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 필자들이 꼽은 화제의 무대
한국적 이미지를 담은 두 편의 수작
국립무용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이 ‘향연’과 ‘발레 춘향’을 각각 재연했다. 추구하는 춤사위는 크게 다르지만, 한국적 이미지 강조로 대중적 인기를 높인 공통점을 지녔다. 2015년 초연한 국립무용단의 ‘향연’은 지난 수십 년간 한국무용 전공자들이 어떤 작업을 해왔는가를 보여준다. ‘발레 춘향’은 1960년대 말에 ‘코리안 발레’로 불리던 공연물과 무관하지 않다. 1980년 전후로 발표된 다수의 한국적 소재의 작품 중 1986년 초연된 유니버설발레단의 ‘심청’이 레퍼토리로 남았고, 2014년 개작한 ‘발레 춘향’은 전작의 대중적 호응도를 뛰어넘었다.
‘향연’, 전통화된 춤집의 깊이를 살피다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오른 ‘향연’(6월 6~9일)은 조흥동 안무, 김영숙·양성옥의 협력안무작이다. 궁중무용을 포함했다는 점이 기존의 유사 공연들과 다른데, 조선조의 마지막 무동 김천흥이 1980년경부터 시작한 궁중무용 재현작업의 결실이라고도 하겠다. 불교나 무속, 기방이나 마당춤 계열에 궁중예식이 덧붙으니 한국 춤을 망라했다. 계절별로 소품을 묶은 구성도 장점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특히 작품의 상품성이 강화된 이유는 무대미술 덕일 것이다. 의상 색감의 조화, 활용도가 높은 흰 사각 패널과 영상, 커다란 매듭장식이 춤의 연계를 이끌며 통일성을 유지한다.
‘봄’에 배정된 ‘제의’ ‘진연’ ‘무의’는 종묘제례의 문무, 진연의 가인전목단, 다시 제례의 무무 이미지를 차용한 춤이다. 흰 관복·옆면이 뚫린 검정 관모·흰 꽃송이·검정 도포·술 달린 모자 등이 원작의 형태나 색상과 다르나 이런 변형이 일종의 창의성으로 통용된다.
‘여름’에는 ‘바라춤’ ‘살풀이춤’ ‘진쇠춤’을 배정했다. ‘바라춤’은 불교 제례에, 나머지 두 춤은 무속에 뿌리를 두었다. 은색 바라의 화려함을 과시한 장엄한 대규모 군무에 이어진 ‘살풀이춤’은 여자 단원 일곱이 맡았다. 도입부에서는 조심스러운 잔잔한 호흡이 같으면서 다른 춤의 멋을 드러냈다. 후반부에서는 ‘도살풀이’식으로 수건을 목에 걸고 두 팔을 올리는 포즈, 양손에 수건을 잡은 활달한 회전기로 기방의 ‘살풀이춤’과 차이를 두었다. 꽹과리를 들고 주로 앞뒤로 행진하는 ‘진쇠춤’은 잡귀를 물리는 무속에 뿌리를 두었으며 농무의 흥취도 담고 있다.
‘가을’은 ‘선비춤’ ‘장구춤’ ‘소고무’ ‘오고무’가 담긴 절정이다. ‘선비춤’은 기존의 ‘한량무’와 ‘동래학춤’을 조합한 구성으로 한량의 풍류를 묘사하는 집단과 도포 소매를 학의 날개처럼 펄럭이며 도약하는 집단이 함께하는 대규모 군무다. 정형화된 남성 춤 기교를 나열하며 부채를 동시에 펴는 리듬감이 특히 매력적이다. ‘장구춤’은 고전적 느낌이 강하다. 농악의 설장구 장단 때문일 것이나 춤과 연주를 접목한 방식에도 섬세한 정형미가 있다. ‘소고춤’은 남성들의 개인기 자랑을 위한 장이다. 추임새가 요란한 가운데 앉아 걷기·재주넘기·공중제비를 반복하며 관객의 갈채를 유도했다. ‘오고무’의 회전무대 효과는 이번 예술의전당 공연에서 더욱 빛났다. 흰 저고리에 노랑치마를 입고 일렬로 등장한 여성군무는 쉼 없이 돌아가는 무대에서 정교한 손놀림을 드러냈다. 다양한 연주기법으로 최고의 기예를 자랑하는 타고난 춤꾼들의 향연이다. 나긋나긋한 기방춤, 열기 넘치는 민속무, 정교한 북 가락이 어울린 명작이다.
‘겨울’은 강선영류 ‘태평무’ 춤사위를 사용한 ‘신태평무’로 채웠다. 여자는 빨간 원삼, 남자는 파란 관복을 입고 모두 흰색 한삼을 착용했다. 첫 장면의 궁정 분위기를 되살린 화려한 대단원이다. ‘태평무’는 1930년대 후반에 한성준이 경기도당굿의 일부를 보고 만든 춤이다. 그것을 제자 강선영이 재현해 1988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고, 이번 무대에서는 조흥동이 군무로 구성해 박을 사용하는 등의 장식을 더했다. 오늘날 공연되는 한국무용은 거의 모두 이러한 변형을 거쳐 정착되었다. 따라서 기존의 소품을 모아 공연하는 ‘향연’과 같은 형태의 작품은 안무자의 창의성보다는 전통화된 춤집의 깊이와 작품별 정돈 수준을 먼저 살펴야 한다.
‘발레 춘향’, 고난도 기교와 구성의 조화
2007년 초연된 유니버설발레단의 ‘발레 춘향’은 창단 30주년이던 2014년에 거의 신작처럼 수정되었다. 기존의 창작 음악을 차이콥스키 모음곡으로 바꿨고, 장면 전환을 영상으로 처리해 큰 효과를 얻었으며, 의상도 훨씬 다양하고 화려해졌다. 예술감독 유병헌의 대표작으로 급부상한 ‘발레 춘향’(6월 9·10,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은 휘몰아치는 감정표출 기법을 사용한 드라마틱 발레다. 월매, 남원부사, 향단과 방자까지도 대본에 이름이 없을 정도로 춘향과 몽룡에게 집중해 요점을 강조했다.
막이 오르면 창호지 격자문 세트와 동양화 영상이 한국적이다. 기생집에는 꽃 그림, 도령의 공부방에는 대나무 그림을 띄워 두 집안의 상황을 설명한다. 춘향과 몽룡의 2인무는 시종일관 볼거리 제시에 주력했다. 흰 부채를 두 손으로 들어 올린 빠른 회전 피루엣 앙 드오르, 공중 회전기가 화려한 신방 파드되는 두 스타 강미선, 이현준(9일) 덕에 더욱 빛났다. 아들의 사랑에 반대하는 양반 아버지, 이별 통보를 받고 땅을 치는 기생 어머니, 운명적 힘을 암시하는 여성 군무 18인의 혼란스러운 등퇴장 등 군더더기 없는 명확한 전개가 돋보인다.
2막은 과거시험장에서 시작된다. 빨간 홀을 손에 든 대신들이 도열해 있고 도포와 갓을 착용한 선비들이 대형 붓을 들고 도약한다. 그들이 어사화를 꽂고 행진하는 다음 장면에 더욱 화려하게 치장한 몽룡이 등장한다. 누더기로 갈아입는 몽룡을 보며 관객들은 이미 어사출두의 기쁨을 공유한다. 남원에서의 기생 점호는 여성 솔리스트들을 경쟁시킨다. 장구·수건·부채를 든 기생들이 차례로 변사또의 기분을 살피는 기량이 모두 뛰어났다. 악역 변사또는 ‘스파르타쿠스’의 크랏수스처럼 선악의 대결을 넘어선 매력을 지녔다. 놀라운 높이의 도약은 물론 매 회전에 강세를 두어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으로 춤 속에 극을 담았다. 안무자는 이밖에도 대중적 호응도를 자신 있게 예견했다. 군졸들이 춘향을 차례로 던지고 받으며 학대를 극대화하고, 매질을 의미하는 푸에테(fouetté)를 매질 장면에서 행하며, 장검을 든 망나니와 어사의 부하들이 대립하는 포즈 등을 제시했다. 보통은 여기서 막을 닫지만, ‘발레 춘향’은 흐름의 완성도에도 유념했다. 몽룡의 등장에 기절했던 춘향이 다시 깨어나 그간의 고초를 떠올리는 묘사로 해피엔딩을 더욱 부각한다.
국립무용단의 ‘향연’과 유니버설발레단의 ‘발레 춘향’은 1930년대부터 지속해서 탐구해온 ‘한국적’ 창작의 결정판으로 소개할만하다. 민속춤과 궁정의식의 무대화 작업이 그간 여러 형태로 공연되었으나 ‘향연’은 보다 통합적이고 정돈된 구성을 자랑한다. 발레 창작에서는 고난도 기교 제시와 구성의 완결성이 오랜 과제였다. 설화 소설을 다룬 스토리텔링이라는 전제 아래서 ‘발레 춘향’은 모든 요소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문애령(무용평론가) 사진 국립극장·유니버설발레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