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소 비르살라제 피아노 독주회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7년 3월 1일 12:00 오후

노련미, 완성도, 호연

음악이 늘 익숙한 음악가에게도 음악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물러서서 시간을 갖고 다시 느껴보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모스크바 유학 시절부터 학교의 교수님으로 친근함을 유지하던 엘리소 비르살라제의 실제 연주를 오랜만에 접하면서 내가 받은 신선한 자각은, 그런 면에서 매우 유익하고 적절했다. 20여 년 전부터 모스크바 청중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비르살라제는 철저한 자기 관리가 동반된 성실함과 꾸준함의 무대로 기억된다. 오래도록 유지하고 있는 검정색 단발머리와 늘 입는 검은 연주복에서 나타나는 엄숙한 분위기, 강한 통제력을 통해 앞뒤 구조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해석을 보이며 작곡가의 감성보다는 이성에 적극 공감하여 논리의 필터를 통해 표현해내는 악상 등은 어떤 곡을 연주하든 ‘틀림없는 완성도’를 제공하는 동시에 타인의 의견이나 의문점이 흘러들어갈 구석이 없이 단단한 외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이번 내한 연주에서도 그녀의 스타일은 그대로였다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노년의 달관이 선물한 자유로움 속에서도 작품의 본질 상 필수적인 여러 요소를 빠짐없이 챙겨 넣는 치밀한 모습이 과거보다 더 눈에 띄고 드러나 보인 점이다.

묵직한 인상을 남긴 슈만의 ‘아라베스크’부터 비르살라제는 독특한 외형의 해석을 들려주며 청중을 각성시켰다. 다소 납작하고 건조하게 조정된 음상의 도입과 첫 파트에서 듣는 이들을 의아하게 했던 그녀는, 곧이어 짙은 감상과 작곡가 특유의 과도한 멜랑콜리를 표출시키며 작품의 균형을 맞췄다. 에필로그의 긴 울림은 7분 남짓한 소품이 달콤함으로만 기억되지 않게 만들려는 능숙한 연출력이었다. 으레 부드러운 터치와 화사한 음색을 기대하게 되는 슈베르트 소나타 A장조 D664에서는 무게를 한껏 덜어낸 타건과 작은 폭으로 조정된 다이내믹 변화가 오히려 텍스트 자체의 아름다움을 강조시키는 역발상으로 다가왔다.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화사함에 방점을 찍은 것은 고전적 단정함으로 마무리된 양 악장 사이에 자리 잡은 안단테였다. 단순한 선율에 페달로 충분한 양감을 주어 슈베르트의 센티멘털을 떠올리게 만드는 내공에서는 진정한 깊이가 느껴졌다. 갑작스레 커진 음량과 거친 질감의 소리로 시작한 프로코피예프 소나타 2번 역시 악장간의 대비와 작곡가 초기의 안티 로맨티시즘에 대한 아이디어, 거기에서 터져 나오는 응축된 에너지 등이 음악적 저울의 한쪽 끝이 기울지 않도록 훌륭하게 조절되어 나타난 호연이었다. 템포와 음량, 페달링 등 어느 요소도 노년의 타협을 스스로 용납하지 않는 모습이 멋졌다.

여덟 곡으로 이루어진 슈만 환상소곡집 Op.12에서 비르살라제가 펼쳐놓은 해석은 매우 자유로운 동시에 각 악장의 캐릭터를 맘껏 표현해도 작품 속 일관된 목소리의 내레이션이 흐트러지지 않는 달관의 경지였다. 1곡 ‘석양’과 3곡 ‘왜?’는 선 굵은 흐름이 강한 설득력을 주었고, 2곡 ‘비상’과 6곡 ‘우화’는 다채로운 스토리텔링 가운데 충동적인 템페라멘트가 인상적이었다. 덤덤하게 마무리된 8곡 ‘노래의 끝’은 여러 방향으로 튀어나왔던 악장들의 캐릭터를 편안하고 넉넉하게 감싸는 든든한 마무리였다.

하이라이트인 리스트의 작품으로 넘어가기에 슈만 가곡이 원곡인 ‘헌정’은 절묘한 선곡이었다. 비르살라제의 시그너처 레퍼토리 중 하나인데, 소품의 사랑스러운 정서와 함께 비르투오소적 화려함이 진지하게 결합된 해석이 돋보였다. 리스트의 ‘스페인 광시곡’ 역시 광채가 흩날리듯 날아다니는 가벼운 연주와는 거리를 둔, 절대음악적 요소를 강조한 유장한 흐름이 추진력 있게 나타난 호연이었다. 75세란 나이가 한순간도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튼튼한 기교와 과감한 프레이징은 물론이고, 작품 가장 아래에 숨어 있는 파토스와 충동적 에너지를 귀족적인 우아함으로 탈바꿈시키는 노련함은 듣는 이들에게 뿌듯한 만족감을 제공했다.

 

김주영(피아니스트)  사진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엘리소 비르살라제 피아노 독주회 | 2월 16일 금호아트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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