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놀이 탄생 40주년-2 사물놀이 탄생,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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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4월 1일 12:00 오전

지난 2월 22일 오후 5시, 사물놀이 전용 극장으로 개관한 인사아트홀(종로구 인사동길 34-1)에서 뜻 깊은 시간을 가졌다. 사물놀이 탄생 40주년을 축하하고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며 미래를 전망하는 자리. 앞으로의 40년을 내다보기 위해 ‘2세대 사물놀이’인 한울림 예술단 단원들이 무대에 올라 40년 전 ‘공간사랑’에서 연주됐던 ‘웃다리 풍물’을 재현했다. 그들 뒤로 창단 멤버 4인의 사진이 떠올랐다.

김덕수에게 2017년과 2018년은 ‘60, 40, 20’을 맞는 귀한 시기이다. 남사당을 시작으로 예인으로 데뷔한 지 ‘60년’이 지났고, 사물놀이 창단 ‘40주년’을 맞았으며,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연희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한지 ‘20년’이 흘렀다. 근대 공연예술사의 산증인이자 전통의 창조적 계승일 일궈나가는 예인, 김덕수를 만나 사물놀이의 지난 40년을 반추하며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순간들을 지면으로 정리했다. 자료가 부족한 부분은 김덕수가 사물놀이 30주년을 기념하며 출간한 저서 ‘신명으로 세상을 두드리다’를 참고했다.

 


1978 | 탄생

이광수·김용배·김덕수·최종실의 모습

2월 22일. ‘전통음악의 밤’을 꾸민 네 명의 젊은 예인, 김덕수·김용배·이종대·최태현은 경기·충청 지역의 장단을 사물을 위한 음악으로 정리한 ‘웃다리 풍물’을 발표했다. 남사당패의 거친 전통이 세련된 소리를 지닌 ‘사물놀이’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이후 이들은 웃다리 가락에 이어 호남의 우도농악, 경상도의 삼천포 12차 36가락 등을 정리해 사물놀이의 음악으로 삼았다. “일부에선 사물놀이가 파격적이란 이유로 전통을 무시한 것이라며 이단아로 몰아붙였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전통은 지킴이 아니라 창조를 통한 열림이다.” 4월, 농악 12차 36가락을 발표하는 무대에 이종대 대신 최종실이 합류했다. 1979년, 최태현이 나간 자리에 이광수가 들어오며 ‘사물놀이’ 창단 멤버가 모두 모이게 된다.

 


1980 | 장르 간 협업의 장을 열다

4월, 사물놀이는 공간사랑에서 오스트리아 타악기 연주자인 라인하르트 플라티쉴러, 색소포니스트 강태환과 무속 장단을 재즈 풍으로 편곡한 ‘액탈푸리(EKTALPURI)’를 선보였다. (국악에서 ‘푸리’란 ‘맺힌 것을 풀어 조화롭게 한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이날 공연을 기점으로 사물놀이는 기존의 전통을 계승·보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본격적으로 ‘장르 간 융·복합’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이후 사물놀이는 전통에 대한 편견을 깨고, 전통연희의 뿌리를 따라 연극·무용·드라마·뮤지컬 등과의 협업을 통해 경험을 축적하며 세계로 뻗어 나갈 자양분을 쌓았다.

 

사물놀이, 완전체를 이루다

최종실·김덕수·이광수·김용배의 모습

 

 

 

 

 

 

 

 

 

 

9월 29일. 김덕수·김용배·이광수·최종실이 ‘사물놀이’라는 이름으로 오른 첫 번째 공식 무대에서 ‘풍물패 걸립굿’을 발표했다. 이들이 풍물뿐만 아니라 ‘장단의 보고’라 여겨지는 무속 음악으로 시야를 넓히며 적극적으로 음악세계를 확장해나갔음을 알 수 있다. 7살부터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한 김덕수는 일찍이 그곳에서 어린 이광수·김용배·최종실을 만났단다. 지역을 대표하던 어린 아이들이 자라나 나라를 대표하는 예인이 될 줄이야. 이들의 만남은 운명, 사물놀이의 탄생은 필연이었다.

서울국악예술중학교 학생들의 사진. 뒷줄 왼쪽부터 이철주, 박범훈, 최태현, 김무경. 앞줄에 김덕수와 최종실이 있다

 

 

 

 

 

 

 

 

 

 

 

 

 


1982 | 신명으로 세상을 두드리다

사물놀이는 미국순회공연의 일환으로 달라스에서 열린 세계타악인대회(PASIC)에 참가해 세계무대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첫 데뷔 무대였다. 이는 세상을 향한 강렬한 신고식이자, 장차 선보일 거침없는 행보에 대한 당찬 예고였다. 사물놀이 창단 멤버들은 세계시장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한 이 날의 공연을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로 꼽았다. “4천여 명의 관객 앞에 섰는데, 정말 ‘대박’이 났다.(웃음)

 


1983 | 최초의 사물놀이 협주곡

2월 22일. 서울시향의 제290회 정기연주회 마지막 무대로 사물놀이가 등장해 작곡가 강준일의 첫 번째 사물놀이 협주곡인 ‘마당’을 초연했다. 서양 음악, 서양 악기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모습에 관객은 열띤 반응을 보였고, ‘마당’은 이후 1995년 UN 창립 50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연주되며 사물놀이와 서양의 관현악단이 함께하는 대표 연주곡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전통 타악을 기반으로 한 창작곡의 가능성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됐다. 강준일은 같은 해 9월, 두 번째 협주곡 ‘푸리’를 발표하며 사물놀이의 음악세계를 확장했다. 이후, 이준호·박범훈 등의 작곡가들이 사물놀이를 위한 작품을 연달아 선보이며 레퍼토리 발전에 기여했다.

Do you know ‘Samulnorian’?

사물놀이의 울림은 삽시간에 지구촌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 사물놀이 캠프가 세워졌고, 워크숍이 진행됐다. 세계가 한국의 장단에 넋을 잃고 몸을 실었다. 대영백과사전에는 ‘사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사물노리안(Samulnorian)’이 등록됐다.

 


1984 | 뇌공을 잃고, 울음을 삼키다

오랜 시간 서로의 꿈을 키워주며 가족보다 가까이 지낸 4인의 호흡은 김용배의 돌연 탈퇴로 위기를 맞는다. 그가 국립국악원 사물놀이패의 수석 상쇠로 적을 옮긴 것이다. 미국과 유럽, 일본 등지에서 잇따른 성공 가도를 달리며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던 사물놀이는 일순 휘청거렸다. 천둥의 울림을 잃은 자리에 슬픔이 가득 찼다. 같은 해 9월, 그의 빈자리를 대신해 전주 출신으로 호남 우도농악을 배운 강민석이 합류했다.(이전까진 남기문이 함께했다.) 재정비의 시간을 가진 사물놀이는 장단을 다듬고, 화합을 다지며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1985

1985년에만 70회 이상의 해외 무대를 소화한 사물놀이는 영국순회 공연에서 처음으로 공연과 전통문화에 대한 강의를 겸하는 ‘렉처 콘서트’를 시도했다. BBC에선 사물놀이의 활약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방영하기도 했다. 사물놀이 교육에 대한 김덕수의 열의가 뜨겁게 피어올랐다. 세계인을 위한 교육학 연구와 이론 확립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1986 | 피날레를 장식한다는 것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EXPO 86의 월드 드럼 페스티벌에서 사물놀이는 단연 돋보이는 팀이었다. 전 세계에서 모인 타악기 연주자들의 높은 관심 속에 피날레 무대를 장식했다. 사물놀이는 창단 10년을 맞기도 전에 이미 세계 타악계를 주도하며 앞서 나가고 있었다.

 


1987 | 격랑의 시대 속 민중을 위로하다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는 게 광대고, 예술가는 행위로 보여줘야 한다.” 박종철·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이 거세졌다. 사물놀이는 암울한 시대와 맨몸으로 맞서던 이들을 위해 거리로 나가 사물을 두드렸다. 그리고 8월, 춤꾼 이애주와 함께 시국을 비판하는 공연이자 이한열 열사의 추모 굿을 겸하는 ‘바람맞이’를 선보였다. 이애주는 소복을 입고 사물놀이 반주에 맞춰 물고문과 불고문을 표현했다. 신명으로 한을 풀고자 한 시대적 요구와 외세에 대한 반발로 대두된 전통문화의 보존, 여기에 현대화가 더해지면서 사물놀이는 비로소 시대와 세대를 아우르는 자랑스러운 유산으로 다시 거듭났다.

푸쉬닉과 김덕수

 

 

 

 

 

 

 

 

 

 

 

 

사물로 붉은 태양을 삼키다

메가 드럼 프로젝트는 사물놀이가 세계음악시장의 흐름을 파악하고, 자력으로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며 적극적으로 네트워킹에 참여할 수 있는 성장의 기반이 되었다. 이때 만난 오스트리아의 색소포니스트 볼프강 푸쉬닉과 그를 중심으로 모인 재즈밴드 레드선(RedSun)은 국악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사물놀이와 스스럼없이 어우러졌다. 그리고 유니버설 레코드를 통해 첫 협업의 결과물인 음반 ‘레드선 사물놀이’를 발매했다. 국악의 월드뮤직화가 본격화된 것이다. 그들의 진한 인연은 30년째 계속되고 있다.

 


1988 | 제우스에게 음악을 선물하다

잔치와 난장에 연희가 빠지지 않았듯, 세계의 마당에서 펼쳐진 큰 잔치에 사물놀이가 빠질 수 없었다. 사물놀이는 외교사절단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성화를 채화해오는 임무가 주어졌고, 사물놀이는 그리스의 성녀들과 올림피아에서 함께 지냈다. “대성녀에게 큰 행사를 치르기 전에 먼저 제를 올리는 것이 우리의 풍습이라 했더니, 그들도 그렇다더군요. 올림피아 한가운데 고사 상을 차리고 하늘에 고했습니다. 성화가 잘 되어 올림픽이 잘 시작되게 해달라고.” 채화가 이뤄지는 구역은 금남의 구역이라 카메라 감독도 멀리서 찍어야 했는데, 이들은 동양의 신을 받드는 사람들이라 하여 오방색 의상에 상모를 돌리며 성녀들을 따라 입장했다. 현지 언론은 ‘동양의 신이 제우스에게 음악을 선물했다’며 현장을 기록했다. 사물놀이는 이후, 올림픽과 월드컵을 비롯한 전 세계 각지에서 펼쳐진 수많은 축제 현장에서 울려 퍼졌다. 지구촌 잔치의 산 역사랄까. (당시 언론이 행사 진행과 경기에만 집중해, 채화 현장 사진은 남아 있지 않다)

 


1989 | 세계사물놀이겨루기 한마당 개최

사물놀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전국에 사물놀이 동호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공연예술의 한 장르에서 범국민적인 생활문화로 자리 잡게 되었고, 이러한 흐름에 힘입어 ‘사물놀이겨루기 한마당’이 개최됐다. 1999년엔 참가 범위를 국외로 넓히며 ‘세계사물놀이겨루기 한마당’으로 거듭났다. 2015년 대회를 마지막으로 잠시 진행이 중단됐으나, 올해 세계사물놀이협회 발족과 동시에 새로운 동력을 발판 삼아 다시 개최될 예정이다. “차이콥스키나 쇼팽 콩쿠르처럼 세계적인 경연의 장으로 키우고 싶다. 최고의 전문 예인을 선발해 자격을 부여하고, 인정받을 수 있게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을 마련하고자 한다.”

 


1990 | 남북‘신명’회담


사물놀이는 윤이상이 주관한 범민족음악회 참가를 위해 판문점을 지나 평양 땅을 밟았다. 오랜 분단 상황으로 인한 간극이 존재했지만, 신명을 매개로 맞닿은 뜨거운 두드림만은 같은 것이었다. “개성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역으로 가는데, 거치는 역마다 사람들이 꽹과리·징·장구·북을 치고 있었다. 평양역에서는 물론 김일성 경기장까지 가는 길 내내 말이다. 우리가 그걸 보고만 있을 수 있나. 그들 속으로 들어가 장구와 꽹과리를 받아들고 태평소를 불며 길놀이를 했다. 신명으로 완전히 하나가 된 거다. 우리의 신명이 북녘의 땅 위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자, 비로소 남과 북이 한민족이라는 걸 실감했다.”

 

젊음의 거리에 난장을 열다

신촌역 인근에 극장과 연습실을 겸한 ‘라이브하우스 난장’을 열었다. 사물놀이의 성공에 힘입어 ‘제2의 사물놀이’를 꿈꾸는 수많은 젊은이가 모여들었고, 사물놀이는 차츰 예술단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공연기획과 교육, 연구 분야로 손을 뻗으며 예인 집단에서 문화 단체로 거듭났고, 스튜디오를 기반으로 다양한 실험과 시도를 반복하며 전통과 사물놀이의 다채로운 변화를 꾀했다.

대중을 위한 언어로 거듭나다

사물놀이 대중화를 위한 교육 연구가 성과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구전으로 전해지던 가락과 장단의 특성, 연주법을 대중을 위해 정간보와 서적, 음반, 비디오로 총정리했다. 드디어, 첫 결실인 ‘사물놀이 교칙본 1- 장고의 기본’이 발간됐다.

 


1993 | 한울림으로 거듭나다

창단 멤버였던 최종실(중앙대 교수 및 현 서울예술단 예술감독)과 이광수(민족음악원 설립)가 사물놀이를 벗어나 각자의 길을 찾아 나섰다. 김덕수는 강민석과 함께 사물놀이의 정통성을 잇는 한울림 예술단을 창단해 사단법인화했다. 전문 인력을 바탕으로 해외 마케팅, 교육 사업, 국제 네트워크 구축과 악기 보급 및 개량, 콘텐츠 개발 사업 등을 활발히 해오고 있다.

 


1994 | 폐교에 소리로 생명을 불어넣다


부여에 위치한 폐교를 사물놀이 전수를 위한 상시 교육원으로 탈바꿈시켰다. “세상을 다니다 보면 사물놀이를 배우고자 하는 이가 정말 많은데 제대로 가르칠 만한 곳이 없었다. 가진 게 적어 학교를 세울 순 없고, 전부 직접 도끼질하고 망치질해가며 꾸려나갔다. 그곳에서 배운 학생들이 지금은 훌륭한 스승으로 세계 각지에서 활동 중이다.”

 


1995 | ‘사물놀이의 날’을 선포하다


김덕수·이광수·강민석·최종실은 1979년 ‘공간사랑’에서 ‘사물놀이’란 이름으로 처음 무대에 올랐던 9월 29일을 ‘사물놀이의 날’로 선포했다.

 


2008 | 국보 1호의 상처를 비나리로 씻어주다


김덕수·이광수·최종실·남기문은 방화로 허무하게 불타버린 숭례문을 기리고 국민의 아픔을 위로하기 위해 추모제를 가졌다. 그리고 한 달 뒤, 오랜만에 다 함께 무대에 올라 사물놀이 탄생 30주년을 자축했다.

 


2010 | 디지털+아날로그


2006년 대전 엑스포에서 ‘로봇 사물놀이’가 화제를 모은 뒤, 사물놀이는 과학과의 협업도 마다하지 않으며 국내 최초로 4D 기술을 문화콘텐츠에 접목한 ‘죽은 나무 꽃 피우기-디지로그 사물놀이’를 선보였다. 이어령이 쓴 대본을 바탕으로 김덕수의 사물놀이, 국수호의 춤, 안숙선의 소리가 디지털 기술로 구현된 가상 현실과 어우러졌다. 악기의 소리와 강도, 연주자의 움직임에 따라 센서가 반응하며 설치된 화면을 통해 시시각각 다른 영상을 만들어 냈다. 피날레에 이르러선 죽은 나무에 꽃이 만발하는 장관을 연출했다. 사물놀이가 품고 있는 전통의 미래상, 미래형 전통상을 엿볼 수 있었다.

 


2014 | 일렉트릭 VS 사물놀이


전자 음악과 사물놀이가 만나 충돌의 에너지 속에서 전혀 색다른 소리를 만들어냈다. 김덕수(장구), 문상준(꽹과리), 이준형(북), 송동운(징), 정준석(기타), 이안나(건반), 김재호(베이스)이 한 팀으로 뭉쳐 젊음과 생명력 넘치는 홍대 거리, KT&G 상상마당 무대에 올랐다. 공연은 그야말로 파격, 그 자체였다. “우리가 전통을 부순다고? 아니, 우리는 지금 전통을 만들어 나가는 중이다.”

 


2017 | 사물놀이 전용 극장 개관


한울림 예술단이 전통과 문화의 중심지인 종로, 인사동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9월 1일, 사물놀이 전용극장인 인사아트홀이 개관하면서 매주 4회 상설 공연으로 사물놀이를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글 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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