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소리꾼 이희문 & 송소희, 전통에 새 옷을 지어 입히다

전통에 새 옷을 지어 입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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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7월 9일 5:17 오후

전통에 새 옷을 지어 입히다 경기소리꾼 이희문 & 송소희 경기민요의 대를 잇는 이색(異色)적인 두 소리꾼이 들려주는 이색(二色)적인 이야기

©이진환

 

 

 

 

 

 

 

 

 

 

 

 

 

 

 

 

 

 

 

 

 

 

 

 

 

‘경기민요’를 떠올리면 으레 경기도 지방의 민요만을 뜻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경기민요는 경기도를 비롯해 강원도·충청도·경상도·황해도, 심지어 제주도까지 아우르는 큰 이름이다. 대중에게 널리 사랑받던 1920~30년대에 평양 출신의 예인들이 대거 서울로 내려와 활동함에 따라 서도의 소리가 섞여들며 독특한 음악적 특징을 띠게 됐고, 지금은 서도민요를 포함한 ‘경기민요’와 전라도 지방의 ‘남도민요’를 팔도 소리의 큰 축을 담당하는 두 갈래로 보기도 한다.

경기민요란 본래 전문 예인들을 통해 불리던 통속민요와 민중이 두루 즐기던 토속민요로 나뉜다. 1975년 국가무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된 경기민요는 이중 통속민요인 12 잡가(경기좌창)를 일컫는다. ‘유산가’ ‘적벽가’ ‘제비가’ ‘소춘향가’ ‘선유가’ ‘집장가’ ‘형장가’ ‘평양가’ ‘십장가’ ‘출인가’ ‘방물가’ ‘달거리’로 구성된 12 잡가는 20세기 초, 소리꾼과 귀명창의 모임 공간인 깊은 사랑(舍廊)을 중심으로 활동한 소수의 남성 명창과, 권번을 중심으로 훈련받은 예기들을 통해 전승된 대표적인 민중음악이었다.

그로부터 약 100년. 너무 친숙했던 탓에 소홀해져 결국 대중으로부터 외면받으며 힘겹게 한 세기를 건너온 경기민요를 기다리는 것은 새로운 감각과 개성으로 무장한 이 시대의 예술가들이었다. 그 시절의 경기민요가 이전에 입어본 적 없던 새 옷을 갖춰 입고 21세기에 이르러 다시금 대중과의 교감을 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각기 다른 빛깔의 옷감으로 손수 옷을 지어 민요에 생명력을 더하는 두 소리꾼이 있다. 남성 소리꾼의 역사를 품은 채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깊은 사랑(舍廊)의 의지를 일깨우고 맥을 이어나가는 이희문. 전통에 대한 깊은 사랑(愛)으로 저만의 소리를 찾기 위해 다른 세계로의 여행을 마다하지 않는 송소희. 그들이 넘치는 끼와 에너지, 전통을 향한 긍지어린 자신감을 발산하면 할수록 이름 석 자 앞에 붙은 수많은 수식어는 더 빠르게 ‘소리꾼’으로 수렴해나가고 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경기민요의 대를 이어가는 두 예인, 앞서 걷는 이희문과 부단히 따라 걷는 송소희의 소릿길을 찬찬히 따라가 보았다.

 

이희문 생긴 대로 살으리랏다!

도저히 길들지 않을 것만 같은 땅 한가운데서 놀랍도록 순수한 소리가 뿜어져 나온다. 여성 소리꾼이 대부분인 경기민요 판에 등장한 남성 소리꾼 이희문의 존재는 황야에 솟구치는 맑은 샘처럼 이질적이면서도 매혹적이었다. 얄상한 몸태, 아이같은 미소와 날카로운 눈빛을 장착한 중성적인 마스크로 청중의 눈을 사로잡고, 간드러지는 목소리와 담백하고 경쾌한 시김새로 귀를 사로잡은 그는 ‘생긴 대로 살겠다’며 아프로 스타일의 가발에 망사 스타킹, 아찔한 하이힐을 신고 익숙한 가락을 뽑아내는 민요 록 밴드 씽씽의 리드보컬이자 민요의 내일을 키워나가는 이희문 컴퍼니의 대표.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이춘희의 제자이면서 명창 고주랑의 아들. 그리고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이수자이다.

두텁게 쌓인 소리 내공은 물론, 연출가·기획자의 자질까지 두루 갖춘 이희문의 색다른 행보는 그간 어떤 형용사도 변질시키지 못했다. ‘뜬구름 잡는다’ ‘잡스럽게 논다’ ‘한국 남자’ ‘B급’ ‘이단아’라는 단어조차 그의 앞에선 기세를 꺾고 빛나는 수식어로 변모했을 뿐이다.

페르소나와도 같은 가발과 의상을 벗어 던진 민낯의 이희문은 늘 폭발하는 에너지와 끼로 무대를 장악하던 모습과는 달리 나른한 목소리로 띄엄띄엄 이야기를 이어갔다. 여인의 옷을 입고 가장 편안한 얼굴을 내보인다면서도 ‘상남자 같다’는 말에 기쁨을 숨기지 못하는 남자. 남성 소리꾼의 족적을 살피는 3년간의 ‘깊은 사랑 시리즈’를 마치고, 재즈밴드 프렐류드와 함께하는 공연 ‘한국 남자’의 미국 투어와 여러 무대를 준비 중인 그와 나눈 인터뷰를 지면으로 전한다.

 

‘민요 삼천리’를 끝으로 2016년에 시작한 ‘깊은 사랑 시리즈’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어떻게 기획하게 된 공연이었나요?

근대 이후, 경기민요는 여성 소리꾼의 영역으로 자리 잡았는데 예전엔 남성 소리꾼이 더 많았거든요. ‘왜 그렇게 되었을까?’라는 궁금증에서부터 생각을 이어나가다 보니 남성 소리꾼이 어떻게 생겨났고, 어떤 식으로 활동했는지. 또 궁극적으로 남성 소리란 무엇인가에 대해 알고 싶고, 또 알리고 싶더라고요. 사실 이 공연에 대해선 2012년부터 생각하고 있었어요. 민속악 장단의 명고셨던 故 장덕화 선생님을 댁에 모셔다드리는 길에 처음 ‘깊은 사랑(舍廊)’에 대한 이야기를 접했죠. 귀명창들이 소리를 즐기고자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땅을 파고 움집을 만들어 소리판을 벌였는데 진짜 소리꾼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소리를 정말 잘해야지만 인정받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고요. 존재만으로도 신기한데, 이름이 깊은 사랑이었다는 거예요. 어쩜 단어도 너무 예쁘잖아요. 스토리텔링을 중요시하는 제게 깊은사랑은 꼭 무대에 올리고 싶은 소재였어요. ‘이거다!’ 싶었죠.

 

각 무대가 어떤 방향으로 꾸며졌는지 궁금한데요.

세 무대에 제 개인적인 역사와 민요의 이야기를 담았어요. 먼저 제가 민요를 체득하기까지의 역사와 민요의 역사를 짜임새 있게 엮어 1부로 선보였습니다. 2부에선 ‘경기소리에서 남성 소리꾼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풀어내고자 ‘사계축’을 다뤘고요. 예전에는 청파 ‘1동’을 청파 ‘1계’라고 명명했는데, 지금의 만리동과 청파동 일대에 해당하는 4계 구역에서 축을 이루던 남성 소리꾼들을 ‘사계축 소리꾼’이라고 불렀죠. 한강을 통해 물건과 사람이 모여 큰 장도 많이 열리고, 수공업자들이 모여 살았는데 당시 여성들은 살림을 도맡아야 했기 때문에 일을 마친 남성들이 주로 깊은 사랑에 모여 술 한 잔 걸치며 소리를 즐겼다고 해요. 그 안에서 소리를 잘하던 이들이 소리꾼으로 활동하면서 ‘사계축’으로 이어진 것이고요.

 

근대에 이르러 연희는 남사당패가 명맥을 이어갔는데, 민요는 오히려 남성이 자취를 감추고 여성이 전면에 나서게 된 셈이군요.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조선의 관기 제도가 사라지고 일본의 문화가 들어오면서 기녀들에게 기예와 춤·노래·무용을 가르치는 권번이 생겨났어요. 이후 남성 소리꾼들이 권번에서 여성을 가르치게 되고, 굳어져 버린 체계 안에서 전통문화가 전승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소리와 예술이 여성으로 옮겨간거죠. 그런 의미에서 ‘깊은 사랑’ 시리즈의 2부인 ‘사계축’과 3부인 ‘민요 삼천리’ 공연은 등을 맞대고 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전자는 남성의 소리를, 후자는 근대 여성의 소리를 다루고 있으니까요. 여성의 소리를 어필하기 위해 3부에선 완전히 여성의 모습으로 분해 무대에 올랐답니다.

 

음악은 물론 독특한 스타일링도 크게 주목받아왔는데, 한국 남자로 30여 년을 산 만큼 소화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안은미 선생님이 ‘바리’라는 작품을 하면서 종종 이희문이라는 사람이 무대에서 가장 반짝거릴 때가 언제인지 생각해보라셨는데, 그 말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저를 돌아보기까지 7년이란 시간이 걸렸어요. 한국 남자로서 부담스러워 계속 피했었나 봐요. 2013년에 오더메이드 레퍼토리 두 번째 무대인 ‘잡’을 만들면서 ‘생긴 게 이렇고, 성향이 이런데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 할까 봐 두려워서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건 정말 나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가장 나다울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나섰죠. 숨통이 탁 트이는 것 같더라고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이번에는 “노래하는 네 입이 얼마나 예쁜지, 너는 모른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이번에 ‘민요 삼천리’를 준비하면서 깨우쳤네요.(웃음) 여성으로 분한 제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남겼는데 프레임 속에 담긴 제가, 자신 있는 모습에서 나오는 가장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 삶의 모토가 그거예요. ‘생긴 대로 살자. 척하지 말자.’

©장준기

 

그러고 보니 재즈밴드 프렐류드와 함께한 공연명이 ‘한국 남자’였죠.

2016년 여우락 페스티벌을 위해 프렐류드와 함께 꾸민 무대였는데, 멤버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에 나온 “우리 모두 한국 남자네?”라는 말에서 시작됐어요. 게다가 경기민요 가사의 대부분이 여성을 달래주고 위해주는 내용이거든요. ‘아, 한국 남자들이 한국 여자들을 좀 달래줘야겠다. 우리가 달래줘야 하나보다.’ 싶었죠.

 

젠더 의식 재고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이쯤 되니 이희문 씨는 어떤 남자인지 궁금해지는데요.

저는 보통 ‘남자답다’라고 정의하는 말투나 행동같은 조건에 부합하는 점이 하나도 없어요. 목만 두껍죠.(웃음) 그런데 한번은 한 달간 진행을 맡았던 라디오 ‘예술가의 백스테이지(한 달씩 예술가들이 돌아가면서 진행하는 방송)’ PD가 저더러 ‘진짜 상남자’라는 거예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에 놀라 이유를 물었더니 “모든 게 다 남자다워도 마음 씀씀이가 그렇지 못한 분들이 많은데 서툴지만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적인 면도 있고, 추진력이나 거침없고 솔직한 면에 있어 ‘상남자’ 같다”고 하더라고요.(그는 실로 미소를 금치 못했다.)

 

그렇다면 ‘상남자’가 음악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충돌을 해소하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제가 음악에 있어 요구하는 건 딱 두 가지에요. 첫째, 나는 무조건 움직이면서 노래해야 하니 춤출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 달라. 둘째, 시김새가 잘 들려야 하고 노래하면서 방해되지 않게 해달라. 민요의 반주는 수성가락이라고 해서 창자의 선율을 쫓아가는 형식인데 요즘 연주자들은 악보를 보면서 연주하는 데 익숙해서 잘 맞지 않아 불편할 때가 있거든요. 이런 요구를 고스란히 음악에 반영해주는 사람이 바로 이태원·장영규 씨에요. 이태원 씨는 우리 음악의 생성 원리를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경기민요는 ‘니나노~’의 이미지가 있는데, 이태원 씨와 경기민요가 만나면 지적인 인상을 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함께하자고 연락을 취했죠. 이태원의 음악이 논리적이라면, 장영규의 음악은 본능적이면서도 전통과 현대적 어법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요. 이 둘의 장점이 오더메이드 레퍼토리를 통해 시너지를 일으켰고, 그때의 인연으로 씽씽이 탄생하게 됐죠. 혹여 죽일 듯 미울지라도 만들어온 음악을 들어보면 화가 싹 풀려요. 그래서 참습니다. 경기민요의 이미지와 스타일을 바꾸기 위해 꼭 필요한 분들이기 때문에 모든 걸 참고 인내하는 거죠.(웃음)

 

새롭게 도전해보고 싶은 분야가 있나요?

연기요. 목표이자 숙제라고 할 수 있죠. 뮤지컬 같은 요소를 더한 이희문의 1인 소리컬이랄까? 내용이나 음향, 연출적인 부분을 다양하게 구상하고 있어요. 그런데 중요한 건 내가 그걸 왜 해야 하는지 이유를 찾아서 스스로를 설득하는 일이에요. 예를 들어 ‘깊은 사랑 시리즈’의 1부에선 경기 명창이셨던 어머니와의 이야기를 다뤘어요. 어린 시절,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 빈자리를 채워주던 어머니의 LP판 음원을 채취해 함께 노래했고, 2부에선 스승이셨던 이춘희 선생님의 ‘말하듯 노래하라’는 가르침에 따라 가사를 읽는 제 목소리를 녹음해 그 위로 노래를 덧입혔죠. 다 이유있는 연출이었거든요. 무언가를 함에 있어선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이해할 수 없는데 어떻게 남을 설득시킬까요? 그래서 저는 아직도 공연에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녹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소리꾼으로서 지닌 음악적 고민이 있다면?

‘왜 우리는 가수라고 하지 않고 소리꾼이라고 할까?’ ‘왜 우리가 하는 음악은 노래라고 하지 않고 소리라고 할까?’ 고민하다 득음으로 생각이 이어졌어요. 본인의 몸속에서 찾아낸 신비로운 소리를 언제 어디서든 자유자재로 뽑아낼 수 있는 게 득음이다 싶어요. 누군가 ‘그래서 네가 그런 소리를 가졌느냐’고 묻는다면 적어도 ‘처음 소리를 할 때와 지금은 다르다’고 답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소리에서 시간과 세월, 경험이 조금씩 묻어나면서 이전과 다르다고 느껴질 때 가슴 한켠이 묵직해지더라고요. 소리에 대한 고민이 나날이 깊어지고 있는데, 최근 어떤 부분에 힘을 주고 노래하느냐에 따라 신기하게도 소리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어떤 소리를 낼 것이냐’에 대해 여러 시도를 거듭하고 있답니다.

 

시간이 흐른 후, 소리꾼 이희문의 소리가 정말 기대되는데요.

저도요. 얼마 전 류이치 사카모토에 대한 전시를 보고 왔는데, 자기가 하고 싶은 음악을 40년 동안 끈질기게 해왔더라고요. 대중 예술과 순수 예술의 경계에서 자신의 음악을 끈기 있게 해왔기에 그만큼 인정받는 거겠죠. 암 투병을 하면서 생각의 변화를 겪고, 음악도 변화를 겪었던데 그의 긴 여정을 살펴보고 나니 숙연해지더라고요. 제 작업은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결핍된 자아를 치유해나가는 과정인데, 다 치유된 후의 나는 지금과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내 음악은, 소리는 어떻게 변해있을까 기다려져요. 그리고 스스로를 치유하기 바쁜 제가, 언젠가 남들을 돌아보며 치유해줄 수 있을지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소리꾼 이희문의 뮤직비디오 ‘소춘향가’  

뮤지션을 꿈꾸던 소년은 경기소리꾼이 되었고, 일본 유학 후 뮤직비디오 촬영 감독을 꿈꾸던 그는 뮤직비디오 속 주인공이 되었다. ‘소춘향가’는 판소리 ‘춘향가’ 중 몽룡과 춘향이 처음으로 만나는 대목이며, 이희문은 스타일리스트 서영희와 함께 흰 천을 이용해 서서히 붉은 사랑에 젖어가는 모습을 연출했다.

 

송소희 단단히, 또 차근차근

‘국악 신동’이라 불리던 소녀는 어느덧 숙녀로 자라 소리꾼이라는 수식어를 이름 석 자 앞에 깊이 새겨가는 중이다. 그런 그녀가 에스닉 퓨전 밴드 두번째달과 합심해 경기민요 본연의 소리를 다양한 악기와 음색으로 감싸 안은 음반 ‘모던 민요’를 발매했다. 그리고 오는 7월, 여우락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국립극장 무대에 올라 청중과 함께 민요에 몸을 싣고 ‘팔도 유람’을 떠날 예정이다. 인터뷰 말미, “나만의 소리는 무엇일까? 내 소리의 장점은 무엇이고 또 그 소리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며, 그렇게 해서 어떻게 민요를 부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하루하루 더 커져요.”라며 진지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그녀가 꼭꼭 씹고, 건강하게 소화해낼 이 시대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송소희와 두번째달

‘밴드 두번째달’과는 어떻게 함께하게 되었나?

소리꾼 김준수 씨와 발매했던 ‘판소리 춘향가’가 국악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어요. 우리 음악의 예술성에 대중성을 더해 이런 음악도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좋은 예라고 입소문이 자자했거든요. 음반을 듣다가 두번째달만의 음악이 궁금해 따로 찾아 들었는데, 국악을 기반으로 작곡한 음악뿐만 아니라 밴드 본연의 음악 스타일도 너무 좋더라고요. 꼭 같이 작업 해보고 싶어 먼저 연락을 드렸어요.

 

녹음 과정에서는 어떤 식으로 음악적 간격을 좁혀나갔나요?

경기민요에 대해 처음 이야기를 나눌 때, 국악의 소리라고 하면 다 비슷한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다른 소리를 지녔다는 점에 놀랐다더라고요. 이후엔 생각 이상으로 깊고 넓게 민요를 공부해와 음악적인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어 오히려 제가 더 놀랐고요. 음반을 들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각 곡에 담긴 소리의 색이 조금씩 달라요. 민요를 기반으로 하는 음반이라고 해서 기존의 창법을 고집하기보다는 포근하게 감싸주는 음악과 어우러질 수 있도록 각 곡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소리를 찾으려 심혈을 기울였거든요. ‘소리’라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탐구할 수 있었던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음악 경연 방송에 출연해 많은 이들에게 선택받고, 사랑받았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세계와 부딪힌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장르와 함께하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고, 두려움과 어색함보단 호기심과 설렘이 커지더라고요. 사실 제가 부모님의 권유로 국악을 시작하게 된 거라 스스로 진지하게 음악을 대하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거든요. 그런데 ‘국악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진지하게 임하고 싶다’라는 제 마음의 소리를 듣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타 장르와의 협업을 통해서였어요. 다른 음악과 얽히고설켜 하나 된 결과물을 보고 나니, ‘내가 하는 음악이 정말 멋있는 음악이로구나. 자신 있게, 멋있게 해나가도 되겠다.’라는 확신이 들더라고요. 이후, 협연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고, 색다른 무대에 대한 갈망이 있어요.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배울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돌이켜 보면 부모님이 왜 국악을 시켰다고 생각하나요? 또 어떻게 경기민요에 닿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부모님은 막연하게 제가 예술가로 크길 바라셨어요. 덕분에 미술학원도 가고, 바이올린도 배우고, 이것저것 배우며 많은 예술적 경험을 할 수 있었죠. 국악도 그중 하나였고요.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지만, 동네에 국악을 배울 수 있는 학원이 경기민요 학원 하나뿐이어서 인연을 맺게 된 거예요. 꾸준히 하다보니 어느 순간 무대에 서게 되고, 잘한다고 칭찬도 받고, 많은 분에게 사랑받고 있더라고요. 정말 우연히, 지극히 자연스럽게 소릿길로 들어서게 된 거예요.

 

그런데 국악예고가 아니라 일반고에 재학했어요.

인문계 학교에 다니면서 다양한 분야를 다양한 친구들과 함께 배우고 나누면서 음악이라는 존재를 더 넓은 의미로 바라볼 수 있어 좋았던 것 같아요. 경기민요를 국악 안에서 바라본 게 아니라, 음악이라는 더 큰 범주 안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거든요. 안 그래도 최근에 학교 측에서 축제에 초청해주어 다녀왔는데 축제에서 민요를 불러야 한다는 생각에 자신감은 떨어지고 부담은 커서 어찌나 떨렸는지 몰라요. 그런데 일면식도 없는 후배들이 마치 어제 본 사람처럼 반갑게 맞이해주고, 심지어 ‘모던 민요’에 수록된 ‘군밤타령’을 전부 따라 불러주더라고요. 그런 일을 처음 겪는 거라 정말 생소한 감정이 들었는데, 후배들이 저를 위해 시간을 내어주고 마음을 써준 게 정말 고맙고 행복했어요. 소리를 하는데 큰 동력을 얻었고, 소리꾼으로서 자신감도 생겼고요.

 

혼자 음악 전공자라 외로웠는데 대학에서 같은 길을 걷는 친구들을 만나서 좋다는 인터뷰를 읽기도 했는데, 슬럼프는 없었는지.

대학에 입학하기 전엔 제가 하는 음악에 대해 크게 궁금해하지도 않았고, 들여다보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 같아요. 딱 그만큼 만 고민하고 노래했으니 만족도, 힘듦도 없어서 딱히 슬럼프라고 할 만한 시기도 없었고요. 그런데 대학교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같은 길을 걷는 친구들과 살갗을 부딪쳐보니까 제 위치를 객관적으로 돌아보게 되고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지금은 국악을 대하는 자세와 마음가짐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에 점점 고민도 많아지고 있어요.

 

어떤 고민인가요?

이전에는 제 이름 앞에 ‘국악 신동’ 혹은 ‘국악 소녀’라는 수식어가 붙곤 했는데 이젠 누군가 저를 소개할 때 “아, 소녀가 아니죠. 숙녀라고 해야 하나요?”라고 하면서 서서히 소리꾼이라는 단어를 붙여주더라고요. 소리꾼이라는 이름이 짙어질수록 이젠 진짜 음악을 해야 할 때가 왔구나, 보여드려야 할 때가 왔구나 싶어요. 상반기에 ‘모던 민요’ 발매도 무사히 이뤘고, 이젠 여우락 페스티벌 무대와 하반기에 예정된 여러 무대를 잘 소화하는 게 목표에요. 공연명이 ‘팔도 유람’인만큼 현장을 찾아준 관객을 위해 서도민요도 준비 중이고요. 또 수도권이라는 지역적 특징을 살려 민속음악뿐만 아니라 궁중음악도 들려드리고자 편곡 작업 중에 있답니다. 단기적인 계획을 차근차근 수행하며 천천히 제 음악을 만들어 나갈 생각이에요.

 

글 정원 기자 사진 이희문 컴퍼니·SH 파운데이션

 


소리꾼 송소희의 ‘모던 민요’

‘국악 신동’에서 ‘소리꾼’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송소희가 에스닉 퓨전 밴드 두 번째달과 함께한 ‘모던 민요’ 를 들어볼 수 있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매화타령’ ‘군밤타령’ ‘오돌또기’ ‘정선아리랑’ ‘강원도아리랑’ ‘태평가’와 창작곡 ‘비나이다’가 수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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