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이미경

음악은 나를 찾는 여행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11월 1일 12:00 오전

오랜만에 고국 무대에 서는 그녀가 말하는 진정한 음악가의 길

바이올리니스트 이미경의 연주를 처음 들은 건 2007년 가을날이었다. 지휘자 랄프 고토니가 이끄는 잉글리시 챔버 오케스트라와 함께 협연한 연주회에서 그녀는 첼리스트 송영훈과 앙코르 곡으로 헨델의 파사칼리아를 연주했다. 서정적인 선율과 화성이 조화를 이룬 그날 연주는 지금도 인상적인 무대로 마음에 남아 있다.

아름다운 무대였지만 유럽 무대에서 주로 활동하는 그녀를 만날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 여운이 아련할 즈음 얼마 전 이미경의 연주회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고국에서 연주회를 갖는 그녀. 한국을 찾은 이미경을 무대에서 본 지 10년이 거의 지난 후 만나는 자리였다.

“그때 연주는 저도 기억해요. 랄프 고토니와 잉글리시 챔버 오케스트라는 훌륭한 음악가이고 앙상블이죠. 음악적으로도 호흡이 잘 맞았어요. 저는 올가을과 겨울을 한국에서 보내게 되었어요. 42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에 이렇게 오래 머무르는 건데, 무척 행복하고 좋아요.”

이미경은 서울예고 2학년 재학 시 이미 서울교대콩쿠르, 이화경황콩쿠르에서 입상한 후 메뉴인 아카데미 오디션에 발탁되어 1975년 유학길에 오른 연주자다. 이후 스위스 메뉴인 아카데미에서 솔로이스트 디플롬을 획득하고 쾰른 국립음대를 거쳐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에서 공부한 후 현재까지 유럽에서 거주하며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쾰른 국립음대 콩쿠르 1위를 비롯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은상, 뮌헨 ARD 콩쿠르 1위 없는 2위로 입상하면서 세계 음악계의 주목을 받은 그녀는 베를린 국립음대 초빙교수, 헬싱키 시벨리우스 아카데미 전임교수로 재직하며 명교수로도 이름을 날렸다. 현재 메뉴인 아카데미 초빙교수로 활동하며 2006년부터 10년째 뮌헨 국립음대 전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은 올 때마다 그 변화가 커서 놀라곤 합니다. 우리나라에 대한 사랑은 변함없지만 전반적으로 예전과 많이 달라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좀 낯설기도 해요. 너무 바쁘고 경쟁에 쫓기는 모습이 때론 힘겨워 보이기도 하고요.”

독일에서는 어린 시절 ‘우리는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에 대해 진지하게 묻는 것에서 교육이 시작된다. 개인 ‘나’를 넘어 연대 속에서 추구해야 할 ‘우리’의 역할에 대해 중시하는 그들의 가치관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모든 분야의 변화 속도가 빠르고 경제도 크게 발전했지만 거기에 맞는 정신과 가치관이 함께 성숙하진 못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지금은 큰 도약을 위한 진통 과정이겠지만, 이제 진정으로 우리가 후손들에게 물려줄 아름다운 사회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지 않나 싶어요.”

그녀의 말처럼 이제 잃어버린 것과 되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성찰해야 할 때다. 그건 음악계 역시 마찬가지다. 유난히 젊은 연주자가 많이 등장했지만, 아무리 뛰어난 콩쿠르에서 수상했어도 음악은 그때부터 시작임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음악회는 힘든 삶을 살다 온 청중에게 잠시라도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영혼을 위로해줄 수 있는 시간이죠. 그러니 음악가는 그들에게 음악으로 진정한 선물을 선사해야 해요. 그 위로를 선물해 줄 수 있으려면 우리 연주자들이 먼저 비워지고 행복해야 할 것 같아요. 저 역시 있는 그대로 제 모습을 음악 안에 담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이번 무대에서 그녀가 들려줄 이야기는 브람스와 비에니아프스키, 그리그 작품이다. 이 가을에 잘 어울릴 것 같은 곡들을 편하게 선곡했다고 한다.

“제가 무대에 서는 건 그때그때 제가 공부한 음악을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예요. 그래서 미리 주제를 정해 선곡하기보단 제가 지금 이 순간 함께 나누고 싶은 작품을 마음 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고르는 편이죠. 브람스 소나타 2번은 그가 툰에서 작곡한 곡인데, 그곳은 제가 스 위스에서 여름을 보낼 때 가끔 지나는 곳이기도 하죠. 그래서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은 작품이었어요. 브람스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스케르초’는 자유롭고 외로운 감성이 잘 드러난 곡이에요. 소나타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죠. 그리그의 작품은 광활한 노르웨이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곡인데, 다른 곡들과 잘 어울릴 것 같아 선곡했어요. 하지만 이 음악회의 작품들이 잘 선곡된 것인지는 연주회가 끝나고 청중과 잘 소통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겠죠?(웃음)”

영혼이 숨 쉬는 시간

작곡가와 연주자, 청중이 만나는 무대는 그 메신저 역할을 하는 연주자에게는 부담이 되는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어려운 과정을 겪고 오르는 무대여도 자연스럽고 편하게 음악을 전해야 하는 그들은 짧은 시간 동안 다른 세상으로 청중을 이끌어야 한다. 그녀는 이 흥미롭고 감동적인 여행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그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성공한 무대인 것 같다고 말한다.

“예전에 연주를 마치고 무대 뒤로 갔는데, 한 청중이 무대 밖에서 절 기다리고 있더군요. ‘제가 하는 연주를 듣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났다’면서 고맙다고 하셨어요. 누군가의 마음속에 있던 감정을 음악을 통해 이끌어내고 공감할 수 있다는 건 이토록 감사한 일이란 걸 그때 다시 느꼈죠. 8년 전부터 애호가뿐 아니라 대중에게도 자연스럽게 오픈된 양화진 음악회에서 연주를 해왔는데, 이 음악회를 통해서도 연주자로서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어요. 열린 무대에서 청중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음악을 듣기 원하는지 알게 되었고요. 사실 기교는 음악을 만들기 위해 있는 것일 뿐 음악 자체가 아니죠.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시하는 돈의 가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돈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주위만 봐도 그것이 목적이 되면 인간의 삶이 형편없이 망가지고 불행해지는 경우가 많잖아요. 우리를 풍성하게 하는 것은 작은 만족, 감사, 서로를 향한 격려 같은 것이지 대단한 성공이나 재물 권력은 아닌 것 같아요.”

뛰어난 영재로 주목받던 그녀 역시 학창 시절부터 입시와 콩쿠르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비교적 어린 나이에 시작한 유학 생활은 그녀를 음악인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독립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음악의 본고장에서 맛본 클래식 음악은 갇혀진 지식이 아닌 그들의 삶 속에 있었다. 이제 음악도 예전에 느끼던 것과는 또 다르게 매일매일 새롭게 다가온다.

“삶이 변하니 음악이 달라지는 건 당연하죠. 그게 자연스럽고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평소 조용히 시간을 갖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무리해서 연주를 하는 편은 아니에요. 아마 그래서 음악을 지금까지 오래 좋아하면서 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저 지금 이 시간에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죠.”

하루를 일생인 것처럼 살아가는 그녀가 연주 이외에 좋아하는 것은 자연이다. 이미경에게 자연은 또 다른 음악이다. 그녀는 계절마다 바뀌는 자연을 보고, 바람을 느끼며 음악을 만난다.

“좋은 사람들의 음악회에 가서 받는 영감 역시 제 영혼을 풍요롭게 해요. 다양한 페스티벌에서 챔버 뮤직을 동료와 선후배 음악가들과 함께 하면서 새로운 도전도 받고 음악적 생각도 넓혀가고요. 곡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서적도 보면서 음과 음 사이 여백을 이해하기 위한 시간들도 제겐 행복한 순간이죠.”

희망을 주는 새로운 길

유럽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온 그녀에게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곧바로 ‘자립심’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결국 학생들의 스펙 쌓기보다 절실한 건, 갑자기 달라진 세상에서도 나답게 살 수 있는 자아를 찾게 하는 것. 그것이 가르치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책임이라는 것이다.

“다양한 나라의 학생들을 가르쳐봤지만 한국 학생들처럼 재주가 뛰어나고 부지런하고 열심히 하는 친구들이 드물어요. 하지만 스스로 하기보다는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받는 데 익숙해서 그런지 혼자서 문제를 해결해나가려는 용기, 그리고 자기만의 색깔인 개성이 부족하죠. 가정교육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우리 부모들이 해야 할 일은 정서를 안정시키고 아이에게 어떤 재능이 있는지 찾아내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봐요.”

그녀 가족은 음악하는 사람이 유난히 많다. 어머니가 서울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했고 언니 이미혜, 동생 이미주 역시 미국과 독일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음악적으로도 서로 도움을 많이 받는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면서도 그녀는 늘 스스로에게 왜 자신이 음악을 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정치학과 인류학, 그리고 건축을 전공한 자녀들에게도 전혀 악기교육을 강요하지 않았다.

“각자 자기가 가야 할 길이 있는 거죠. 그 길에 대해 늘 스스로 질문해야 할 것 같아요. 특히 음악은 예술이기에 연주자는 자기의 인생을 살아야 해요. 다른 사람의 말이나 평가보다는 자신의 음악에 대한 믿음을 갖고 나아갈 때 누군가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는 거겠죠. 모든 사람이 내 음악을 좋아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음악은 듣고 맛보고 느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자신만의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 그녀는 모든 배움을 멈추지 않는다. 집에서는 가족들에게,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무대에서는 동료들에게 배우고 나누고 성장한다. 그녀는 인생을 오케스트라에 비유했다. 그녀의 말처럼 각자 역할은 다르지만 모두가 존재해야 비로소 하나의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오케스트라는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할 때 내 안의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있는 인생과 많이 닮았다.

“성장한다는 건 참 감사한 일이에요. 신이 저를 창조하면서 계획해 놓은 길을 찾아가는 시간. 그 길을 찾아가다 보면 하루가 너무나 짧고 소중하죠. 하루 중 제 자신을 찾아갈 수 있는 순간이 바로 연습하는 시간이에요. 나를 만나는 시간, 그래서 음악 안에 있다는 것이 감사해요.”

오랜만에 한국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그녀는 11월 10일 연주가 끝나면 12월에는 피아니스트 김대진과 함께 바이올린 소품과 비르투오소 소품들로 음반을 녹음할 계획이다.

“누군가에게 길이 되어주고 싶어요. 누구나 가는 길이 아니라 낯선 길이어도 내면의 기쁨이 있는 나만의 길을 걷다 보면 누군가도 가보고 싶은 길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음악을 하는 후배들에게 ‘나도 저 길을 한번 가 봐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그런 길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우리는 알고 있다. 결국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더 깊이 생각하고 고운 결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며 걸은 길이 우리 삶을 변화시키고, 세상에 진한 향기를 남긴다는 것을. 그녀의 발자취가 그녀의 바람처럼 누군가에게 꼭 새로운 희망의 길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 길 위에 언제나 아름다운 음악이 함께하기를.

사진 심규태(H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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