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한 무덤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꿈을 꾸었네. 너의 나무와 푸른 바람, 너의 향기와 새의 노래를. 이제 그대는 화려한 장식 속에서 빛을 받으며 마치 기적처럼 내 앞에 있네. 너는 나를 알아보고 다정하게 유혹하니, 너의 행복한 모습에 내 온몸이 떨리네.’
독일의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남긴 마지막 작품 ‘네 개의 마지막 노래’ 중 ‘봄’.
삶의 마지막 순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가장 아름다운 악기인 인간의 목소리로 찬란하고 우아한 봄을 그려냈다. 소프라노 황수미의 계절도 이 찬란한 봄에 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자에서 평창동계올림픽의 디바로, 많은 이들이 주목하는 그녀가 올봄 국내 무대를 수놓는다.
제1막 | 황수미, 평창동계올림픽의 디바로 떠오르다
“올림픽이라는 국가적으로 큰 행사에서, 내가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너무나 영광스러웠어요.”
2월 9일, 전 세계의 시선이 대한민국 평창을 향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 올림픽기 계양과 함께 ‘올림픽 찬가’가 울려 퍼질 순서가 되자 3만 5천 석의 올림픽 스타디움을 가득 채운 관중들이 일제히 일어섰고, 그 시선은 소프라노 황수미로 향했다. 한국 전통의 아름다움을 담뿍 머금은 한복을 입고 올림픽 스타디움에 등장한 그녀. 수많은 시선 속에서 기품 있고 당당한 표정으로 ‘올림픽 찬가’를 노래한 황수미는 3분여의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이들을 매료시키며 ‘평창올림픽의 디바’로 떠올랐다.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을 보다가 반가운 얼굴이 등장해 깜짝 놀랐다. 개막식에서 ‘올림픽 찬가’를 부르며 이번 평창올림픽의 디바로 떠올랐는데.
개막식 공연에 대한 요청은 12월쯤 받았다. IOC에서 먼저 개막식 때 노래를 부를 가수 후보로 올려도 되겠냐는 요청이 왔고, 얼마 후에 최종 결정 연락을 받았다. 전공자들 외에는 대중적으로 큰 인지도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연락을 받고 굉장히 놀랐다. 우리나라에서 큰 올림픽이 열린다는 것도 자랑스러운 일인데, 그 무대에서 내가 노래를 부른다는 것에 너무 영광스러웠고, ‘내게 이런 기회가 다시 올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스어로 부른 ‘올림픽 찬가’가 많은 호평을 받았다. 립싱크로 부르는 것이 어색하지는 않았나?
립싱크가 라이브보다 더 어려웠다. 하지만 현장에서 어떤 돌발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에 개·폐막식 모두 녹음으로 진행한다고 하더라. 사전 녹음과 의상 피팅을 위해 1월 중순에 이틀 정도 시간을 내어 잠깐 한국을 방문했다. 정확한 동선과 러닝타임을 확인해 보기 위해 의상과 헤어, 메이크업을 다 갖춘 총 리허설을 2번 진행했는데, 첫 리허설이 끝나고 녹화 영상을 보니 싱크가 너무 안 맞아 보였다. 스타디움이 워낙 크다 보니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와 그 울림에 반응하는 것에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두 번째 리허설부터는 진짜 소리를 내서 불렀는데, 그게 오히려 더 잘 맞았다. 개막식 때에도 역시 소리 내어 노래했다.
이번 무대는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를 정도로 큰 관심을 모았다. 황수미를 대중에게 더 많이 알리는 계기로 작용했을 것 같은데.
무대 당일에는 너무 떨리고 정신없었고, 개막식 바로 다음 날에 독일로 돌아왔기 때문에 무대에 대한 반응을 많이 체감하진 못했다. 하지만 독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승무원분들이 알아봐 주셨고, 독일에 돌아와서도 극장을 통해 몇몇 신문사와 방송사 인터뷰를 진행하며 역시 방송의 힘이 크다는 것을 느꼈다. 국내와 해외에서 이메일을 보내주시기도 했다. 그중에는 클래식 음악도 전혀 모르고 성악에 관심도 없었는데, 내 무대를 보고 많은 매력을 느꼈다며, 앞으로 성악에 더 관심을 가지고 봐야겠다는 내용의 편지도 있었다. 내게도 영광스러운 무대였지만, 많은 분에게 성악과 클래식 음악의 매력을 전할 수 있었다는 생각에 참 감사하다.
제2막 | 독일, 또 다른 시작을 안기다
평창동계올림픽에서 황수미의 이름이 소개되자 그녀를 잘 몰랐던 몇몇 이들은 조수미의 이름이 잘못 나온 것이 아니냐는 물음을 던지기도 했다. 한국은 홍혜경(1984년 미국 메트오페라 데뷔)과, 조수미(1986년 이탈리아 베르디 극장 데뷔), 그리고 신영옥(1990년 미국 메트오페라 데뷔)이라는 걸출한 소프라노 3인을 세계무대에 배출했고, 이후 많은 성악도들이 제2의 홍혜경, 조수미, 신영옥을 꿈꾸며 그 발자취를 따라 걸었지만, 아직은 이들을 대신할 만큼 대중에게 뚜렷하게 각인된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다. 음악성과 대중적인 인기를 모두 겸비하기란 쉽지 않은 일. 계속해서 뛰어난 성악가들이 세계무대에 도전하는 가운데, 음악계는 그다음을 이을 주인공으로 황수미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다.
사실 국내외 클래식 음악계에서 황수미는 이미 주목받는 존재이다. 서울대에서 윤현주 교수를 사사한 그녀는 2010년 독일 유학길에 올라 뮌헨 음대에서 오페라와 리트, 오라토리오 최고연주자과정을 거쳤다. 성악 전문 기획사 로젠블랫 시리즈로 영국 위그모어홀에서 데뷔하는 등, 2014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 이후 차세대를 이끌 실력파 리릭 소프라노로 행보를 이어가며 나날이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독일 본 오페라극장과 계약하며 유일한 동양인 솔리스트로 활동하게 된 것은 이미 콩쿠르에서 우승하기 이전의 일이었다. 아직 학생 신분이었던 동양인 소프라노가 오직 실력만으로 극장에 믿음을 준 것이다.
2014년 하반기부터 독일 본 오페라극장 솔리스트로 활동했다. 여러 극장 중에서도 이곳에서 활동하게 된 이유가 있는가?
유럽의 큰 극장들은 오펀스튜디오(Opernstudio, 독일 오페라 극장에서 운영하는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를 운영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의 장점이라면 큰 극장에서 대가들의 음악을 직접 들으면서 배울 수 있고, 커버나 조역을 통해 같이 무대에 설 기회가 생기기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의 활동은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또다시 다른 극장의 솔리스트 자리를 알아보고 오디션을 봐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오펀스튜디오 오디션은 지원자가 직접 서류를 보내서 지원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당시 이런 프로그램에 몇 군데 지원했고, 합격한 곳도 있었다. 반면, 극장 솔리스트 오디션은 개인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어렵다. 대부분 에이전시를 통해서만 오디션을 볼 수 있는데, 본 오페라극장 솔리스트가 내 첫 번째 오디션이었다. 본 오페라극장은 본(Bonn)이 서독의 수도였던 시기에 세계적인 가수들이 찾았던 곳이다. 여러 가지 길을 두고 선생님과 많이 상의했고, 결국 오펀스튜디오보다 본 오페라극장의 솔리스트를 선택하게 되었다.
오페라단 입단과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 등, 좋은 일이 연달아 일어난 해였다.
살다보면 그런 때가 있는 것 같다. 2014년은 1월부터 좋은 일이 많았다. 멘델스존 콩쿠르에서도 2위를 했고, 다른 오디션들도 결과가 좋았다. 극장 솔리스트 오디션도 합격해 계약했고,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도 하고. 본 오페라극장 활동을 시작하면서는 다양한 레퍼토리와 경험을 많이 쌓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 시즌에는 ‘피가로의 결혼’ 수잔나, ‘카르멘’ 미카엘라, ‘잔니 스키키’ 라우레타를 동시에 소화하고 있다. 본 오페라극장에서는 그간 어떤 작품과 배역들을 맡았나? 극장에서 맡았던 배역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역할이 있나?
본 오페라극장에서 일한 지 올해로 4년째이다. 그동안 모차르트 ‘마술피리’의 파미나, ‘돈 조반니’의 돈나 안나, ‘피가로의 결혼’의 수잔나, 베토벤 ‘피델리오’의 마르첼리나, 비제 ‘카르멘’의 미카엘라, 푸치니 ‘투란도트’의 류, ‘라보엠’의 미미 등 좋은 레퍼토리들을 많이 배우고 공연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역은 ‘마술피리’의 파미나이다. 첫 오페라 작품이기도 하고, 갓 취직한 극장에서 독일 사람들은 외워서도 부르는 ‘마술피리’를 독일 관객들 앞에서 독일어로 대사와 노래로 완벽하게 소화해야 한다는 압박에 정말 스트레스가 컸다. 단기간에 연습하고 올려야 하는 상황이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리허설을 하다 보니 몸도 목도 너무 피곤한데, 마음처럼 잘 안 되어 너무 속상하고, 또 동료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어 리허설 중에 울어버렸다. 지휘자를 비롯해 모든 동료들이 건네는 위로의 말에 더 눈물이 났다. 지금 생각해 보니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극장 스케줄을 보니 다양한 작품이 몇 개월 동안 동시에 공연되더라. 한 작품씩 준비해 올리는 한국 오페라 공연과는 많이 다른 시스템인 것 같다.
이곳에서는 한 시즌에 40~50개의 공연을 하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번 시즌에도 ‘피가로의 결혼’과 ‘카르멘’, 그리고 ‘잔니 스키키’가 시즌이 지속되는 몇 개월에 걸쳐 각각 15~16번 정도로 배분되어 있다. 관객이나 오페라 가수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본 오페라극장의 ‘마술피리’는 1996년에 초연되어 20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는 프로덕션으로, 이미 100회 이상 공연되었다. 캐스팅은 달라지지만, 같은 연출과 무대, 의상으로 공연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이렇게 잘 만들어진 연출 작품을 수개월에 걸쳐 여러 번 공연하다 보면, 공연마다 아쉬운 점들도 보완해나갈 수 있고, 작품과 역할을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 같다. 한국은 아직 전용 오페라 극장이나 합창단, 오케스트라 등 오페라를 위한 전문적인 시스템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런 방식은 불가능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 공들여 만든 의상이나 무대가 대여섯 번의 무대를 끝으로 막을 내리는 것이 굉장히 안타깝다.
4년 차인 이번 시즌을 끝으로 본 오페라극장에서 독립하기로 결정했다.
다음 시즌에 잡힌 극장 이외의 스케줄이 극장 공연들과 조정을 하기에 많은 무리가 있어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피가로의 결혼’을 마지막으로 극장과는 7월 말까지 함께할 예정이다. 막상 안전한 둥지를 떠나려니 걱정도 되지만, 더 성장하기 위한 출발점이라는 생각에 기대하는 마음이 더 크다. 지난 4년간 무대에서 배운 많은 레퍼토리는 물론, 다른 여러 장르를 더 공부해 보다 넓은 무대에서 보여주고 싶다.
2년 전의 인터뷰에서 “서양인들과 벌이는 일종의 싸움터에서 무조건 ‘예스’로 답하며 ‘열심히 하자’를 신조로 삼았었지만 이제는 좀 바뀌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었다. 이후 자신의 행동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노(No)’라고 말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예전보다는 소신 있고 정중하게 거절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배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학생 시절 오디션을 보러 다닐 때, 동양인이어서 그런지 오페라 ‘나비부인’에 대한 제안이 많이 들어왔다. 소프라노로서 그 역할을 굉장히 잘 소화한다면, 그 한 역할만으로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더 빨리 커리어를 쌓을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무겁고 위험 부담이 큰 역할이라는 것을 안다면 때를 기다리며 거절할 수도 있어야 한다. 또한, 아무리 내가 하고 싶은 역할이 있더라도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제안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눈앞에 보이는 욕심에 무리한 결정을 하고 싶지는 않다. 조금 더 멀리, 길게 내다보고 현재의 ‘나’를 객관적으로 관찰하며 천천히 성장하고 싶다.
제3막 | 나의 음악, 나의 소리를 찾아서
처음부터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으며 자신의 길에 확신을 가지고 걸어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황수미 역시 처음부터 주목받는 음악가는 아니었다. 서울예고를 거쳐 서울대에 들어간 후에도 그녀는 자신의 길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대학 4년 동안 그 고민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잠시 눈을 돌려 다른 길을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한순간의 깨달음은 황수미의 음악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대학교 4년 동안 남들과 비교만 하고, 노력도 없이 슬럼프라고 말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오히려 음악에 대한 고민이 확신으로 바뀌었어요. 대학원에 진학해서는 정말 후회 없이 열심히 했고, 그러다 보니 조금씩 노래에 대한 주관도 생기고 유학도 결심하게 되었죠.”
이제 서른 중반의 나이를 향해가며 더욱 성숙한 음악가로 피어나고 있는 그녀. 황수미의 목소리에는 부드러움과 강함이 공존해있다.
벌써 3년도 더 지난 이야기지만. 아직도 황수미를 기억할 때,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자’라는 수식어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활동하는 데 있어 콩쿠르의 영향이 많이 남아있다고 보는가?
벌써 시간이 그렇게나 지났다. 한국 활동에서는 여전히 내 이름 앞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자’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부담스러운 수식어이긴 하지만 내가 성악가로서 경력을 쌓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콩쿠르임은 분명하다. 그 명성에 맞는 음악을 기대하실 테니 부담이 될 때도 있지만, 또 그런 긴장감이 나를 발전시키는 힘이라 생각한다.
콩쿠르를 통해 이어진 헬무트 도이치와의 인연이 여러 무대로 이어지고 있다. 올가을에는 그와 함께 첫 음반 녹음도 진행할 예정인데.
도이치 선생님과의 만남은 하늘이 주신 귀한 선물인 것 같다. 일흔이 넘으셨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무거운 여행 가방을 들고 전 세계로 연주 여행을 다니는 모습에서 여전히 에너지가 느껴진다. 선생님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연습을 하고, 시간 약속도 무서울 만큼 철저하다. 선생님이 보기에 나는 한없이 어린 성악가지만, 파트너로서 내 음악에 귀 기울여 주시는 점이 큰 힘이 된다. 또 음악의 인생 선배로서 애정 어린 조언을 해주실 때 감사하다. 선생님과 함께할 이번 음반에는 지난여름 한국에서 선보였던 프로그램과 더불어 피아노 버전의 슈트라우스 ‘네 개의 마지막 노래’를 담을 예정이다. 앨범은 내년 초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에서 발매된다.
성악가들은 보통 서른 중반을 넘어서며 목소리에 완숙기를 거친다고 하는데, 본인의 목소리는 어느 단계에 있다고 생각하나?
서른 중반을 넘기려면 아직 몇 년이 남았다.(웃음) 물론 이제는 혼자 연습을 할 때도 어떤 소리가 좋은 소리인지에 대한 구분은 가능하게 된 것 같다. 하지만 나만의 소리에 대한 확신이 섰다고 말하는 건 교만인 것 같다. 성대는 굉장히 민감한 악기다. 한 번 잃은 소리는 되찾을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조심히 다뤄야 한다. 예전에 선생님들께서 말씀하시길 여자들은 아이 낳고 나면 소리가 더 좋게 변한다고 했는데… 아마 내가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면 지금보다 더 따뜻한 소리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소프라노는 목소리의 색깔이나 음역에 따라 콜로라투라, 리릭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나뉜다. 본인의 음역대인 ‘리릭 소프라노’ 배역 중 기억에 남는 역할은 무엇인가?
고음과 기교가 뛰어난 콜로라투라에 비해 리릭 소프라노는 사실 가장 흔한 음역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 기교적인 곡보다는 길고 서정적인 프레이징을 부른다고 할 수 있는 리릭 소프라노는 다시 리릭 레제로, 리릭 콜로라투라, 리릭 스핀토 등으로 세분할 수 있는데, 나는 이 모두를 통합하는 리릭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본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했던 ‘라 보엠’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굉장히 현실적인 연출로, 아름답게 그려지는 기존의 이미지를 깨뜨리는 시도가 많았다. 작품은 늙은 로돌포가 아픈 미미를 두고 도망쳤던 과거를 회상하며 슬퍼하는 모습으로 시작하고, 4막에선 미미가 병으로 인해 머리카락이 없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좋은 평을 받은 연출은 아니었지만, 회차를 거듭하면서 점점 그 사실적인 미미의 모습에 많은 이들이 공감했고, 나 역시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무대를 거듭하며 오히려 더 작품에 몰입할 수 있었다.
소프라노의 상당수가 리릭이라면, 그만큼 자신만의 경쟁력을 쌓아야 할 것 같은데.
동유럽권의 리릭 소프라노들이 내는 소리는 확실히 다르게 느껴진다. 뼈에서 나는 소리 같달까. 정말 통이 큰 소리가 난다. 그들과의 차별점이라면 내 소리는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온다는 점이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그리고 다른 가수들이 함께 앙상블을 이뤄 노래하는 장면에서도 내 소리는 다 들린다고 하더라. 소리의 볼륨을 떠나서 아니라, 소프라노지만 테너처럼 진하고 강한 소리가 담겨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노래 안에서 다양한 언어를 구사해야 하는 만큼, 성악가에게 정확한 발음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많은 레퍼토리를 통해 보여준 독일어와 러시아어, 그리고 이번 올림픽에서 선보인 그리스어 등 정확한 발음에서 오는 전달력이 놀랍다.
성악을 아는 원어민에게 정확한 지도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녹음을 해서 들어보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 ‘올림픽 찬가’를 원어인 그리스어로 불러달라는 요청을 받고 처음 그리스어를 접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극장에서 함께 일하는 그리스 출신의 바리톤 동료가 이 곡을 잘 알고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가사 전달력과 더불어 공연에 몰입하게 만드는 뛰어난 표현력은 소프라노 황수미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인 것 같다. 작품마다 정서를 전달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나?
성악은 다른 기악 연주와 달리 가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오히려 곡을 표현하는데 악기보다는 조금 수월하지 않을까 싶다. 특별한 연습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부르는 아리아, 레치타티보, 가곡 등 모든 곡의 가사를 손으로 써본다. 그러면 눈으로 보고 소리 내어 읽을 때보다 그 음악의 이미지가 더욱 선명하게 그려진다.
억지로 만들어진 감성은 보는 사람도 불편할 수 있고, 오래 보기도 힘들다. 표현을 하는 데 있어 특별한 연상을 하는 것보다는 노래의 내용이나 그 안의 단어를 얼마나 잘 아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다. 그래서 가사와 역할을 이해하는데 시간을 오래 투자한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라고 노래한다.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인지, 아니면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인지, ‘아버지’가 중요한지 아니면 ‘가방’이 중요한지, 이 가사에서 무엇이 주어이고, 또 무엇이 중요한 단어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굉장히 기본적이고 중요한 부분이다. 성악을 공부하는 많은 학생이 소리만 내는 것이 연습이라고 생각하는데(물론 나도 그랬다), 그 외에 악보를 정독하고 가사와 언어에 집중하는 시간도 매우 중요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제4막 | 다채롭게 꽃피울 그녀의 봄
“황수미는 노래에 모든 감정을 담아내는 대가 못지않은 표현력을 가졌다. 원하는 음악이 분명하며 모든 노래 가사를 정확하게 전달한다.”
2015년과 2017년, 세계적인 가곡 반주자 헬무트 도이치와 황수미가 함께한 두 차례의 내한 무대는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했다.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슈베르트와 라흐마니노프, 베르크를 비롯해 브람스와 리스트, 슈트라우스, 브리튼 등 낭만과 현대를 아우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서정적이고 품위있었으며,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2016년 처음 내한한 앙상블 마테우스와의 협연 무대에서도 그녀의 뛰어난 표현력과 전달력은 빛났다.
오페라와 가곡, 오라토리오 등 황수미가 지닌 폭넓은 레퍼토리는 그녀를 더욱 넓고 다양한 무대로 이끌고 있다. 올해 7월, 네덜란드 콘세르트허바우에서 마르쿠스 슈텐츠 지휘로 네덜란드 라디오 필하모닉과 모차르트 ‘레퀴엠’을 연주하고, 10월에는 독일 비스바덴 오페라하우스에서 모차르트 ‘돈조반니’를 올린다. 앙상블 마테우스와 헨델 ‘리날도’로 유럽 투어를 하는 등 바쁜 해외 일정을 앞두고 있다. 이에 앞서 오는 3월과 4월에는 통영과 서울을 찾아 다양한 무대로 국내 팬들을 만난다.
3월과 4월, 통영국제음악제와 서울시향과 함께할 무대를 보니 흥미로운 레퍼토리가 많다. 크리스티안 요스트의 ‘시인의 사랑’부터 진은숙의 ‘퍼즐&게임 모음곡’ 등 새로운 작품들을 한국 초연으로 선보일 예정인데.
이번에 통영국제음악제와 서울시향 공연에서 선보일 레퍼토리들은 주최측에서 제안한 것들이다. 이 세상엔 연주하고 싶은 좋은 음악이 너무 많다. 늘 하던 레퍼토리로만 연주할 수도 없을 뿐더러, 연주자로서 새로운 레퍼토리를 공부하고 연주할 기회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통영국제음악제에서의 첫 공연에서는 보훔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R. 슈트라우스의 ‘네 개의 마지막 노래’를 선보인다.
이번 음악제에 흔쾌히 참여하게 되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R. 슈트라우스의 ‘네 개의 마지막 노래’다. 리사이틀 프로그램에 항상 넣을 정도로 그의 음악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이 작품은 내 ‘꿈의 노래’ 중 하나이다. 이중 마지막 네 번째 곡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파이널에서 부르기도 했었다. 언젠가는 이 작품의 전곡을 오케스트라와 함께 부르고 싶었는데, 이번에 그 기회가 찾아왔다.
다음으로 선보일 크리스티안 요스트의 ‘시인의 사랑’(2017)은 슈만의 ‘시인의 사랑’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슈만의 원곡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또 어떤 해석을 가지고 준비하는지 궁금하다.
요스트의 ‘시인의 사랑’은 작년에 테너 페테르 로달이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에서 초연한 작품이다. 이번에는 작곡가가 특별히 소프라노의 소리를 원했다고 들었다. 기본적인 멜로디와 가사는 슈만의 원곡과 같지만, 원곡의 피아노 반주가 아닌 오케스트라 반주로 진행된다. 첫 곡부터 마지막 곡까지 앙상블의 연주가 계속 이어지고, 부분 부분 가사를 반복하거나 음정을 한 옥타브 올려 부르는 등 현대음악의 다양한 표현기법들이 들어있다. 마림바와 관악기의 연주가 많이 나오는데, 특히 마림바의 리드미컬한 반주가 슈만의 서정적인 느낌과는 상반되는 것 같다. 피아노와 성악으로만 이루어지는 연주가 아니라서 아주 섬세한 음악적 표현은 어려울 것 같아 아쉽지만, 똑같은 듯 다른 분위기의 ‘시인의 사랑’을 기대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슈만의 ‘시인의 사랑’은 남자의 시각으로 쓰인 연가곡으로 남자 성악가들의 주된 레퍼토리였지만, 브리기테 파스벤더나 바바라 보니 등 여자 성악가들의 시도도 찾아볼 수 있다. 여성의 목소리로 전하는 ‘시인의 사랑’은 어떤 다른 매력을 보여줄 수 있을까?
질문에서처럼 사실 ‘시인의 사랑’은 기본적으로 남자가 부르는 노래로, 특히 이 곡의 교과서라고 볼 수 있는 프리츠 분덜리히나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의 ‘시인의 사랑’이 굉장히 귀에 익숙하고 편안할 것이다. 처음 이 곡을 제안받고 도이치 선생님께 조언을 구했는데, 선생님도 나처럼 고개를 갸우뚱하시며 여자가 부르려면 가사 전체를 바꿔야 한다고 하셨다. 하지만 검색을 하다 보니 바바라 보니와 파스벤더의 녹음을 찾을 수 있었고, 심지어 크리스티아네 셰퍼는 노래와 함께 동성애의 느낌을 담은 뮤직비디오까지 선보인 것을 볼 수 있었다. 시대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시도일지도 모르겠다. 이 무대에서만큼은 남녀를 구분 짓기보다는, 연주자를 음악으로 시를 들려주는 전달자라 생각하며 감상해주길 바란다.
4월 7일에는 크리스토프 에셴바흐/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와 함께 진은숙의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중 ‘퍼즐&게임 모음곡’(2017)을 선보이는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뮌헨 공연을 영상으로 봤다. 작품의 분위기가 원작의 스토리를 담아내며 독특한 느낌을 주면서도, 선율이 너무 현대적이지 않아서 굉장히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악보를 받아 연습을 해보니 더 재미있는 작품이라고 느껴졌다. 처음에는 어렵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지만, 몇 번 연습을 하다 보니 더 잘 연주하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다른 이들에게 기준점으로 작용할 수 있는 초연 무대에 대한 부담감은 없나?
그런 부담은 가져보지 않았다. 흥미로운 작업이라는 아주 단순한 입장으로 임했는데, 그 말을 듣고 보니 갑자기 부담이 생기는 것 같다.(웃음)
4월 27일과 28일에는 서울시향과 알반 베르크의 ‘일곱 개의 초기가곡’을 협연한다. 이 작품은 이미 위그모어 홀에서 헬무트 도이치와 함께 선보였던 작품이기도 한데.
피아노에 맞춰 노래해보긴 했지만,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피아노와 함께여서 가능했던 섬세한 딕션이나 표현들에 있어 어려움도 있을 것 같지만, 길고 풍성하게 받쳐주는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노래를 더 흘러가게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번 일정 이후에도 국내외에서 많은 공연 스케줄을 앞두고 있다. 앞으로 보여줄 황수미의 음악이 궁금하다.
내가 생각하는 음악가란, 자신의 음악으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만지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만큼 영적이기도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를 통해 신비로운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테크닉 연습을 하고 소리를 내는 물리적인 것들 외에도 많은 감정적인 노동도 따르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내면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다. 목소리는 ‘하늘로부터 선물 받은 악기’라고 생각한다. 선물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한 마음으로 오랫동안 기쁘게 쓰일 수 있기를 바란다.
글 이미라 기자 사진 심규태(HARU)
스티븐 슬론/보훔 심포니 오케스트라
3월 31일 오후 2시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
R. 슈트라우스 ‘네 개의 마지막 노래’ 외
마티네 콘서트-새로 쓴 ‘시인의 사랑’
4월 1일 오전 11시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
크리스티안 요스트 ‘시인의 사랑’
크리스토프 에셴바흐/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
4월 7일 오후 3시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
진은숙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중 ‘퍼즐&게임 모음곡’ 외
마르쿠스 슈텐츠/서울시향
4월 27·28일 롯데콘서트홀
알반 베르크 ‘일곱 개의 초기 가곡’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