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오케스트라의 종신악장 임명과 2016년 카를 닐센 콩쿠르의 부상으로 약속된 음반이 출시되었다
5월 1일, 베를린의 운터 덴 린덴 거리에 위치한 베를린 슈타츠오퍼의 무대. 이지윤이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오케스트라에 작년 5월에 악장으로 입단한지 거의 1년이 되던 이날, 그녀의 정식악장 임명 통보는 좀 독특한 세레머니였다. 드뷔시 서거 100주년을 맞아 바렌보임이 야심차게 준비한 이날의 무대는 드뷔시의 관현악곡 ‘선택받은 소녀’ ‘야상곡’ ‘프랑소와 비용 시에 의한 세 곡의 발라드’ ‘바다’로만 채워졌다. ‘바다’가 끝나자 관객은 드뷔시를 위한 음악적 추모는 이 공연으로 다 되었다는 듯이 큰 박수를 보냈고, 지휘자에게는 예정대로 꽃다발이 안겨졌다. 그런데 바렌보임은 꽃다발을 바로 옆의 이지윤에게 건네며 관객에게 말했다. “오늘부터 정식악장으로 임명합니다.” 순간 관객들은 그녀의 취임식(?) 하객이 되었고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1570년 창단한 이 악단의 역사 이래 그녀의 정식 취임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같은 공연이 3일 베를린 필하모니로 이어졌다. 정식악장 취임 이후의 첫 번째 무대. 찰랑거리는 단발머리와 날카로워 보이는 하이힐은 지휘자를 도와 이 악단을 이끌 그녀의 전사적 아이템 같았다. 무대 뒤의 작은 바에서 만난 그녀는 “지난 1일 공연의 흥분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라고 고백했다. 함께 맥주 한잔을 털어놓는 동안 단원들마다 그녀의 수고를 칭찬했고, 또 한 번의 축하인사를 건넸다. 누군가는 그녀에게 배운 한국어를 점검 받으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악장의 삶은 고단해보였다. 이틀 뒤에 오를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에 갑자기 투입되었고, 그 바로 다음날에는 빈 무지크페어라인의 드뷔시 공연을 위해 빈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야했다. 바렌보임 특유의 폭 넓은 레퍼토리를 소화하기 위해 연습과 리허설의 보폭을 지휘자와 맞추는 것도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악장만의 임무다. 한국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그곳에서 듣지 못한 그녀의 이야기들이 많다는 생각에 베를린으로 전화를 걸었다. 마침 이번에 출시된 그녀의 음반도 눈앞에 놓여 있었다.
바쁜 나날들일 텐데 근황이 궁금하다.
“쉴 틈이 없다. 갑자기 리허설에 투입되는 경우도 많다. 최근에 극장 근처로 이사를 했다. 여전히 지하철로 출퇴근을 하지만 그나마 몇 분이나마 시간을 아낄 수 있어서 좋다.”
현재 몇 명의 악장이 함께 하는가.
“사십대의 볼프람 브란틀과 오십 대의 로타르 슈트라우스와 함께 하고 있다. 콘서트 오케스트라와 달리 베를린 슈타츠카펠레는 오페라·발레·콘서트를 모두 맡는다. 오페라 중심의 오케스트라이지만 바렌보임으로 대변되는 콘서트에도 많이 신경 써야 한다.”
314쪽 분량의 2018/19 시즌북이 마치 사전처럼 두껍다. 베를린 시민과 호흡하는 여러 형태의 공연이 눈에 띈다. 학생 때와 음악가로 활동하는 지금, 삶의 속도가 다를 것이기에 이 도시에 대한 느낌도 다를 것 같다.
“5년 전 처음 왔을 때나 지금이나 베를린은 내게 ‘사람의 도시’이다. 국제도시로서 평생 만날 외국인들을 다 만났고 함께 공부했다. 그들은 현재 유럽 곳곳으로 흩어져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며 서로 도움을 주고받기도 한다. 나 역시 객원악장으로 다른 악단과 함께 하기도 한다. 악장이라는 위치는 오케스트라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 주요 오케스트라의 악장과 수석은 대학의 교수를 겸하기도 한다. 이들과 음악적이고 인간적인 교류를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독일음악계의 중심부로 들어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식악장으로 취임하던 5월에 영국 오키드클래식스(Orchid Classics) 레이블에서 출시된 그녀의 음반(ORC100079)은 2016년 카를 닐센 콩쿠르 입상에 따른 부상이다. 코른골드(1897~1957)와 카를 닐센(1856~1931)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동봉된 이 음반은 작년 6월에 3일 동안 닐센과 안데르센의 고향 오덴세의 카를 닐센 홀에서 녹음한 것으로 이지윤과 같은 소속사(Nordic Artist Management)의 크리스티나 포스카 지휘를 맡았고 오덴세 심포니가 함께 했다. 모차르트·베토벤·멘델스존·브람스·차이콥스키 등 고전기와 낭만기의 레퍼토리가 자주 오르는 한국의 상황에 비추어볼 때, 코른골드와 닐센의 작품은 친숙한 그들의 이름과 달리 자주 실연되지 않아 한편으론 거리감이 느껴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콩쿠르와 녹음, 중요한 순간을 모두 닐센과 함께 했다.
“콩쿠르 입상 후, 닐센이 몸에 배어 있던 때였고 닐센의 고향에서 그의 작품을 통해 얻은 결과이니 그에게 음악가로서 감사를 돌리고 싶었다. 나를 지도하던 콜리야 블라허 교수도 2016년에 닐센을 녹음(Acousence Classics)한 바 있다(내한 10월 4일 금호아트홀). 당시 스승도 물이 올라 있었으니 나 역시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 덴마크의 음악가들은 자국의 작곡가에 대한 자부심이 상상 이상으로 높고, 준비도 늘 단단히 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닐센을 만날 수 있었다. 특별한 리허설도 없이 바로 녹음에 들어갔다.”
음반에 전반을 이루는 코른골드와 그 특유의 서정성이 닐센의 차디찬 온도를 잘 보완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보통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북유럽 정서로 닐센과 시벨리우스의 협주곡을 많이 커플링하기도 한다. 닐센은 나의 애정과 달리 연주자와 관객이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곡이 아니다. 전체 35분 정도 되는데 20분에 달하는 1악장도 독주자 입장에서는 엄청 부담스럽고, 악단측에서는 하프와 타악기 등이 많이 사용되기 때문에 역시 부담을 가진다. 그래서 다른 악단과 협연할 때 닐센 협연이 성사된 적이 없다. 코른골드는 나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택한 곡이다. 2차 세계대전 때 미국으로 건너가 영화음악을 많이 작곡했던 그는 실제로 영화음악에 사용한 선율을 이 협주곡에 자주 등장시킨다. 관객에게 그 어떤 음악보다도 빠르게 피부로 가닿는 음악들이다.” 그녀에게는 다른 호흡과 자세로 대해야 하는 두 작곡가의 두 작품이었겠지만, 이 음반에 60여 분의 시간을 내어준 청자에게 두 곡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코른골드로부터 시작된 서정성은 닐센의 조각을 다듬는 그녀의 손끝과 보잉에서도 느껴진다. 부드럽고 따듯하다. 그래서 음반 속의 닐센은 온기를 품은 얼음 조각처럼 다가온다.
어떤 악기를 사용하고 있나.
“1770년대에 밀라노에서 카를로 페르디난도 란돌피(1714~1784)가 제작한 것이다. 함부르크 독일음악재단의 후원으로 2년째 사용하고 있다. 내가 만30세가 되면 또 다른 주인을 찾아가야 한다.”
입단 오디션 때 어떤 곡을 연주했나.
“R.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 브람스의 교향곡 1번 2악장, ‘세헤라자데’, 모차르트와 시벨리우스의 협주곡을 연주했다.”
오디션은 어떻게 진행되었나.
“2017년 5월에 2주 동안 1차부터 4차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다른 악단에 비해 횟수가 많고 기간도 긴 편이다. 3차까진 단원들이 심사하고, 4차에 바렌보임이 함께 한다. 사실 나는 부악장을 지원했었다. 그런데 3차 오디션 후에 악단으로부터 악장을 지원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답변이 왔다. 자신도 없었고 계획과도 달라 겁이 났지만 일단 응시해보기로 했다. 바렌보임 앞에서 4차 오디션을 했다.”
바렌보임이 어떤 평을 했는가.
“연주를 다 들은 그가 ‘이 정도 실력이면 차라리 솔리스트로 활동하지 왜 악단에 입단하느냐’라고 물어왔다. 나는 여러 장르의 음악에 관심이 많다고 답했다. 어느 악기보다도 실내악과 협주곡을 많이 보유하고 있지만, 교향곡과 오페라에서의 활약도 생각한다면 절반의 레퍼토리에 불과하다. 솔리스트로 실내악과 협주곡을 다 연주해도 세상 음악의 절반만 연주하는 셈이다. 그래서 그 음악들을 다 만나고 싶다고, 특히 오페라에 관심이 많다고 대답했다.” 베를린 필하모닉,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베를린 도이치 심포니, 베를린 방송교향악단, 베를린 심포니커 등이 공존하는 베를린은 오케스트라의 천국이자 각축장이다. 과거의 동·서베를린이 통합하는 가운데 오페라극장도 세 곳이 되어 도이치오퍼 오케스트라, 코미쉐오퍼 오케스트라, 그리고 베를린 슈타츠오퍼의 베를린 슈타츠카펠레도 함께 하고 있다. 이지윤은 “오케스트라들마다의 보이지 않는 경쟁을 몸소 느낀다”며 “심포니에 베를린 필이 있다면, 오페라에는 베를린 슈타츠카펠레가 있다”며 자부심을 내비췄다.
어느 면에서 자부심을 느끼는가.
“함께 하는 성악가들이 수준을 대변한다. 바렌보임의 지휘로 도밍고부터 네트렙코 등이 함께 한다. 이탈리아오페라 외에 현대 작품도 많이 한다. 베르크의 ‘보체크’를 처음 본 것도 이 곳이었다.”
악장으로서 가까이에서 본 바렌보임은 어떤 사람인가.
“오디션 때는 내 가방도 들어준 친절한 할아버지였지만, 첫 출근 날부터 불호령이 떨어졌다. 연습 때에 작은 체구에서 이렇게 큰 목소리가 나올 수 있다는 것에 놀랐고, 잠시도 쉬지 않는 모습에 두 번 놀랐고,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에 세 번 놀랐다. 빈 무지크페어라인 공연에서 ‘바다’의 마지막에선 흥에 겨워 소리를 지르며 지휘했다. 육신은 나이가 들었어도 두뇌는 명석하고 자신의 음악에 대한 확신이 가득 차 있다. 자신이 그리고 있는 음악에 전 단원이 이해하고 100퍼센트 따라와야 한다는 자세도 놀랍다. 그냥 음악가가 아니라 위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베를린 슈타츠카펠레가 선보이는 오페라는 실로 다양하다. 2018/19 시즌에도 11월에 래틀의 객원지휘로 초연하는 라모의 ‘히폴리투스와 아리시아’부터 비트만이 바렌보임에게 헌정한 ‘바빌론’까지 준비되어 있으며, 중간마다 모차르트·베르디·바그너·로시니·리하르트 슈트라우스·베버·케루비니 등의 명작들이 포진하고 있다.
솔리스트로 성장할 무렵에 악장이 되었다.
오케스트라에서의 생활과 앙상블 활동이 솔리스트의 삶과 연주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입단 후 스페인 발렌시아 심포니와 브루흐 협주곡을 협연한 적이 있었다. 협주곡은 지휘자와 함께 만들어가는 작품이지만, 악장이나 단원의 입장에서도 생각해보고 상상하게 되더라. 예를 들어, 지휘자의 사인 아래 현악기보다 아주 살짝 늦게 나올 수밖에 없는 관악파트의 상황, 예전에는 들리지도 않았던 타악기 소리가 들려왔다. 귀가 더 넓게 열리게 된 것 같다.” 훗날 어떤 음악가로 성장하고 싶나. “악장 임명을 받은 날 내게 주어진 시간을 계산해보니 40여년의 시간이더라. 그래서 머리가 하얗게 샌 동양할머니 악장을 상상해보았다. 그런 예가 없어서인지 살짝 오기가 생기더라.”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사진 Nikolaj Lund·Thomas Bartilla
2018/19 주요 공연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실내악 시리즈Ⅱ-이지윤&벤 킴(10월 22일, 아폴로홀)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소나타 1번·2번 외 | 이지윤&주세페 구아레라(2019년 2월 2일, 피에르불레즈홀) 버르토크·스칼코타스 외 | 외르크 비트만의 오페라 ‘바빌론’(2019년 3월 3일, 베를린 슈타츠오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