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 IS NOW
뜻깊은 바이올린 독주 무대에서 전한 그녀의 음악, 그리고 인생 이야기
바이올리니스트 김유미(동덕여대 교수)를 인터뷰 했던 건 10년 전 즈음이었다. 당시 그녀는 젊고 예쁜 외모는 물론 뛰어난 음악성으로 다양한 무대에서 주목받고 있었다. 이후 동덕여대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그녀의 소식을 종종 들었지만 만날 기회가 없이 지나고 말았다. 얼마전 다시 만난 김유미는 어느덧 깊은 눈을 가진 아름다운 분위기의 여인으로 변해 있었다. 6월 14일, 그녀는 오랜만에 선사한 독주 무대에서 흠잡을 때 없는 테크닉에 따뜻한 숨결을 더해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음악을 대하는 태도는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져요. 올해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지 25년이 되는데, 학생들에게도 음악에 대한 경외하는 마음, 진실한 자세를 보여야 좋은 가르침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어 테크닉은 조금씩 느려질 수 있겠지만 정말 중요한 건 음악에 대한 진정한 마음이니까요. 전 40대 중반이 되어서야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어요. 연주를 잘하는 것과 연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걸 조금은 늦게 깨달은 거죠.”
드보르자크와 그리그, 레스피기를 연주했던 6월 14일 독주회는 그녀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동안 3년 정도 건강이 좋지 않아 연습하기 힘든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연주를 하고 싶어도 몸이 아파 하지 못할 땐 정말 깊은 절망감이 느껴졌어요. 하지만 하고 싶은 음악이 있었기에 그 시간도 견뎌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어린 나이 때는 내가 돋보이는 무대에 서는 걸 좋아했었죠. 그런데 갑자기 어려운 일들이 다가오니까 ‘내가 정말 왜 음악을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되더군요.”
그녀는 건강을 돌보며 교단에서, 또는 무대에서 좋은 사람들과 실내악 연주도 하며 몸과 영혼을 정화시킬 수 있었다.
“음악은 길게 봐야 할 것 같아요. 자신에게 주어진 것 안에서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죠. 전 연습하는 시간을 참 좋아해요. 그 시간에 마음이 가장 고요해지고, 연습을 하면서 내가 왜 지금 음악을 하며 살고 있는지 그 답을 얻게 되는 것 같아서요.”
예원학교와 서울예고를 거쳐 서울대 음대, 미국 줄리아드 음악원을 졸업한 그녀는 현재 동덕여자대학교 관현악과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양성과 연주 활동을 하고 있다. 6세 때 인천시립교향악단이 주최하는 전국음악콩쿠르에서 1위를 수상하며 국내 음악계에 주목을 받기 시작한 김유미는 육영·이화경향·한국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 콩쿠르 입상, 예음실내악 콩쿠르 대상을 수상하며 뛰어난 음악성을 인정받았다.
서울시향, 인천시향 등과의 협연,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 및 실내악축제, 11시 콘서트에서 대중과도 꾸준히 소통해 왔으며 줄리아드 풀홀, 링컨센터 알리스 틸리홀, 머킨 콘서트홀 등에서의 독주와 실내악 연주를 통해 호평받았다. 또한 서울바로크합주단, M Trio, 서울 피아노 트리오, 늠 챔버 앙상블의 멤버로 실내악 활동도 활발히 해 왔다. 국내는 물론 미국·유럽·중국·일본·동남아 등 해외연주와 페스티벌 참가, 대학 초청연주, 마스터 클래스와 음반작업에 참여하는 등 지금도 폭넓은 영역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올 하반기에도 KT 실내악 공연, 닥터만 하우스콘서트 등 꾸준한 연주활동을 펼칠 그녀는 2018년 9월 29일 노인경(Vc), 이소정(Pf)과 함께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에서 연주회를 갖는다. 김유미·노인경·이소정은 1987년 ‘객석’에서 주최한 예음실내악 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은 트리오로, 이후에도 각자 교단과 무대에서 자신들만의 음악 세계를 전해 왔다.
“30년 넘게 이어온 우정을 다시 무대에서 음악으로 나눌 수 있게 되다니 얼마나 행복하던지요. 콩쿠르 때 연주했던 스메타나 트리오를 그날 다시 연주할 예정인데 벌써부터 떨리고 설레네요. 우리가 30년 동안 쌓아온 이야기들이 어떤 음악으로 표현될지 저도 기대가 많이 됩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음악이 좋아지는 건 그 안에 제 모습이 스며들어있기 때문이겠지요.”
화려함과 속도가 세상을 지배하는 지금. 그녀의 말처럼 내면의 성찰은 인생의 속도를 조절하며 조금 천천히 우리 삶을 흘러가게 한다. 음악 역시 그 내면을 들여다보지 못한다면 연주자도 청중도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의 음악만을 만나게 될지 모른다.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가 예술로 표현될 때의 기쁨. 그 순간이야 말로 자신을 만나는 시간이다.
김유미의 음악이 아름다웠던 것도 그것이 진정한 자기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따뜻한 숨결이 더해진 그녀의 연주는 그렇게 시간의 공백을 넘어 사람들 마음 속으로 스며들었다.
글 국지연 기자
김유미 바이올린 독주회 리뷰
6월 14일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
연주회에는 저마다의 결이 있다. 연주자와 선별된 곡이 어우러져 뿜어내는 고유한 기운은 그 연주회만의 시그널이다. 완성된 작품을 청중이 듣는 순간, 그 시그널은 객석을 채운 숫자만큼 다채로운 해석 버전을 지니기 마련이다. 같은 연주를 경청해도 A에겐 구원의 메시지로 읽히고, B는 안온함과 따사로움을 감지한다.
지난 6월 14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바이올리니스트 김유미 독주회가 필자에겐 ‘여자의 일생’ 같은 서사로 다가와 특별함이 더했다. 연주는 드보르자크의 4개의 낭만적 소품 Op.75, 그리그의 소나타 2번, 레스피기의 소나타 P110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드보르자크의 곡은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청춘의 송가마냥 자유로운 감성이 가득했다. 부제 ‘카바티나’ ‘카프리초’ ‘로망스’ ‘엘레지’로 이어지는 각 장은 흡사 생기발랄한 청춘의 춘하추동을 그려내는 듯했다. 김유미는 경쾌하면서도 부드러운 현의 터치와 역동적인 활시위로 감정의 스펙트럼을 넘나들었고, 사랑을 잃은 슬픔마저 감미롭게 구현해냈다.
이어진 그리그의 소나타는 향토색과 민족주의 색채가 강렬한 곡이었다. 변화무쌍한 젊은 날을 보내고, 인생의 변곡점을 지나, 단단한 내공을 지닌, 옹골찬 중년 여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곡에서 주선율인 바이올린과 반주로 받쳐주는 피아노 기교는 극대화에 이르렀다. 파워풀하면서 절도있는 현의 움직임과 현란한 테크닉이 조화를 이루었다. 마치 견고하게 세운 건축물 내부에 품격있고 섬세한 인테리어로 포인트를 주듯.
마지막 레스피기의 소나타는 연주회의 화룡정점이었다. 대체불가한 노련함과 원숙미가 작품 곳곳에서 뿜어져 나왔다. 초반에는 정교하고 치밀한 음색이 주를 이루었고, 후반부로 갈수록 일획일점까지 모두 소진하고 산화하겠다는 결연함과 카리스마가 넘쳤다. 카오스적 혼돈 속에서도 코스모스적 질서가 느껴지는 곡이었다. 바이올린 선율과 피아노 멜로디가 합일과 교차를 반복하며 색다른 세계로 인도했다. 범위를 가늠할 수 없는 우주의 광활함이 연상되면서 완전함에 가까운 그 무량무변한 세계에 숙연해지고 겸손해졌다. 노년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다다르는 성찰의 경지를 엿보았다면 과장일까.
세 작품의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음에도 바이올리니스트 김유미는 맞춤옷을 입은 것처럼 곡마다 본래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공연이 끝난 후에도 연주회장은 대하서사시 같은 묵직함이 지속되었고, 청중은 뜨겁게 호응했다. 그런 무게감을 덜어내기 위함이었을까. 앙코르곡은 로맨틱한 파가니니의 ‘칸타빌레’를 선보였는데, 종국에 필자는 짧은 로맨스물을 읽은 듯한 달달함을 머금고 연주회장을 나왔다.
글 이재연(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