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와 연주자, 관객 모두가 안아야 할 숙제
베토벤과 드보르자크로 꾸며진 이 날의 공연 중 단연 돋보인 것은 피아니스트 김대진과 함께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무대였다. 지휘자로, 때로는 협연자로 다년간 교향악축제 무대에 서왔던 김대진의 노련한 연주는 중견 연주자들은 물론 최근 보았던 젊은 연주자들의 협연 무대 중에서도 단연 빛났다. 김대진의 연주에는 확신이 있었다.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그의 정돈된 소리는 오케스트라를 타고 관객에게 전달되었고, 그 소리에는 정확한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반면 협연자를 받쳐주는 오케스트라의 힘은 조금 부족해 보였다. 아직 완전히 합을 이루지 못한 연주에 드러난 산만한 분위기는 공연의 흐름에 집중력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이런 아쉬움은 비단 협연 무대에서만 오는 문제는 아니었다. 무대에 대한 완성도는 매년 교향악축제에서 느끼는 아쉬움 중 하나다. 온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스타 연주자들과 짧은 리허설만으로 무대에 오르는 것. 관객으로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지역을 대표하는 단체들의 연주를 한 자리에서 듣는 기쁨을 더 느끼고 싶은 마음이다.
이미라
4월 3일 | 김대진 협연, 줄리안 코바체프/대구시향
폭발적인 빛과 힘의 기운
제임스 저드/대전시향과 피아니스트 손정범이 함께한 이 날의 공연을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단연, ‘힘’이라 하겠다. 무대의 포문을 연 안성혁 작곡가의 교향시 ‘태초의 빛’에 열광하는 관객들을 보며 현대음악의 가능성과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고, ‘힘’정범이라는 별명이 붙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손정범은 기운 넘치는 ‘황제’를 들려주었다.(정말 피아노를 집어삼킬 것 같아 우려될 정도였다) 그리고 대전시향과 제임스 저드가 빚어낸 브람스의 온화한 힘까지. 여러모로 다양한 힘이 솟구치는 무대였다. 근래 들어 현대음악의 매력에 조금씩 빠져드는 중이다. 작은 세포 안에 담긴 거대한 유전자 지도를 발견해 나가는 기분이 이랬을까. 소리 하나, 음 하나가 품고 있는 다채로운 색깔과 개성을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그런 의미에서 대전시향이 연주한 ‘태초의 빛’은 가장 흥미롭고 설레는 무대였다. 작곡가는 성경에 담긴 ‘천지창조’의 과정을 장엄한 음악 어법으로 그려냈는데, 무교임에도 유신론자인 기자로서는 강렬한 종교적 체험을 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곡 안에 담긴 ‘우주의 기운’이 벽에 반사돼 고스란히 객석으로 전달됐다. 현대음악 연주에서 보기 드물게 뜨거운 환호가 터져 나왔다. 우주가 품은 거대한 뜻은 책에 담겨 있던, 오선지 위에 녹아있던 언제나 벅차고 숭고하며, 인간을 압도하므로 그랬으리라.
정원
4월 4일 | 손정범 협연, 제임스 저드/대전시향
특별손님의 방문
서른번째 교향악축제를 축하하러 특별한 손님들이 찾아왔다. 대만의 스타 지휘자 샤오치아 뤼와 대만국가교향악단, 그리고 30년 역사상 처음으로 교향악축제 무대에 오르는 피아니스트 백건우다. 첫곡으로 선보인 고든 친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세 개의 원주민 노래’ 중 ‘춤추는 노래’는 이날 세계 초연된 작품으로, 대만 전통민요를 바탕으로 작곡됐다. 전통적 색채는 바이올린 선율이 끌어냈고, 금관은 적극적인 사운드와 함께 강렬하고 활기 찬 리듬을 들려주었다. 이어 등장한 백건우는 예의 흰색 터틀넥 차림으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는 그에게서는 무욕(無慾)이 느껴졌다. 힘을 뺀 터치는 ‘이것이 리스트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 편안함이 오케스트라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독주와 관현악은 서로 대결하는 대신 상대를 둥글게 감싸 안았다. 2부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 연주의 지향점은 민첩함이었다. 비통함이 흐르지만 거기에 함몰되기보다는 그 위로 파도를 타 넘는 쪽에 가까웠다. 현의 질감은 다소 거칠었지만 팀파니가 조절하는 세밀한 강약을 통해 맛을 살림으로써, 바닥에 끌릴 듯한 육중함 대신 흐름을 타며 요소요소의 매력을 부각시켰다. 악단을 요리하는 샤오치아 뤼의 역량이 빛난 무대였다.
이정은
4월 5일 | 백건우 협연, 샤오치아 뤼/대만국가교향악단
스타 플레이어들의 만남
‘클라라 주미 강+성시연+서울시향=매진.’ 셋의 만남은 일찍부터 기대를 모았다. 젊은 여성 바이올리니스트의 대표주자 클라라 주미 강, 경기필 이후 거취가 주목되는 지휘자 성시연이 서울시향과 만나 선보일 음악에 많은 이들이 주목했다. 합창석을 추가로 오픈하고 네이버 생중계를 진행하는 등, 과연 올해 교향악축제 라인업 중 가장 많은 관심이 쏠린 무대다웠다. 서곡 없이 곧바로 브루흐 ‘스코틀랜드 환상곡’이 시작됐다.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은 사운드의 질감을 섬세하게 매만졌고, 서울시향은 이를 안정적으로 지지했다. 앙코르로 선보인 타이스 ‘명상곡’에서 관객의 집중도는 더욱 높아져, 정규 편성곡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의 만족감을 안겨주었다. 2부의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에서는 성시연 특유의 거침없는 스케일이 부각되었다. 다섯 악장 내내 목관의 디테일한 연주가 발군이었으며, 마지막 5악장에서 금관과 타악기가 들려주는 폭발적 사운드는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극대화하며 주술적인 절정을 향했다.
이정은
4월 6일 | 클라라 주미 강 협연, 성시연/서울시향
견고한 지지와 신뢰 위에서
시대의 소음과 미세먼지가 만연한 도심에서 벗어나 맑은 기운을 느끼고자 새벽 일찍부터 등산을 다녀왔다. 부지런히 움직인 덕에 갖가지 색으로 칠해진 산과 강, 나무와 꽃을 보며 소란하던 마음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그렇지 않았다면, 정나라/경기필과 바이올리니스트 김수연이 전해준 음악이 들어와 고일만한 내적 여유를 마련할 수 없었을 거다. 김수연이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악장의 옷을 벗고 솔리스트로 예술의전당 무대에 올랐다. 그녀는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이하 경기필)와 일찍이 여러 차례 함께 무대에 오른 바 있는 만큼, 두텁게 쌓인 음악적 신뢰와 친밀감을 바탕으로 안정감 넘치는 연주를 선보였다. 낭만적 선율과 악단의 장중함이 반복되며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분위기, 협연자의 화려한 기교를 동시에 만끽할 수 있는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은 김수연에게 딱 맞는 옷이었다. 이날 무대에 오른 부지휘자 정나라는 포디움이 아니라, 단원들이 보내온 견고한 지지 위에 서서 지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했다. 쇼스타코비치 ‘축전 서곡’과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혁명’에 이르기까지 역동적인 기세로 무대를 마친 정나라는 악장 정하나와 진한 포옹을 나눴고, 관객들도 이 같은 모습에 환호를 보냈다. 정나라가 홀로 박수받을 수 있도록 호응을 이끈 단원들의 배려해 또한 인상 깊었다.
정원
4월 7일 | 김수연 협연, 정나라/경기필하모닉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
교향악축제가 선보이는 다른 여러 무대 중에서도 서진/과천시향(협연 신창용)의 공연을 보기로 선택했던 것은 연주자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지만, 프로코피예프로만 구성한 프로그램에 눈길이 갔기 때문이다. 2015년 교향악축제에 처음 참여해 이번이 세 번째 무대인 과천시향은 지휘자 서진과 함께 교향곡 1번 ‘고전’으로 연주를 시작했다. 하이든의 고전 스타일에 기초해 작곡된 만큼 크지 않은 편성으로 듣기에 편안한 연주를 선보였다. 전 프로그램이 한 작곡가의 작품인 만큼 너무 무겁지도 지루하지도 않은 좋은 시작이었다. 이들과 함께 무대에 오른 협연자는 피아니스트 신창용이었다. 교향악축제에서의 첫 데뷔 무대를 위해 그가 준비한 작품은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2번. 그의 음색은 첫 음, 첫 소절부터 빛났다. 소리에 대한 피아니스트의 연주와 고민의 결과물은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 긴장감을 끝까지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에 대한 걱정은 오케스트라와 함께 거침없이 쏟아내는 쉴 틈 없이 빼곡하고, 변화무쌍한 멜로디와 함께 잊혔다. 프로코피예프 음악이 가진, 그 특유의 화음이 빚어내는 그로테스크한 아름다움에 대한 아쉬움은 조금 남았다. 하지만 앙코르로 선보인 브람스 Op.118-2 연주를 듣고, 이 아쉬움을 다음 무대에 대한 기대감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지휘자 서진과 과천시향은 프로코피예프 ‘로미오와 줄리엣’ 모음곡 Op.64로 2부를 채웠다. 다채로운 색깔과 스토리가 담긴 연주로 오케스트라의 가능성을 마음껏 펼친 멋진 마무리였다.
이미라
4월 18일 | 신창용 협연, 서진/과천시향
글 ‘객석’ 편집부 사진 예술의전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