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페미니즘연극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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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8월 1일 12:00 오전

‘객석’ 필자들이 꼽은 화제의 무대

 

‘이번 생에 페미니스트는 글렀어’ ©전진아

 자, 이제 함께 달려볼까?

지금은 참으로 당연한 일인데, 여성과 관련된 그 최초의 기록을 찾아보면 놀랄 때가 많다. 대부분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가까운 과거들이기 때문이다. 스포츠 종목 중 여성 마라톤만 봐도 그렇다. 올림픽이 근대스포츠로 재단장할 때부터 그 기원처럼 자리 잡고 있는 마라톤이기에 당연히 여성 마라톤도 함께 시작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마라톤 경기에서 여성 마라톤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것은 1972년, 올림픽의 공식 종목이 된 것은 1984년 LA 올림픽 때이다. 40킬로미터 이상의 장거리를 뛸 수 있는 건 남성뿐이라 여겨졌고, 여성은 남성처럼 변장을 하고 이름을 바꾸는 등 여성임을 숨긴 채 참가했다. 1967년 캐서린 스위처는 가명을 사용하고 코치의 도움을 받아 참가신청을 할 수 있었고, 당당하게 여성임을 드러낸 채 보스톤 마라톤 코스를 달렸다. 제지하는 주최 측을 막아주는 남자친구와 코치 덕분에 4시간 20분의 기록으로 완주하며 공식적인 첫 여성 마라토너로 기록되었다. 캐서린의 달리기는 여성 마라톤 종목을 공식화하는 데에 결정적인 계기였다.

제1회 페미니즘연극제(6월 20일~7월 29일)를 살펴보는 자리에서 여성 마라톤 이야기가 길어진 것은 그 모습이 서로 무척이나 닮아있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페미니즘을 내세운 기획과 공연들이 있었지만 간헐적이고 소규모였기에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번 연극제는 기획 단계부터 텀블벅 모금을 통해 관객의 지지와 동참을 이끌어냈고, 10여 편의 참가작과 참가단체의 스펙트럼이 다양하며, 무엇보다 미투 운동 이후 변화된 연극계의 분위기를 응집시켜내고 있다는 점에서 공식적인 1회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관습적인 시선에 아랑곳 않고 묵묵히 달리는 여성 마라토너가 던져주는 묵직한 울림이 이번 연극제 작품들과 공명한다. 현재까지 공연된 5편의 작품 중에서 창작배경과 주체 등 모든 것이 다르지만 기막히게 닮은 두 작품, ‘이번 생에 페미니스트는 글렀어’(공동창작, 이오진 연출)와 ‘환희, 물집, 화상’(지나 지온프리도 작, 김희영 연출)을 통해 페미니즘 연극에 눈과 귀를 모아 보자.

 

 

‘이번 생에 페미니스트는 글렀어’ ©전진아

우리에게도 역사가 있다

‘이번 생에 페미니스트는 글렀어’는 지옥과 지은이라는 두 여성을 통해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고된 현실을 보여주며, ‘환희, 물집, 화상’은 독신 커리어우먼과 전업주부가 서로 삶을 바꿔 살려고 하지만 결국은 오래된 일상의 관습으로 되돌아오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두 작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세대별 인물의 배치로, 이는 페미니즘이 느닷없이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 긴 시간을 지나며 진행되어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번 생에…’에서는 연출가 이오진의 어머니가 인터뷰 영상에 등장하는데, 이것은 이른바 ‘신의 한 수’다. 연극하는 지은과 연애하는 지옥이 말하는 현재의 페미니즘에 대해 맥락과 역사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흔하지 않았던 페미니스트로서 살아온 어머니의 무덤덤한 이야기가 곧 우리나라 페미니즘의 역사이고, 다 자란 딸이 “그래서, 나 결혼할까?”하고 물어볼 때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우리가 대면하는 페미니즘의 현실이다. 지은과 지옥이 씨줄이라면 어머니의 인터뷰는 날줄이 되어 페미니즘을 입체화한다.

‘환희, 물집, 화상’ ©김희지

‘환희…’는 40대 캐서린과 그웬, 캐서린의 엄마 앨리스, 20대 초반 에이버리를 배치함으로써 세대별 인식과 태도가 어떻게 다른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페미니즘에 관심도 없었던 앨리스, 페미니스트로서 적극적인 저술활동을 하고 있지만 삶이 헛헛한 대학교수 캐서린, 적극적이고 직설적인 에이버리는 페미니즘에 대한 세대별 차이를 보여주는 척도이다. 용감하고 씩씩한 페미니스트 에이버리는 앨리스와 캐서린의 시간을 거쳐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인상적인 것은 다른 세대의 인물들이 자신의 가치관에 대해 가감 없이 솔직한 대화를 나눈다는 점이다. 자신의 가치관이 옳다고 고집을 피우거나 상대방의 사고방식을 비난하거나 그것을 교정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서로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그것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말하며 각자의 차이를 인정하고 공유하는 모습은 그 자체가 이미 페미니즘이다. 가장 고루할 것 같은 노인 앨리스가 ‘자신의 독립을 위해 애쓴 여성들이 치러야 할 대가는 자유’라고 말하는 마지막 장면은 토론과 공유의 과정이 축적되었기에 시원한 청량감을 안겨주었다.

 

 

‘환희, 물집, 화상’ ©김희지

연대와 소통, 공감의 페미니즘

‘환희…’의 작가 지나 지온프리도는 ‘베키쇼’에서 인상적인 여성 캐릭터 베키를 만들어낸 것처럼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도 생생하고 매력적으로 그려냈다. 서로 상반된 삶을 살면서 서로를 동경하는 캐서린과 그웬이 그 위치를 바꾸는 설정은 장난스럽지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은 매우 현실적이다. 특히 페미니즘에 대한 찬성과 반대 입장을 캐릭터의 삶과 결부시켜 체험적으로 관객들에게 제시하는 것은 영리하고 효과적인 장치였다. 이론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르냐를 떠나, 여성을 둘러싼 오랜 일상의 관습 자체가 문제일 수 있다는 각성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개성 있는 캐릭터 창출과 조화로운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과, 적재적소에 영상을 배치한 김희영 연출의 감각도 돋보인다. 그러나 상반된 입장을 위해 커리어우먼과 전업주부로 구분한 것은 이미 익숙해 갈등의 결과가 쉽게 예측되다보니, 극중 개연성은 있지만 동시대적 현실감은 약했다.

‘이번 생에…’는 ‘행복한’ 페미니스트는 글렀을지라도 페미니스트임을 부정할 수 없는 젊은 연극인들의 연대와 고군분투가 무대에서 객석으로 고스란히 전이된 작품이었다. 연극하는 지은(경지은 분)은 무대 오른편에 세워진 철제 구조물을 끊임없이 오르내리며 미투 이후 연극계의 분위기 고민들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고, 연애하는 지옥(성수연 분)은 애인과의 관계를 통해 사회적 고정관념으로서의 페미니즘 실체를 형상화했다.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특정 혐오사이트 사용자로 단정하여 비난하거나, 아예 관심도 없거나, 실체는 모르면서 짜증부터 내는, 페미니스트가 겪어내는 일상이 고스란히 그려졌다. 지옥의 파란 실크드레스가 반짝거리고 아름다우면서도 걸리적거리고 무대 전체에서 겉도는 것은 그 자체가 페미니즘/페미니스트로 은유되었기 때문이다. 커리어우먼과 전업주부라는 여성 사이의 편 가르기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연대하는 연극적 행동으로서의 페미니즘연극제는 긴긴 마라톤에 첫발을 떼게 만든 출발신호다. 이제 신호는 울렸고, 마라톤 주자들은 함께 어울려 즐겁게 결승선을 향해 달려가면 된다. 누가 봐주지 않아도, 선두권보다 한참을 뒤쳐져도 서로를 다독이고 격려하며 달려가면 된다. 우리 연극이, 페미니즘 연극이 지치지 말고 더 많은 연극인들을 불러 모으며 그렇게 달려가면 좋겠다.

글 배선애(연극평론가)

사진 페미니즘연극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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