람스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Op.78를 음반으로 발매하려 했다. 이를 위해 자료를 수집하며 공부하던 중 브람스와 사랑에 빠졌다. 무엇보다도 내가 브람스에게 가장 놀란 점은, 스스로 삶에 만족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나 명상적이고 이타적인 위로를 주는 곡을 쓸 수 있었냐는 것이다.
과거 당신의 인터뷰에서 흥미로운 부분을 보았다. “브람스를 만나게 되면 아침으로 에그 베네딕트를 함께 먹고 싶다”고 했는데.
더 다양한 조합을 위해 수란, 연어, 시금치, 올랑데즈 소스, 캐비아와 베이컨도 곁들이고 싶다. 너무 많나?(웃음) 이 모든 걸 곁들인 완벽한 아침을 그와 함께 먹으며,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플루트 솔로를 지닌 작품 중 하나인 교향곡 4번 4악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4악장에서 플루트 솔로는 바흐 칸타타에서 따온 단순한 멜로디를 연주하지만,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함께 연주하고, 이야기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당신의 ‘그녀’. ‘플루트의 스트라디바리’라고 불리는 알버트 쿠퍼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모던 악기 제작자에 의해 만들어진 대부분의 악기는 구매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얼마나 쉽게 연주할 수 있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지만 이런 플루트로는 소리에 변화를 주거나 다양한 색채를 표현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 오늘날 플루티스트들이 특색 없는 비슷한 소리를 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처음 알버트 쿠퍼를 마주했을 때, 연주하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려웠다. 단지 소리를 내기 위해 수많은 밤을 연습에 매진해야 했다. 그러나 악기를 통제하는 법을 터득하자 소리의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나는 이전에 이만큼의 음색과 음의 스펙트럼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고, 더 이상 다른 플루트는 연주하고 싶지 않았다. 알버트 쿠퍼는 깊은 소리는 물론이고 끝없는 가능성을 지닌 만큼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 어려웠지만, 수없이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난 후 ‘그녀’는 비로소 나의 음악, 나의 소리가 되었다.
독일의 막시밀리안 대학교와 보스턴의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제학 학사 과정을 마쳤다. 음악가가 되지 않았다면 경제학자가 되었을 거라고 말한 적도 있는데.
경제학은 숫자로 세상을 표현한다. 심지어 인간의 감정까지도. 마치 글자나 언어가 아닌, 숫자를 이용해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다. 경제학은 사고하는 법, 모든 것을 구조적으로 바라보는 법, 큰 문제를 차근차근 해결해나가는 법을 가르쳐줬다. 음악가들은 때론 그들의 음악에서 한 걸음 물러서 좌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난 운 좋게도 경제학을 공부하는 흥미로운 사람들과 예술을 전공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모두 만나볼 수 있었다. 음악의 본질은 음을 빠르거나, 정확하게 연주하는 게 아니다. 때론 음악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의외의 것들이 바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혹은 카덴차를 어떻게 연주해야 할지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앞으로 플루트를 위한 곡으로 편곡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파가니니의 24개 카프리스 전곡을 작업 중이다. 또 올 겨울에 있을 카메라타 뮌헨과의 첫 연주를 위해 플루트, 오보에 그리고 오케스트라를 위한 바로크 시대의 아리아들을 수집하고 있다. 아마 이번에 CD에 담지 않았던 브람스의 소나타 Op.78을 다음 음반에 담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2017년부터 고향인 스위스로 돌아가 뇌샤텔 음악원에서 교수직을 맡게 되었다. 한국에서 연주와 후학 양성에 매진했던 지난 8년이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은데, 돌아가면 먼저 무엇을 할 생각인가?
당신의 질문을 읽으면서 깨달은 건데, 사실 아직 아무런 계획이 없다.(웃음) 그러나 이미 내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한국을 아예 떠날 수는 없을 것 같다. 열 일곱 살에 스위스를 떠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깨달은 점은 어느 한 장소를 ‘집’으로 여기게 만드는 것은 집도 음식도 아닌, 바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곳에는 언제나 나를 환영해주고 아껴주는 많은 사람과 친구들이 있다. 그렇기에 앞으로도 한국에서의 생활과 일을 계속해나갈 생각이다.
사진 봄아트프로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