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확한 컬러와 철학을 지닌 스웨덴의 레이블이 스칸디나비아를 넘어 아시아를 향한 적극적인 구애를 시작했다
올해 창립 43주년을 맞은 스웨덴의 음반 레이블 BIS는 다양한 레퍼토리를 조명하고 새로운 연주자를 발굴하는 레이블로 사랑받고 있다. 단단하고 내실 있는 아티스트들이 포진해 있는 BIS는 현대음악이나 북유럽 작곡가의 다소 낯선 레퍼토리들도 편식 없이 골고루 취함으로써 뚜렷한 개성을 드러내왔다. 여기에는 1973년 창립부터 지금까지 줄곧 대표를 맡고 있는 로베르트 폰 바르(Robert von Bahr)의 강한 신념이 작용한다.
아시아 음반 시장 답사의 일환으로 1박 2일의 짧은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한 폰 바르는 ‘객석’과의 만남을 위해 공항 가기 직전 2시간을 내어주었다. 인터뷰 내내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서도, 그는 “당신이 좋아할 만한 프로젝트에 관한 자료를 보내주겠다”며 기자의 이메일 주소를 받아 갔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일주일에 80시간씩 일하며 아직까지 앨범 포장도 손수 한다는 그의 자부심과 열정이 느껴졌다.
레이블 이름을 ‘BIS’라고 지은 이유가 궁금하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여러 유럽 언어에서 ‘BIS’는 ‘다시’ ‘반복해서’ ‘앙코르’ 등을 의미한다. BIS의 음반을 들은 사람들이 우리 음악을 또다시 들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았다. 농담이지만, ‘끝내주게 재밌는 것(Bloody Interesting Stuff)’이라는 뜻도 있다.(웃음)
원래 스톡홀름 필하모닉의 뮤직 테크니션(1968~1973)으로 활동했는데, 레이블을 설립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간단하다. 음반을 녹음할 회사를 찾지 못해서다. 당시 플루티스트 구닐라 폰 바르(로베르트 폰 바르의 첫째 아내)의 음반을 제작하기 위해 스웨덴의 여러 레이블에 데모 녹음을 보냈지만 ‘유명하지 않은 연주자’와 ‘대중적이지 않은 레퍼토리’라는 이유로 단 한 군데에서도 오케이를 받지 못했다. ‘NO’라는 대답조차 없이 무시당한 적도 많다. 결국 내가 직접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그것이 BIS 레이블의 시작이었다. 주변 연주자들에게 ‘내가 음반 회사를 차리면 나와 함께 음반을 제작할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고, 대답은 긍정적이었다. 우리와 같은 처지의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웃음)
그런 경험이 BIS를 운영하는 데에도 영향을 준 것인가?
맞다. 그래서 우린 레이블 앞으로 오는 모든 데모 녹음을 하나도 빠짐없이 듣는다. 그리고 ‘YES or NO’를 꼭 알려준다. 데모를 보내놓고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기분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기 때문이다.
무수히 많은 데모 녹음이 들어올 텐데, 새로운 아티스트를 선정하는 기준이 궁금하다.
특정한 기준이 있다고 말하긴 어렵다. 뛰어난 연주자는 많지만, 그중에서도 ‘뭔가 특별하다(It is something!)’고 느끼는 순간은 1~2년에 한 번 정도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클라리네티스트 마르틴 프뢰스트, 바이올리니스트 바딤 글루즈만 등이 바로 그러한 연주자들이다. 새로운 얼굴을 발굴하는 것은 노력과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지만, 그 희열은 엄청나다.
시벨리우스 에디션, 슈니트케 에디션 등 BIS만의 색깔이 분명한 시리즈를 기획해오고 있다. 대중적인 레퍼토리의 비중을 늘려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진 않는지?
이미 수많은 다른 레이블을 통해 훌륭한 연주자들이 유명한 작품들을 녹음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까지 똑같이 따라갈 필요는 없다. BIS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더욱 흥미로운 결과물들을 만들고자 한다. 덜 알려진 레퍼토리, 잠재력 있는 동시대 작곡가 등을 찾아내어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개인적으로 칼레비 아호·개릿 피셔 같은 작곡가를 발견해낸 것이 뿌듯하다.
BIS의 대표작인 스즈키 마사아키/바흐 콜레기움 재팬의 바흐 교회 칸타타 전집 역시 인상적이다. 55장의 SACD에 총 연주 시간은 63시간이 넘는다.
1994년, 바흐 콜레기움 재팬이 BIS에 데모 녹음을 보내왔다. 사실 일본인들이 바흐를 연주한다는 사실에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들의 연주를 듣자 그 생각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실력 있는 연주 단체일 뿐 아니라 앞서 말한 ‘특별한 무언가’를 갖고 있었다. 우린 1995년부터 바흐 교회 칸타타를 녹음하기 시작했고, 난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바흐 콜레기움 재팬을 홍보했다. 정말 힘들고 비용도 많이 들었지만, 차츰 빛을 보기 시작해 오늘날까지 왔다.
클래식 음악은 아시아의 로컬 문화가 아니다. 그럼에도 아시아가 매력적인 클래식 음악 시장이라고 생각하나?
알다시피 일본은 클래식 음악 수요가 탄탄하고, 한국과 홍콩 등도 그에 못지않은 시장성을 보여주고 있다. 국적에 따라 클래식 음악의 수용 능력이 다르다는 생각은 지금 이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낡은 편견이다. 아시아에서는 훌륭한 연주자들이 계속 배출되고 있고, BIS 역시 싱가포르 심포니와 중국 피아니스트 사첸 등 여러 아시아 아티스트들과 작업해왔다. 한국의 경우 작곡가 진은숙의 작품이 수록된 앨범(2014)을 발매했고, 조만간 한국의 10대 소녀 바이올리니스트가 파가니니 24개의 카프리스를 녹음할 예정이다. 누구인지 궁금하겠지만 몇 달만 기다려 달라(기자가 재차 질문했지만, 폰 바르는 끝까지 그녀의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디지털 시대에 CD가 갖는 가치에 대해 묻고 싶다. BIS가 주력하고 있는 하이브리드 SACD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본질은 결국 음질인가?
MP3 덕에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음악을 들을 수 있지만, ‘Hear’가 아닌 ‘Listen’을 위해서는 결코 최고라고 할 순 없다. 음악 감상은 아주 액티브하고 능동적인 행위다. 책을 읽거나 샤워를 할 때 음악을 틀어놓는다고 해서 그것을 제대로 감상했다고 할 순 없는 일이다. 음악을 집중해 듣기 위해서는 최상의 음질이 보장될 필요가 있다. 더 먼 미래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CD가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당신은 BIS뿐 아니라 클래식 음악 다운로드 사이트(eClassical.com)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서 표방하는 것은 바로 당신이 방금 언급한 ‘고품질 음원’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기존 음원 유통망이 있는데도 판매 플랫폼을 별도로 보유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퀄러티를 보장하기 위해서다. BIS가 만든 음악을 품질 낮은 스트리밍과 납작한 사운드의 MP3로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BIS의 고객들은 고품질 사운드에 열광하고, 음질을 위해 우리가 쏟는 엄청난 노력을 인정해준다. 그들에게 디지털 형태로도 최대한 수준 높은 음질을 들려주고자 독자적인 플랫폼을 갖게 되었다.
2017년 BIS에서 발매될 음반 중 주목해야 할 몇 가지를 추천한다면?
플루티스트이자 내 아내인 샤론 베잘리와 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가 함께 녹음한 음반이 곧 나온다. 내가 즐겨 보는 미국의 인기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의 작곡가 제프 빌이 BIS의 제안으로 특별히 작곡한 ‘하우스 오브 카드 교향곡’을 여름에 녹음할 예정인데, 개인적으로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작업이다.
사진 전성빈(studio B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