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을 재해석하는 발랄한 상상력
고전이라고 하면 무겁다는 생각부터 든다. 누가 고전이라고 명명했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교양을 갖춘 사람이라면, 혹은 교양을 갖추려면 읽어야 한다는 강박이 무거운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강박을 지우고 인류의 지혜가 담겨 있는 존재라는 인식의 전환을 하고 접근하면 고전만큼 풍성한 생각을 들려주는 것이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전이 대접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연극에서도 고전은 마르지 않는 창작의 샘이다. 산울림소극장에서 해마다 기획하는 ‘산울림고전극장’이 대표적으로, 올해는 ‘셰익스피어를 만나다’라는 제목으로 다섯 편의 작품이 공연되고 있다. 거기에 배우 출신의 이철희 작가는 ‘햄릿’을 충청도 버전으로 번안했던 ‘조치원 해문이’에 이어 ‘에쿠우스’를 말 대신 닭으로 바꾸면서 충청도 버전의 ‘닭쿠우스’로 재구성했다.
이들 작품들은 원작에 대한 애정과 존중을 전제하면서도 그것을 재구성해내는 양상이 훨씬 발랄해졌다. 고전의 무게와 가치에 집중하기보다는 고전에 빗댄 현실의 이야기를 결코 무겁지 않게 전하고자 하는 연극인들의 태도가 반영된 부분이다.
‘5필리어’, 다섯 명의 여성 이야기
‘5필리어’(2월 21일~3월 4일 소극장 산울림)는 산울림고전극장의 세 번째 작품이다. 오필리어의 이름 첫 글자인 ‘오’를 숫자 5와 연결시킨 설정이 발랄하다. 원작의 오필리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거나 새롭게 조명한다기보다는 5에서 시작된 다섯 명의 여자 이야기, 지금 이곳의 우리가 현실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다섯 개의 에피소드로 여성의 이야기를 풀어내겠다는 의도다. 그래서 무대에는 다섯 명의 오필리어와 그녀들을 설명해주는 투명한 사각의 상자만 등장한다.
첫 번째 오필리어는 가족 구성원에서 주체가 되지 못한 채 인형 취급을 받는 여성이다. 그 유명한 입센의 ‘인형의 집’ 주인공 노라가 연상되는 인물로, 100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인형으로서의 노라가 여전히 망령처럼 여성에게 덧씌워져 있는 가부장제의 모순을 보여준다. 두 번째 오필리어는 데이트 폭력에 희생당하는 여성이다.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가해지는 폭력적 말과 행동은 소유와 집착에 대한 비뚤어진 욕망일 뿐 배려와 교감을 전제하는 사랑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오필리어는 각각 문단과 연극계에서 자행된 성폭력으로 희생된 여성이다. 나비처럼 번데기를 벗어나 화려한 날개로 날아오르고 싶던 시인 지망생이 처절하게 짓밟히는 모습, 배역을 따내기 위해 연출의 요구를 따르고 유린당하는 여배우의 모습은 예술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되고 묵인되었던 폭력의 민낯을 보여 주었다.
네 개의 에피소드가 여성이라는 젠더적 지향성을 분명히 하면서 공감대를 이끌어 냈다면 세 번째 오필리어는 조금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바로 세월호 사건에 희생된 여학생이 세 번째 오필리어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은 비단 여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닌 전국민의 트라우마가 된 사건이다. 남녀노소, 무기력한 시스템과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에 희생되었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다른 오필리어들과 이질적이고 그래서 낯설고 무겁다. 세월호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라는 의도가 읽히지만, 그리고 수동적 태도를 강요받은 희생자라는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지만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는 다른 오필리어들과는 지향점과 문제의식이 달라서 효과적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오필리어가 빠져 죽은 물속의 고요함, 그 영상이미지 속에서 펼쳐지는 다섯 오필리어의 이야기에 남성은 목소리로만 존재한다. 무대 뒤와 객석에서 들리는 남성의 목소리는 형체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권위적이고 위압적이며 폭력적으로 다가온다. 재구성의 의도가 선명해지는 연출적 감각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세월호 희생자 대신 ‘맘충’으로 불리는 엄마들이나 유리천장 밑에서 일하고 있는 직장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면 ‘5’필리어의 의미가 더 분명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닭쿠우스’, 꿩 대신 닭이 아닌 ‘말 대신 닭’
피터 셰퍼의 원작 ‘에쿠우스’를 재구성한 ‘닭쿠우스’(3월 7~18일 나온시어터)는 부제가 ‘밋친삐끕킷치’로, 재구성의 방향을 정확하게 명시하고 있다. 원작의 주제의식을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무겁거나 진지하지 않게 수많은 B급 정서의 형식으로 가볍게 비틀어내겠다는 의도다. 이에 따라 가장 크게 변한 것은 말 대신에 닭을 배치한 것이다. 말 여섯 마리의 눈을 찌른 알런은 닭의 눈을 찌른 알난으로, 알런의 심리를 추적하는 다이사트 박사는 다이다이 박사로 바뀌었다.
닭이라는 대상부터가 우습다. 일명 ‘치느님’으로 불리는 닭과 치킨에 대한 한국인의 사랑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만큼 익숙하고 일상적이어서 주목하지 않았던 닭을 끌어왔기 때문에 몹시 친근하고 한편으로는 낯설다. 수많은 종류의 치킨이 주기도문처럼 읊어지고 우리나라 치킨업체의 역사가 성경구절처럼 암송되는 장면은 닭으로 대체했기에 가능한 재미이다. 닭의 눈을 찌르는 손동작의 소박함과 기이함도 말의 눈으로는 불가능한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무엇보다 말을 닭으로 바꾸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다이다이 박사의 내면이 더욱 부각되었다는 것이다. ‘에쿠우스’의 공연을 볼 때마다 인상에 남았던 것은 말근육을 장착한 코러스들의 몸, 그런 오브제로서의 말과 교감하는 알런이었다. 말 자체가 시각적으로 강한 인상을 주며 눈을 찌른다는 행위가 극단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매 공연마다 알런에 캐스팅된 배우가 누구인지를 강조하는 것이 홍보의 초점이기도 했다. 그런데 시각적으로 말보다 훨씬 사소한 닭이 설정되니 알난의 심리보다는 그 부모들의 상황, 다이다이 박사의 고민과 무의식이 강조되었다. 원작을 공연할 때 시각적 화려함에 압도되어 관객들이 쉽게 간과했던 주제가 새롭게 읽히는 즐거움이 있었다.
거기에 공간적 배경이 충남 홍성이다보니 모든 대사가 충청도 방언이었는데, 느리면서도 의뭉스러운 언어적 특징은 친근함을 주며 청각적으로 편안함과 현실성을 부여해주는 역할을 했다. 연극은 시대의 거울이라는 명제가 맥락없이 제시되면서 희화화되고, 과장된 의상들과 배우들의 연기로 인물의 성격을 강조한 것도 연출이 의도한 공연의 재미였다. 비뚤어진 표정으로 소년을 연기한 이기돈과 다이다이 박사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능청스럽게 표현한 정나진의 연기가 자칫 산만할 수 있는 B급 정서의 중심을 잡아주고 있었다.
말을 닭으로 바꾼 발랄한 상상력이 더욱더 힘을 받기 위해서는 키치와 B급 정서라는 지향 때문에 곳곳에 배치된 다양한 연극적 장난들을 조금은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것만 보완된다면 알난이 사랑한 닭 너케트를 관객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글 배선애(연극평론가) 사진 산울림고전극장·티위스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