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화엄사

어우러짐의 절정, 철현금·거문고 이중주 ‘대화’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12월 1일 12:00 오전

화엄사를 향해 가는 동안 벌써 가을인가 싶었다. 세상은 지나치게 소란하고, 그래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그 소란함은 수많은 우리의 마음을 할퀴고 있다. 그렇게 상처 난 마음을 다독여주는 것은 결국 내 옆의 사람들이었다. 나와 같이 걷고, 그렇게 걷다가 눈이 마주친 이 땅의 많은 사람이 애틋했다. 우리는 서로 보듬고 살아야 하는 운명일지 모른다

안동, 마음의 고향

몇 해 전 이른 봄날 아침, 문득 엄마가 그랬다.

“벚꽃 구경 가고 싶다.”

그렇게 갑자기 떠난 곳이 구례다. 봄이라기에는 아직 날이 차가웠는데도 구례의 유명한 벚꽃은 꽃 대궐을 이루며 만개해 있었다. 눈처럼 내리는 꽃비를 맞으면서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한껏 느꼈다. 화엄사를 다 돌아보고 나오는데 벽에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

전쟁 당시 절을 불태우라는 명을 받들 수 없다며 한 말이라고 한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가슴에 품은 뜻을 온 힘을 다해 실현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그때의 기억이 나를 화엄사로 다시 이끈 게 아니었을까.

각황전의 위용, 대웅전의 정취

우리 음악을 하면서 그 안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게 되고, 그럴수록 더욱 알고 싶어진다. 이 글을 연재하면서 우리나라 곳곳을 다시 돌아봤는데, 그 길 위에서 진심으로 행복한 순간이 많았다. 아주 먼 옛날의 스승들을 만나기도 했고, 우리 음악에 담긴 것이 그 스승들의 깊은 사랑이었다는 걸 느꼈다. 박동진 명창이 말씀하신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라는 말도 절절히 깨달았다.

화엄사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사찰이다. 규모가 크고, 그 안에는 국보와 보물이 가득하다. 또 그 보물만큼 웅장하고 눈부신 지리산 자락이 영험한 기운을 떠받치고 있다. 대부분의 사찰이 웅장하고 강건한 느낌을 주지만, 화엄사는 그 극치를 보여주며 위풍당당하다. 천왕문을 지나 보제루를 돌아들어서면 그 널찍한 경내에서 편안함과 온화함을 느끼게 된다. 정면으로 보이는 대웅전보다는 각황전이 눈길을 끈다. 거대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오래된 사찰은 마주하는 순간 마음이 동요할 만큼 아름답다. 그 뒤로 가파른 산세가 각황전의 위용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넋을 잃고 각황전에 다가가면 그 앞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등이 자리 잡고 있는데, 아래서 올려다보면 하늘을 다 가릴 정도로 거대하다.

화엄사에는 석탑이 많다. 그 석탑들을 모두 한 바퀴씩 돌며 마음에 품고 있는 기도들을 떠올렸다. 그러는 동안 왠지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수험생 자녀를 둔 부모가 많아 보였다. 부처님께 끊임없이 절을 올리는 그 낮은 등도 내 마음처럼 기쁘기도, 슬프기도 할 것 같았다.

대웅전 앞에서 먼 곳을 내려다봤다. 가을 날씨답지 않게 날이 흐려 멀리까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뿌옇게 보이는 먼 산이 수려했다. 대웅전 뒤로 올라가면 구층암으로 가는 대나무 숲길이 있다. 주황색으로 물든 단풍에 눈이 찌르르했다. 낮은 돌담 위에는 사람들이 쌓아놓은 돌탑들이 늘어서 있었다. 한참 공을 들여 작은 돌을 주워서 가족들과 친구들 이름을 부르며 탑을 쌓았다. 아마도 내 마음에 간절한 것이 많았나 보다. 구층암으로 걷는 길은 조용하고 야트막했다. 숲은 가을 냄새로 향긋하고, 발에 밟히는 마른 잎에서는 ‘파스락’ 하는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운조루에 담긴 배려하는 마음

구례 오미리에는 운조루가 있다. 조선 무관 삼수공 유이주가 지은 1000평 규모의 넓은 대지에 지은 가옥으로, 이곳의 사랑채 이름이 운조루였다.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명당에 세워진 이 집의 이름이 그 규모, 명성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 ‘운조루’라는 이름이 자못 신비롭다.

운조루에는 두 가지 큰 자랑거리가 있다. 첫째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이 새겨 있는 큰 쌀독이다. ‘누구든 이 쌀독을 열 수 있다’는 뜻.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린 사람들을 이 쌀독으로 구제했다고 한다. 운조루의 두 번째 자랑거리이자 이 집만의 특징 중 하나는 굴뚝이다. 보통의 굴뚝은 높이 쌓지만, 이곳 굴뚝은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 있다. 밥 짓는 연기가 멀리 퍼지는 것을 막아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굴뚝이야 어떻든 무슨 상관이랴 싶지만, 그 세심한 배려에 마음이 시큰거린다.

과연 구례 땅은 아늑하고 풍요롭고 따사로웠다. 하지만 땅이 그렇다고 모두가 그 땅을 닮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감나무 끝에 달려 있는 주홍빛 감을 보니 더욱더 조상들의 덕과 지혜, 선함이 그리웠다.

공평하게, 균형 잡힌 그대로 흘러가는 시간을 보면서 문득 낯설다는 생각도 들었다. 음악을 한들, 열심히 산들, 꿈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간들 결국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 더 나아지지 않는 세상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괴감이 들었다.

소통의 에너지가 가득한 ‘시나위’

수많은 우리 음악에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이 있다. 바로 소통한다는 것이다. 꽉 짜인 틀의 얽매임 없이 자유롭다는 건, 곧 서로의 소리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전폭적 지지, 그리고 선의의 경쟁 같은 것에서 비롯된다. 오늘 소개할 음악은 시나위다. 앞서 다른 글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전통음악의 백미는 즉흥성에 있다. 그 즉흥의 가장 끝에 존재하는 음악이 바로 시나위다. 독주로 연주한 시나위도 있고 구음 시나위도 있지만, 이번에는 산조를 바탕으로 한 기악합주로서 시나위 이야기를 하고 싶다.

고등학교 때 시나위를 실제로 처음 들었다. 비교적 젊은 연주자들의 패기 있는 연주에 객석의 가장 구석에 앉아서도 심장이 쪼그라들 것만 같았다. 처음에 느긋하면서도 떵떵거리는 듯 장단이 시작되면 모든 악기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나간다. 마치 집을 짓는 것처럼 반듯하고 조심스럽다. 점점 장단이 빠르게 진행되면 악기들도 날개를 펼친다. 소리들이 부딪히고, 튕겨 나가고, 맞서고, 그러다 품어준다. 그 과정에서 듣는 사람은 혼이 쏙 빠진다.

그러다 각 악기가 몇 장단씩 솔로 연주를 한다. 좋아하는 산조의 가락이기도 하고, 남의 가락을 따라 연주하기도 한다. 다음에 오는 악기들은 먼저 연주한 악기의 선율에 반전을 꾀하기도 하고, 무언가를 더욱 뽐내며 내지른다. 모든 연주자는 연주되고 있는 그 선율이 마치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것인 양 함께 흔들리고, 어우러진다.

음악은 점점 더 열기가 오르고 흥을 돋운다. 절정의 순간 장구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 장단으로 넘어가는데, 그 호흡이 정말 놀랍다.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는 말들을 순간적으로 제압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제압이라는 것이 압도적이면서도 자연스럽다. 그 점이 늘 놀랍다. 가파르게 달리다가 갑작스레 브레이크가 걸리는데, 그것이 음악을 더욱 감칠맛 나게 만든다.

이 와중에 악기들은 서로 다른 조로 연주하기도 한다. 하지만 생뚱맞거나 이상하게 들리지 않고, 전혀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는 것처럼 묘한 자극을 느끼게 된다. ‘저기서 어떻게 저런 선율로 가지’라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그 선율에 정신없이 이끌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감탄처럼 추임새가 터져 나온다. 추임새와 함께 무대와 객석 전체가 들썩이고, 우리는 그 속에서 무아지경을 맛보게 된다.

공연이 끝나고 극장을 나오면서 맡은 공기의 냄새도 기억난다. 투명하고 날카로운 냄새였다. 숨을 쉬지 않고 있다가 첫 숨을 쉬는 것 같은,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시원함이었다. 시나위 속에서 흐르던 막대한 에너지는 우리 모두를 휘돌아 흐르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장구·가야금·거문고·대금·해금·아쟁·피리를 따라 가다가 나에게도 들어오고, 내 옆의 사람에게도 들어가고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보태지고 나뉘어, 엄청나게 증폭된 것이다.

더불어 사는 것의 가치

시나위라는 장르는 지금도 변화하고 있다. 좀 더 색다르고 획기적인 사운드의 시나위로는 허윤정과 유경화의 ‘대화’가 어떨까. 허윤정의 거문고는 따스하고 깊다. 유경화의 철현금은 화려하면서도 명징하다. 이 두 악기와 연주자가 만나서 만들어내는 음악은 매우 강렬하면서도 은은하다. 속닥거림 같다가도 싸움이 일어나고, 또 다독이면서 서로 상대의 소리를 더욱더 이끌어낸다.

화엄사에서 묻고 싶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이고, 그것이 정말 귀한 것이라는 건 어떻게 알아보는 것인가에 대해. 그걸 알아내려고 모두 안간힘을 쓰며 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앞에 이어진 길을 걷다 보니, 나와 비슷한 사람은 물론 전혀 다른 사람도 만난다. 그들은 나와 동떨어져 있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고받는다. 우리는 엉키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한다. 당연하게 맞닥뜨리는 어려운 순간에 중요한 것은 소통일 것이다. 남의 소리를 듣고, 나의 소리를 내어주고, 그렇게 우리 각자의 목소리는 한데로 합쳐져, 강이 되고 음악이 되어 흐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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