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맞이한 악흥의 순간
어느 여름날, 오스트리아 빈에 위치한 ‘음악가들의 묘지’를 찾았다. 청명한 하늘과 상쾌한 바람, 쉼 없이 돌아가는 스프링클러를 바삐 쫓으며 나무와 풀꽃들 위로 무지개를 그려내던 햇살. 베토벤과 모차르트(가묘)·슈베르트·브람스를 비롯한 많은 음악가가 영면하고 있는 그곳은, 어둡고 침울한 공동묘지가 아니라 지상의 여행을 마친 이들이 쉬어가는 정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중, 우윳빛 대리석과 울긋불긋한 꽃들의 대조가 아름다운 슈베르트의 무덤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타고난 병약함과 피아노 한 대 갖지 못할 정도의 가난, 고독과 쓸쓸함으로 점철된 생을, 그마저도 오래 누리지 못했던 그는 그 생을 건너고 나서야 소원대로 존경하던 베토벤의 곁에 잠들었고,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무덤가에 꽃 시들 새 없이 수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었다.
햇살이 부서져 내리던 무덤을 바라보다 문득, 스스로 슈베르트와 닮은 점이 많다던 피아니스트 임동혁을 떠올렸다. 깊은 심연 속에서 아름다운 노래를 끌어올렸던 슈베르트처럼 노래하듯, 이야기하듯 연주하고 싶다고 했다. 어느 순간부턴 기자 역시 슈베르트와 그를 동일시했던 것 같다. 언젠가 연주를 마치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무대 뒤로 사라지던 그의 뒷모습을 보며 ‘저러다 서른한 살이 되면 사라져버리는 거 아냐?’라는 엉뚱한 걱정을 했던 걸 보면 말이다. 그러나 슈베르트가 그러했듯, 임동혁의 서른한 살 역시 녹록지 않아 보였다. 본인 역시 실제로 가장 힘든 시기였노라고 밝히기도 했다.
3년이 흐른 지난 7일,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서른넷의 임동혁은 아주 긍정적인 의미로, 이전과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살이 많이 올랐고, 차이나 카라의 연주복이 아닌 새로운 의상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이날 공연은 슈베르트 즉흥 환상곡 D935와 피아노 소나타 21번 D960으로 꾸며졌다. 음악적 흐름에 방점을 찍은 듯한 그의 연주는 금세, 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지닌 4곡의 즉흥 환상곡을 지나 소나타 21번에 닿았다. 여러 차례의 조성 변화로 표현과 통제가 어렵지만, 그만큼 다양한 색채를 뿜어내는 소나타. 연주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임동혁은 진심으로 홀가분하고 즐거워 보였다. 슈베르트의 마지막 음악 여정에 거침없이 동행한 그의 얼굴 위로, 1996년 청소년 쇼팽 콩쿠르에서 보여준 열두 살 임동혁의 말간 얼굴이 겹쳐졌다. 그제서야 영원히 ‘앙팡테리블’에 머물러 있을 것 같던 임동혁이 저만치 나아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자라있었다. 이는 기량의 성장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기운의 성장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연주자를 응원하듯 관객들은 열렬한 환호와 함께 국내에서 보기 드문 기립 박수를 보냈다. 무대 뒤로 걸어가는 임동혁의 뒷모습 역시 더 이상 처연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 나와 7곡을 앙코르로 선사했다. 모두 슈베르트의 작품이었다.
첫 순서는 그가 롱 티보 콩쿠르에서 우승한 후 발매한 데뷔 앨범을 연상케 한 즉흥 환상곡 D899. 이어 앙코르에서 연주할 거라곤 생각지 못한 소나타 20번 D959가 들려오자 객석에선 감탄이 터져 나왔다. ‘3부 공연’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관객도, 연주자도 마음을 열고 온전히 즐기던 벅찬 광경 속에서 생각이 길어졌다. 신은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시련을 준다지만, 유독 누군가는 한 사람이 버틸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그를 짓누르는 많은 것들을 짊어진 채 살아간다. 임동혁은 위기의 순간들을 잘 견디고, 무사히 ‘지금’으로 안착했다. 그 원동력은 언제나 그랬듯 음악이었으리라. 연신 밝게 웃으며 진심으로 무대를 즐기는 듯하던 그는, 마지막으로 ‘악흥의 순간’을 연주했다.
정원
임동혁 피아노 독주회
3월 7일 |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매력
붉은 드레스 차림으로 무대에 오른 소프라노 다니엘 드 니스는, 이미 좌중을 사로잡을 만반의 준비를 마친 듯했다. 눈빛과 표정, 손짓에서 드러나는 ‘끼’는 드 니스가 왜 ‘오페라계의 비욘세’로 불리는지 드러냈다.
드 니스는 1부에서 모차르트와 로시니의 아리아를, 2부에서는 레너드 번스타인을 비롯한 뮤지컬 넘버들을 선보였다. 1부 첫곡인 모차르트 ‘티토 황제의 자비’ 중 ‘나는 떠나지만 사랑하는 이여’에서는 발성과 호흡이 조금 불안했지만, 1부 마지막 곡으로 들려준 로시니 ‘세비야의 이발사’ 중 ‘방금 들린 그대 음성’에서는 안정된 소리를 되찾았다. 화려한 기교를 펼치는 타입은 아니지만, 자신만의 음색과 가창력으로 청중을 끌어들였다.
2부에서는 ‘쿨한 소프라노’ 드 니스의 또 다른 장기인 뮤지컬 넘버들이 펼쳐졌다. 그는 오프숄더의 푸른 드레스로 갈아입고 무대에 다시 등장했다. ‘원더풀 타운’과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등 번스타인의 뮤지컬 넘버들과 함께, ‘쇼보트’ ‘꽃북의 노래’ ‘퍼니 걸’ 등의 수록곡을 선보였다. 드 니스는 마치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처럼, 시종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에너지를 발산했다. ‘아이 필 프리티(I feel pretty)’의 가사 그대로, 그는 자신의 매력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고, 그것을 마음껏 발산했다.
루체른 페스티벌 스트링의 선명하고 세련된 연주도 돋보였다. 이들은 ‘디베르티멘토’를 중심 키워드로 잡아 모차르트와 버르토크, 번스타인의 디베르티멘토를 선보였다. ‘즐겁게 하다’라는 뜻의 디베르티멘토답게, 드 니스와의 협연과 번갈아가며 공연의 흐름을 유쾌하게 이어갔다.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유수의 작곡가들의 신작 초연을 도맡아 온 단체이지만, 이날만큼은 귀에 익숙한 산뜻한 선율을 들려주었다. 라벨의 ‘하이든 이름에 의한 미뉴에트’와 후고 볼프 ‘이탈리아 세레나데’ 등의 소품에서도 이들의 깔끔한 사운드가 돋보였다.
“제목을 알려주지 않아도 모두 아는 노래”라며 드 니스는 앙코르 두 곡을 선보였다. 비제 ‘카르멘’ 중 ‘하바네라’는 관능적이고 도발적인 음색과 표정으로 청중을 다시 한 번 사로잡았다. 두 번째 앙코르는 사라 브라이트만·안드레아 보첼리의 이중창으로 유명한 ‘타임 투 세이 굿바이(Time to say goodbye)’였다. 제2바이올린 주자들은 활을 놓고 악기 몸통을 손으로 두드리며 리듬을 연주했다. 또한 첼로 수석인 요나스 이텐은 전반부가 지나자 슬그머니 첼로를 내려놓고는 무대 중앙으로 걸어나와 직접 노래를 불러서 놀라움을 자아냈다. 안드레아 보첼리 못지않은 고음을 들려주며 드 니스와 이중창을 선보인 그에게 청중은 유쾌한 박수를 보냈다. 작은 살롱에서 드 니스와 친구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는 듯 편안하고 유쾌한 첫 내한 무대였다.
이정은
소프라노 다니엘 드 니스 & 루체른 페스티벌 스트링 내한공연
3월 15일 | LG아트센터
위트와 스릴, 긴장감 넘치는 무대
1990년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자동차 사고로 부상당한 인기 추리 작가가 자신의 열성팬에게 감금당하면서 벌어지는 린치와 광적인 집착을 그린 미국 심리 스릴러 영화 ‘미저리’는 1991년 아카데미상·골든글로브상·시카고 비평가협회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면서 대중들의 뇌리에 심리 스릴러 영화의 대명사로 깊이 각인되었다. 당시 연출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감독 로브 라이너가 맡아 작품성과 흥행 양면에서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열성팬 ‘애니’ 역할을 했던 캐시 베이츠는 일약 스타로 떠오르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미국의 대표적인 대중소설 작가이자 공포 소설의 거장 스티븐 킹이 1987년 출간한 소설 ‘미저리’는 그가 1980년대 초, 아내와 함께 영국으로 여행을 가는 도중, 비행기에서 꾼 악몽을 바탕으로 작성한 작품이다. 소설 ‘미저리’는 출간 이후 영화나 연극으로 각색될 정도로 좁은 공간에 놓인 두 사람의 심리를 치밀하고 촘촘하게 묘사해 오싹함을 자아내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현대 사회의 병리 현상 가운데 하나인 스토킹을 주제로 한 이 작품은 소설의 배경이 애니의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전개되지만 영화에서는 고도의 긴박감 넘치는 연출로 관객에게 소설에서와는 또 다른 스릴감을 느끼게 했다.
소설과 영화로 사랑받던 ‘미저리’가 연극으로 재탄생한 것은 배우 브루스 윌리스에 의해서였다. 그는 연극 데뷔작으로 2015년 브로드웨이 초연을 올린 ‘미저리’를 통해 화제의 중심에 섰다. 그리고 단 한순간도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전개와 탄탄한 연기로 ‘미저리’ 연극 무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브로드웨이에서 검증된 작품이 한국에 상륙한 것은 그런 점에서 더욱 반갑고 기대를 모았다.
3월 8일 공연에서는 김상중이 주인공 폴 역을 맡았다. 인기 소설 ‘미저리’의 저자이자 유명 소설가 폴은 우연한 사고를 당하고 애니에게 목숨을 빚지게 되나 애니의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아픈 몸으로 탈출을 감행한다. 소설가 폴을 향해 때로는 상냥한 소녀팬, 때로는 광적인 집착의 모습을 보여주는 ‘애니’ 역은 이지하가 맡았고, 실종된 폴의 행방을 찾아 나서며 극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마을 보안관 버스터 역으로 고인배가 무대에 올랐다.
우선 TV에서 만나던 김상중의 안정된 연기와 매력적인 저음, 정확한 전달력은 극의 집중을 높이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평소 폴의 소설 ‘미저리’ 시리즈의 애독자로 작가 폴을 존경해 오던 간호사 출신 애니 역의 이지하는 광적인 집착을 섬세한 묘사로 잘 보여주었다. 다만 이지하의 외모에서 풍기는 예쁘고 소녀 같은 느낌이 광기를 드러내는 편집증적인 여인보다는 누군가를 좋아해 수줍어하는 상냥한 팬의 모습과 더 어울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에게 익숙했던 ‘미저리’와는 다른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한 것은 틀림없다.
연극의 극적인 긴장감을 높였던 보안관 ‘버스터’를 맡은 고인배는 매력적인 음성과 균형감 있는 연기로 팽팽하게 극을 이끌어 갔다. 세련된 무대 연출과 각 배우들만의 캐릭터를 살린 감정의 밸런스는 무대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묻어나 관객들을 숨죽이게 했다. 무대는 탄탄한 대본과 조명, 의상 등 섬세한 연출, 긴장감 넘치는 음악, 그리고 위트와 스릴이 살아있는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한 앙상블을 이루며 새로운 세계를 선물한 시간이었다. 특히 연극이라는 장르에서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공간감 때문에 ‘미저리’가 가지고 있는 폐쇄적인 공포감이 극을 더했던 무대였다.
국지연
연극 ‘미저리’
2월 9일~4월 15일 | 두산아트센터 연강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