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부터 시작된 발걸음은 지금도 쉼없이 달리고 있다. 아이들에겐 음악이, 그 곁엔 그녀가 있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1983년 미국 LA의 한 공연장에서 ‘고향의 봄’이 울려 퍼졌다. 해외여행 자유화가 허용되기 전이었다. 노래를 부르는 49명의 난파소년소녀합창단, 객석에 앉은 수백 명의 동포까지 목소리는 제각각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은 모두 하나였다.
그보다 2년 전인 1981년,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을 하던 같은 해 난파소년소녀합창단도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아비규환이 채 가시지 않았던 군부독재 시절이다.
김정자 이사장은 그 시절을 회상하며, 어두운 커튼이 드리워져 창밖의 햇살을 전혀 볼 수 없었던 상황에 비유했다. 경제·사회적으로도 어두운 분위기였거니와, 당시 통용되는 문화라는 게 거의 전무하던 시절이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이 캄캄하던 상황, 그녀는 시선을 돌려 오래전 자신이 꿈꾸던 것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서 나름의 꿈을 키워온 어린 시절이 생각났어요. 사회의 미래는 결국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달려 있고, 이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꿈을 심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가 건강해질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어요.”
청소년에 대한 김 이사장의 각별한 관심은 부군 차성윤 씨와도 관련이 깊다. 지난해 작고한 그는 경기도 수원에서 명성 높은 세종학원의 이사장을 맡아왔다. ‘나눔의 기쁨을 가르치는 교육’을 소신으로 삼은 부부는 지역문화 부흥과 예능인재 양성을 위해 1981년 난파소년소녀합창단을 창단한다.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 혼자가 아닌 더불어 함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고민하던 중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 합창에 초점을 맞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선율에 담긴 아름다움을 느끼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간미와 정을 나누는 것 모두가 노래 안에서 가능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합창단의 이름은 당시 행정구역상 수원군 출신 작곡가 홍난파의 이름에서 따왔다. 하지만 훗날 이것이 합창단 활동에 큰 어려움이 되리라곤 당시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문화저변 확대와 보급에 힘쓰다
1980년대 난파소년소녀합창단은 국가 주요행사 및 해외 순회에 초청되어 민간 외교사절단 역할을 해냈다. 기업이나 정부의 후원 없이 모두 자력으로 성취한 것들이다. 이러한 흐름 가운데 현 성정문화재단의 전신인 성정예술원, 재단 산하의 성정청소년교향악단, 성정필하모닉오케스트라, 성정뮤지컬단, 성장장학회는 모두 1990년대에 첫 발을 내디뎠고, 다양한 음악을 아우르는 단체로서 면모를 갖춰나갔다. 또한 1990년 청소년음악회를 처음 개최해 매년 거듭해온 한편, 지역의 중·고등학교를 순회하는 청소년 열린음악회 역시 1994년 시작해 지난해까지 총 76개교에서 지속적으로 실시했다.
“당시 도시와 농어촌의 문화 격차는 상당했어요. 지방에서 악기는 풍금만 알았지, 바이올린이나 첼로를 모르는 아이도 많았어요.”
성정문화재단의 1990년대는 청소년문화사업의 팔레트를 본격적으로 펼쳐나가며, 문화저변의 확대와 보급에 적극 힘을 쏟아온 시기인 셈이다.
이후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홍난파 탄생 100주년 전후로 친일 논란은 한층 불거진다(그로부터 10여 년 후인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홍난파의 이름이 등재됐지만 43세 나이로 숨진 홍난파의 업적과 친일 행적을 두고 이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엇갈리고 있다). 당시 준비하던 기념사업은 직격탄을 맞았고, 취지나 활동에 상관없이 어느 단체든 ‘난파’라는 이름만으로 화살이 날아갔다. 재단이 지금의 ‘성정’이라는 새 옷을 입은 것도 이때부터다. 1990년대 초부터 15년 넘게 이어지던 전국음악콩쿠르 이름이 ‘성정’으로 바뀐 직후, 참가자수가 500~600명 정도로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재단의 시초인 ‘난파소년소녀합창단’만큼은 이름을 바꿀 수 없었다. 사실 이름뿐만 아니라, 시대적 흐름에 비춰볼 때 소년소녀합창단 활동은 과거 전성기에 비해 위축된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하지만 33주년을 맞이한 지난 2014년 김정자 이사장은 기념음악회를 열었다. 단원들의 자부심을 높이고, 아이들이 나라의 희망이자 성장 동력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예술인재 발굴과 양성을 지속한 이유
2000년대 중반을 지나며 성정전국음악콩쿠르가 안정화되자 성정문화재단은 콩쿠르 출신 수상자들이 연주자로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예능인재 양성을 위한 장기 프로젝트인 셈인데, 현재 성정문화재단에서 가장 많은 비용과 인력이 투여되는 부문으로 기업 후원 없이는 지속하기 쉽지 않은 현실이다.
인재 발굴의 장으로써 기능하는 성정전국콩쿠르는 문화체육관광부가 대회의 투명성 제고를 위해 실시하는 평가에서 4년 연속(2008~2011년) A등급을 받은 바 있다. 올해 참가자는 역대 최다인원인 1,268명의 참가자와 116명의 심사위원이 등 5000여 명의 음악가들이 모여 콩쿠르를 치렀다.
“인재발굴은 중요하고 귀한 일이죠. 하지만 유망한 인재를 발굴해도 이들이 나아갈 앞길이 경제적·사회적 여건으로 인해 막혀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목격하게 됐어요. 경제적인 부분뿐 아니라 음악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다양한 필요를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지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에 좀 더 구체적인 장학 사업들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취지에 따라 2005년 성정전국음악콩쿠르 당시 최연소 대상 수상자로 초등학교 6학년 시절부터 현재까지 재단의 지속적인 후원을 받아온 첼리스트 문태국은 2014년 동양인으로는 처음 카살스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2017년에는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상주음악가로 활동한다. 이 외에도 성정전국음악콩쿠르 수상자들로 구성된 성정트리오가 2015년부터 활동을 시작했고, 올해는 성정콰르텟이 새롭게 꾸려졌다.
더불어 올해 35주년을 맞이한 성정문화재단은 순수 민간단체로서 다양한 예술단체를 꾸리고 음악가를 위한 장학·후원 사업을 펼쳐온 지난 시간을 반추하고, 앞으로 맞이할 미래를 함께 그리는 자리로 12월 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창립 35주년 기념음악회를 마련한다.
지금껏 한 해도 멈추지 않고 예술과 인재발굴에 대한 절대적 지지를 이어온 김정자 이사장에게 ‘예술 후원의 가치와 의미’에 관해 물었다. 오랜 시간 다채로운 경험에서 우러나온 듯, 그녀의 대답은 힘 있고 명료했다.
“지원받아야 하느냐, 후원해야 하느냐를 논하기 전에 문화예술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는 태도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아직 우리 사회에선 예술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그만인 것으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있어요. 예술에 대한 가치를 인정할 때, 후원은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궁극적으로 자립이 가능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꼭 필요한 영역에 지원이 되고, 과다한 후원은 줄어드는 선순환이 이뤄지지 않을까요.”
사진 박진호(studio B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