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으로 세계의 이목을 끈 러시아, 마린스키의 별도 높이 떠올랐다
2018 러시아 월드컵 기간, 모스크바 볼쇼이극장과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극장은 각각의 이벤트로 대회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볼쇼이는 7월 14일 결승전 전야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잔니 인판티노 FIFA(국제축구연맹) 회장을 주빈으로 오페라 갈라 공연을 열었다.
볼쇼이 오페라 음악감독 투간 소히예프의 지휘로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 네트렙코-에이바조프 부부가 주축을 이뤘고 볼쇼이 오페라의 베테랑인 소프라노 히블라 게르츠마바 소프라노, 베이스 일다르 압드라자코프베이스가 출연했다. 월드컵 갈라의 단골곡 ‘공주는 잠 못 이루고’는 테너 파비오 사르토리가 불렀으나 1990년 스리 테너 콘서트에서 파바로티가 전한 감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린스키극장은 예술감독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월드컵 개막 전야제 공연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지휘하고 러시아 대표팀의 선전을 기원하는 인터뷰를 가졌다. 마린스키 오페라 소속의 인민 예술가 바리톤 바실리 게렐로가 러시아 월드컵 홍보대사로 바람을 잡았고, 월드컵 기간 열린 마린스키 ‘백야의 별’ 축제(5월 23일~7월 29일)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홍보대사인 박지성을 비롯해 축구계 인사들도 대거 참석했다.
마린스키 발레의 수석 무용수 김기민은 7월 8일 콘스탄틴 세르게예프 버전 ‘백조의 호수’에 남자 주역 지그프리트로 출연했다. 파트너 오데트/오딜 역은 2014년 마린스키 영국 투어에서 ‘한여름 밤의 꿈’ 파드되로 현지 언론의 극찬을 받은 나데즈다 바토예바가 맡았다.
김기민의 취향은 보다 강인한 캐릭터를 선호하지만, 지그프리트는 김기민과 밀접한 인연의 배역이다. 2010년 고양아람누리에서 열린 마린스키 ‘백조의 호수’ 공연을 나란히 앉아 관람하며 마린스키 발레 감독 유리 파테예프의 눈에 들었고, 2012년 마린스키 발레, 2017년 마린스키 연해주 프리모르스키 발레 내한에도 지그프리트를 맡았다. 2014년 마린스키 런던 투어, 2015·2018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발레 런던 투어도 마찬가지다.
8일 김기민이 보여준 지그프리트 연기는 왜 파리 오페라와 아메리칸 발레시어터의 수뇌진이 김기민의 활동에 주목하는지 입증하기에 충분했다. 초절 기교를 갖고 있지만 테크닉을 남용하지 않는 절제력으로 클래식 발레의 품격을 드높이는 특유의 미덕이 여유로운 회전에 묻어났다. 르브론 제임스에 육박하는 가공할 점프 높이에도 파트너링 본연의 임무를 명찰하며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는, 현대 발레에서 점점 희귀해지는 댄서다. 183cm의 신장이 러시아에서 큰 편이라고 할 순 없지만, 발레 예술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긴 팔다리를 선용하는 김기민 고유의 방법론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한창 무르익었다.
글 한정호(공연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