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작곡가 에사 페카 살로넨

21세기 하이브리드 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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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9월 17일 12:00 오전

COVER STORY


©Clive Barda

핀란드 출신의 에사 페카 살로넨은 지휘와 작곡이라는 두 가지 영역에서 강한 존재감으로 빛나고 있다. 2008년 이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10년 만에 내한하는 살로넨. 클래식 음악계에 우아한 혁신을 일으키는 그의 움직임을 가까이에서 마주할 기회다

글 이정은·정원 기자·송준규(음악 칼럼니스트) 진행 이미라 기자

 

‘하이브리드(Hybrid): 두 가지 기능이나 역할이 하나로 합쳐짐’

자신이 작곡한 작품을 지휘하는 것이 과거에는 당연한 일이었으나, 구스타프 말러 이후로 자취를 감췄다. 작곡가는 작곡가의 정체성에, 지휘자는 지휘자의 역할에 충실해도 국제적인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현실이다. 하물며 두 가지를 다 수행하기란, 메인과 서브를 가르지 않고서야 쉽지 않다.

에사 페카 살로넨(Esa-Pekka Salonen, 1958~)의 존재는 그래서 더욱 빛난다. 핀란드 출신 지휘자이자 작곡가인 살로넨은 두 영역 모두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강력한 하이브리드 기능을 갖춘, 그러면서도 기품을 잃지 않는, 우리 시대의 이상적 음악가다.

2008년 10월 이후 정확히 10년 만에 다시 내한하는 살로넨은 그가 10년째 이끌고 있는 필하모니아와 무대에 오른다. 10월 18일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바이올리니스트 에스더 유 협연)과 스트라빈스키 ‘불새’를, 10월 19일 라벨 ‘어미거위 모음곡’과 번스타인 교향곡 2번 ‘불안의 시대’(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협연), 버르토크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을 선보인다.

 

지휘자 살로넨, 멈추지 않는 혁신

1958년 핀란드에서 태어난 살로넨은, 핀란드의 저명한 음악가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헬싱키의 시벨리우스 음악원에서 피아노·호른·작곡·지휘를 공부했다. 거장 지휘자 요르마 파눌라(Jorma Panula)의 문하에서 수학한 그는 1979년 핀란드 방송교향악단 지휘자로 데뷔했다. 그의 나이 21세의 일이다. 1983년은 살로넨 음악 인생의 중요한 기점이다. 동시대 음악의 활성화를 중요하게 생각한 살로넨은 지휘자 유카 페카 사라스테, 플루티스트 오일리 포흐욜라(Olli Pohjola)와 함께 현대음악 연주단체인 ‘아반티 체임버 오케스트라(Avanti! Chamber Orchestra)’를 결성했다. 크고 작은 편성으로 다양한 현대음악을 연주하며, 작곡가 카이야 사리아호, 지휘자 수잔나 멜키, 피아니스트 이매뉴얼 액스 등과 현재까지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단체다. ‘현대음악의 수호자’ 살로넨은 이렇듯 자신의 지향점을 일찍부터 드러냈다.

같은 해 9월 29일, 그 유명한 ‘필하모니아 대타 지휘’ 사건이 일어난다. 마이클 틸슨 토머스가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말러 교향곡 3번을 지휘하기로 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갑작스럽게 불참하게 된 것이다. 부랴부랴 대타 지휘자를 찾던 경영진은 살로넨의 지휘 영상을 보고 그를 낙점했다. 런던에 날아온 25세의 핀란드 젊은이, 심지어 말러 3번의 악보를 그때서야 처음 접했지만, 살로넨은 그날 밤 청중과 필하모니아 단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대타로 스타가 되는’ 성공 방정식의 드라마틱한 예다. 이 공연을 계기로 살로넨은 1985년부터 필하모니아의 수석객원지휘자로 활동하며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이 역사적인 밤의 객석에는 LA 필하모닉 관계자도 있었다. 깊은 인상을 받은 LA 필하모닉은 살로넨에게 객원 지휘를 제안했고, 이듬해인 1984년 살로넨은 LA 필하모닉 지휘로 미국 데뷔를 치렀으며, 몇 년간의 수석객원지휘자 기간을 지나 1992년 LA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으로 부임해 2009년 여름까지 활동했다.

LA 필하모닉과 살로넨은 17년 동안 서로 시너지를 내는 관계였다. 현대음악에 열성적이었던 살로넨은 LA 필하모닉과 함께 동시대 레퍼토리 초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캘리포니아 분위기’에 유럽 동시대 감각이 이식되면서 LA 필하모닉은 한층 도약했다. 현재 LA 필하모닉이 상주하는 공연장인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2003년 개관)의 건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도 살로넨이었다. 자유로운 도시 로스앤젤레스에서 살로넨은 이전과는 다른 음악적 영감을 얻어 한동안 뜸했던 작곡 활동을 의욕적으로 재개했고, 현재 LA 필하모닉의 계관지휘자로서 여전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983년 9월 29일, 필하모니아, 말러 3번’이라는 작은 날갯짓이 만든 태풍은 LA를 거쳐 런던에 상륙했다. 2008년 가을, 살로넨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 겸 예술고문으로 부임해 현재까지 필하모니아를 이끌고 있다. 런던에서도 살로넨은 18~19세기 레퍼토리를 소홀히 여기지 않으면서도 동시대 음악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고 있다. 지난 4월에는 진은숙 ‘별들의 아이들의 노래’의 유럽 초연을 선보인 바 있다.

살로넨은 이와 같은 시대적 측면, 즉 종(縱)적인 차원의 레퍼토리 확장뿐 아니라 횡(橫)적인 영역 개척에도 적극적이다. 필하모니아는 애플사와 함께 아이패드(iPad)용 애플리케이션 ‘오케스트라(The Orchestra)’를 개발했다. 오케스트라에 속하는 각 악기를 설명하는 교육 콘텐츠인데, 살로넨 자신도 ‘지휘자’ 역할로 출연한다. 오케스트라를 둘러싼 다방면의 활성화를 꾀하는 그의 이러한 노력을 ‘우아한 혁신’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작곡가 살로넨, 동시대와 연결된 소리

살로넨의 공식 웹사이트(www.esapekkasalonen .com)에서 그의 연주 일정을 보면 한 가지 독특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각 공연명의 위에 ‘작곡가(Composer)’ 또는 ‘지휘자(Conductor)’가 명기되어 있는데, 살로넨이 지휘하는 공연에는 ‘지휘자(Conductor)’가, 그의 작품이 연주되는 공연에는 ‘작곡가(Composer)’가 표시되어 있다. 자신의 작품을 직접 지휘하는 공연은 ‘작곡가, 지휘자(Composer, Conductor)’라고 표시된다. 자신의 지휘가 아니더라도, 살로넨의 작품은 매우 자주 연주되고 있다. ‘지휘자의 외도’ 수준의 활동이 아닌, 활발히 활동하는 동시대 작곡가로서 살로넨은 존재하고 있다.

 

Q. 오늘날 생존하는 음악가 가운데 작곡가와 지휘자로서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어떻게 작곡과 지휘를 같은 수준으로 유지하며 병행하는가?

A. (웃음) 아주 어려운 질문이다. 물론 두 가지를 비슷한 수준으로 병행한다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다. 특히 시간 관리 면에서 힘들다. 시간 관리에서 작곡과 지휘는 매우 다른 일이기도 하다. 우선 지휘 측면에서 나의 삶은 매우 구체적으로 계획돼 있다. 나의 매니지먼트와 공연장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고, 스케줄이 이미 정해져 있기에,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든 것이 마치 기계처럼 정확하게 돌아간다. 그러나 작곡은 정반대다. 작곡을 하는 동안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외로운 작업이다. 작곡에 있어 모든 것은 전적으로 내게 달려 있다. 시간을 관리하는 것도 나 자신이고. 그럼에도 어려운 점은 ‘지금은 작곡을 할 때다’ 혹은 ‘지금은 지휘를 할 때다’라고 말하면서 작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략) 에너지를 사용하는 면에서도 둘은 정반대다. 작곡은 느리고 외로운 작업인 반면, 지휘는 항상 사람들을 대하며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는 작업이다. 한동안 작곡을 하다가 지휘를 하게 되는 때는 첫 연습 뒤에 상당히 피곤함을 느낀다. 오케스트라에 에너지를 쏟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예전보다 지휘 활동을 줄여서 작곡할 시간을 더 얻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시간 관리는 어렵다. (중략) 결국 끊임없는 시간과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객석’ 2016년 2월호, 재불 음악평론가 김동준과의 인터뷰

 

2년 전 인터뷰에서도 나타나듯, 살로넨은 의도적으로 작곡을 위한 시간과 에너지를 마련하고자 애썼다. LA 시절은 그의 작곡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선율과 화성 등 기존의 음악요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당시 유럽 음악계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사고로 음악을 풀어낼 수 있게 됐다. 이 시기에 ‘LA 베리에이션(LA Variations, 1996)’ ‘불면증(Insomnia, 2002)’ 등 그의 주요 작품들이 대거 작곡됐고,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개관 기념으로 작곡한 ‘윙 온 윙(Wing on Wing, 2004)’은 날개를 펼친 듯한 공연장의 외관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2015~2018년 세 시즌 동안 살로넨은 뉴욕 필하모닉 상주작곡가로 임명되며 작곡가로서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드러냈다.

2018년 2월 LA 필하모닉은 살로넨의 60세 생일을 기념하며 열흘에 걸쳐 첼로 협주곡(2016)·피아노 협주곡(2007)·바이올린 협주곡(2009)·‘윙 온 윙(2004)’ 등 살로넨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각 협주곡의 초연을 맡았던 요요마, 예핌 브론프만 등이 다시 연주를 맡아 의미를 더했다. 핀란드에서 런던으로, LA로, 다시 런던으로. 작곡가로, 그리고 지휘자로.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혁신을 멈추지 않는 살로넨은 지금 이 시대가 원하는 진보적인 음악가상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다. 음악의 바다를 거침없이 항해하는 살로넨의 현재 좌표를, 10년 만에 한국에서 다시 만나는 그의 무대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글 이정은 기자 사진 마스트미디어

 

 

 

 

 

 

 

작곡가 에사 페카 살로넨의 주요 작품

관현악곡 ‘LA 베리에이션(LA Variations, 1996)’① ‘갬빗(Gambit, 1998)’ ‘포리언 바디스(Foreign Bodies, 2001)’ ‘불면증(Insomnia, 2002)’‘헬릭스(Helix, 2005)’② ‘닉스(Nyx, 2011)’ ‘폴룩스(Pollux, 2018)’

협주곡 ‘알토 색소폰 협주곡(1980)’ ‘미모 2(Mimo Ⅱ, 1992)’ ‘매니아(Mania, 2002)’ ‘윙 온 윙(Wing on Wing, 2004)’③ ‘피아노 협주곡(2007)’ ‘바이올린 협주곡(2009)’ ‘첼로 협주곡(2016)’

실내악곡 ‘사포의 5가지 잔상(Five Images After Sappho, 1999)’ ‘캐치 앤 릴리즈(Catch and Release, 2006)’

에사 페카 살로넨/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

10월 18일 오후 8시 롯데콘서트홀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협연 에스더 유), 스트라빈스키 ‘불새’ 10월 19일 오후 8시 롯데콘서트홀 라벨 ‘어미거위’ 모음곡, 번스타인
교향곡 2번 ‘불안의 시대’(협연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버르토크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에사 페카 살로넨과 함께 내한하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그들의 위기와 극복의 역사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Felix Broede

세계 최초의 녹음 전문 오케스트라로 창단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현재 영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수준의 콘서트 오케스트라다. 880만 인구의 대도시 런던은 그에 걸맞게 세계적인 수준의 콘서트 오케스트라를 여럿 보유하고 있다. 백 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런던 심포니를 필두로 런던 필하모닉·BBC 심포니·로열 필하모닉, 그리고 1945년 창단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각자의 개성과 고유 영역을 발전시키며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여전히 런던은 유럽 문화와 음악 산업의 중심지로서 콘서트 오케스트라에 대한 상당한 수요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비슷한 수준의 오케스트라들이 너무 많이 모여 있어 빈이나 파리, 암스테르담 등의 경쟁 도시들과 비교해 문화 예산의 낭비와 지나친 경쟁을 불러일으킨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사실 이런 종류의 비판은 필하모니아의 창단 초기에도 이미 제기되었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시작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며 HMV(훗날의 EMI)의 명 프로듀서 월터 레그는 녹음 전용 오케스트라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전쟁이라는 난리 통에 계획된 녹음 일자를 지키지 못하는 오케스트라가 속출했고, 런던 소재 오케스트라들의 전체적인 수준도 하락세를 면치 못했기 때문에 레그는 언제든 음반 녹음에 투입할 수 있는, 더 나아가 녹음만을 위해 조직된 탁월한 수준의 녹음 전문 오케스트라를 구상하게 되었고, 이런 계획을 토머스 비첨과 교환하며 구체화하게 된다. 레그와 비첨은 빈 필처럼 로열 오페라와 코벤트 가든의 오케스트라 단원을 모아 콘서트 오케스트라를 새로 구성하여 녹음 작업을 전담하게 하는 기획을 오페라 당국과 협의했으나, 이 기획은 위원회의 거부로 그들의 손을 떠나게 되었다. 그 대신 레그는 먼저 그가 전시에 책임을 맡았던 영국 공군 군악대의 단원들을 모아 필하모니아 현악 오케스트라를 결성하고, 여기에 레그와 비첨이 염두에 두었던 유명 관악 주자들과 타악기 주자들을 참가시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이하 필하모니아)를 창설한다. 1945년 10월 25일에 열린 필하모니아의 첫 연주회는 토머스 비첨이 지휘했으며, 그는 이 오케스트라의 초대 수석 지휘자가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레그의 고용인이 되면 상당히 축소된 권한만을 행사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염려한 비첨은 곧 필하모니아를 떠났으며, 이듬해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창단하게 된다.

이 시기 필하모니아는 음반사 소속의 녹음 전문 오케스트라로서 다른 런던 소재 오케스트라들과는 달리 정규 단체가 아니었으며, 이 점은 로열 필도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단원 중 일부는, 예를 들어 호른주자 데니스 브레인, 클라리넷의 레지날드 켈 등은 두 오케스트라에 동시에 소속되어 활동하였고, 이로 인해 두 오케스트라를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할 이유가 없다는 식으로 평론가들의 강력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게다가 월터 레그가 녹음 작업 이외의 활동을 강력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다른 경쟁단체들에 비해 연주회 숫자가 현저하게 적었고, 이 점은 오케스트라의 대외적인 명성을 높이는데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

하지만 비(非)나치화 문제 등으로 유럽 대륙에서 아직 확고한 포스트를 차지하지 못했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1948년부터 필하모니아를 지휘하게 되면서 곧 위와 같은 비판은 사라지고, 런던 최고의 콘서트 오케스트라라는 명성을 빠르게 얻으며 영광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애플 코리아

거장들과 함께 이룬 성장

카라얀은 그의 첫 번째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비롯해 상당한 수의 음반들을 필하모니아와 녹음했을 뿐만 아니라 1952년 유럽 순회공연과 1955년 미국 연주 여행을 이끌었다. 연주 여행 기간에 보여준 필하모니아의 합주력은 당시의 표준을 가뿐히 뛰어넘었으며, 이들의 연주력에 대해 저명한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시게티는 “완벽한 실내악 연주 수준을 초대형 오케스트라가 선보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첫 번째 사례”라고 극찬했다.

또한 이 시기 필하모니아 연주회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푸르트벵글러·토스카니니 등의 전설적인 거장들도 등장했다. 토스카니니는 이탈리아에서 이들의 연주를 듣고 감명을 받아 직접 런던으로 가서 지휘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고 바로 그해 9월, 이틀간의 연주회 동안 브람스 교향곡 전곡을 지휘했다. 이 기록은 토스카니니와 필하모니아의 유일한 만남이었다. 푸르트벵글러는 필하모니아와 몇몇 음반 녹음을 남겼는데, 특히 1952년 녹음한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아직도 그 명성이 퇴색되지 않은 불멸의 명연주로 기억되고 있다.

1956년에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음악감독을 맡게 되면서 그의 후임을 물색해야만 했던 레그는 마침 EMI의 전속 아티스트가 된 오토 클렘페러에게 이 역할을 맡기게 된다. 점점 거동에 어려움을 겪었던 클렘페러는 필하모니아와의 녹음 작업에 매진했으며, 1959년부터는 종신 음악감독 자리를 맡았다. 이들 콤비는 베토벤과 브람스의 교향곡 전집 등 클래식 음반 역사에 있어 기념이 될 만한 수많은 음반을 만들어냈다. 클렘페러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신예,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도 상당한 녹음과 연주회를 담당하며 필하모니아가 이룬 황금기의 한 축을 담당했다.

 

해체의 위기를 극복하고 특별함으로 무장하다

그러나 필하모니아의 황금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1960년대 초 이미 상당수의 관현악 작품들을 녹음하여 더는 새롭게 녹음할 레퍼토리가 남지 않게 되자 점차 그 횟수가 줄어들게 되었고, 판매량도 예전 같지 않아 수익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녹음 리허설 비용 등을 부담하고 있었던 레그는 자금의 압박에 시달리게 되었고, 1964년 음반사의 지원을 잃게 되자 필하모니아의 갑작스러운 해체를 선언해버리고 만다. 이에 반발한 단원들은 자체적으로 재창단을 선언하고,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의 자주 운영 악단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다행히 EMI와의 녹음 계약은 지속할 수 있었지만, 재정적 어려움은 해소되지 않았다. 이에 오케스트라는 음반 계약의 다변화로 위기 타개를 모색한다. 경쟁사였던 데카(Decca)와의 계약을 성사시켜 거의 60여 장에 이르는 음반을 새로 발매했으며, 이후 필립스·도이치그라모폰·RCA 등 여타의 음반사들로 계약 범위를 확대했다.

1973년 클렘페러가 타계하고 그 후임으로 리카르도 무티가 수석 지휘자에 취임했다. 무티는 클렘페러 시대의 다소 답답한 분위기를 일소하고 젊은 활기를 불어넣는 데 성공했다. 영국의 음악 평론가 리처드 모리슨은 “무티가 침체된 오케스트라를 위대한 앙상블로 바꾸어 놓았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연주회뿐만 아니라 차이콥스키 교향곡 전곡 등의 여러 관현악 음반, 그리고 ‘아이다’ ‘가면무도회’ ‘나부코’ 등의 빼어난 오페라 녹음들은 평론가들의 지지는 물론이고, 대중들의 열렬한 환호를 이끌어내며 명반으로 남았다.

1982년 무티가 수석 지휘자에서 내려와 밀라노로 떠나고, 1984년 필하모니아는 장고 끝에 주세페 시노폴리를 새로운 수석 지휘자로 임명했다. 도이치그라모폰과 150여 장에 달하는 녹음 계약을 가져온 그의 취임은 지극히 당연한 선택이었으며, 이를 통해 필하모니아는 80년대 내내 상당한 수익을 올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시노폴리와 함께 이룩한 음악적 성취에 대해서는 항상 격렬한 찬반양론이 있었다. 그래도 그가 필하모니아와 남긴 푸치니 ‘마농 레스코’, 베르디 ‘운명의 힘’ 등의 오페라 음반들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시노폴리와의 십 년의 애증 관계가 끝나고, 후임 수석 지휘자 선임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음반계약이 종결되면서 재정이 다시 급속도로 악화되었기 때문에 이를 타개할 인물이 필요했다. 결국 3년의 공백기를 가진 1997년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를 신임 수석 지휘자로 모셔왔지만, 음반사와의 계약은 끌어내지 못하면서 재정적으로 큰 도움을 주진 못했다. 다만 파리의 샤틀레 극장의 상주 악단으로 활동하며 ‘아라벨라’ ‘그림자 없는 여인’ ‘말 없는 여인’ 등의 오페라 작품들을 연주함으로써 오케스트라의 활동 영역을 넓힌 것은 그의 중요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2008년에 도흐나니가 물러나고 핀란드 출신의 에사 페카 살로넨이 새로운 수석 지휘자 겸 음악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살로넨은 필하모니아와 함께 콘서트 프로그램의 다변화를 꾀함과 동시에 어린이들과 학생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의 강화로 청중의 범위를 넓히는 작업을 지속해서 벌이고 있다. 이와 함께 단원들의 오랜 요구였던 활발한 음반 녹음 작업을 위해 시그넘(Signum)과 계약을 체결해 자주 제작 레이블의 형태로 새로운 음반 발매에 나서게 되었다. 또한 영화 OST 녹음 활동도 늘리고, 비디오 게임 등의 배경음악 녹음에도 진출하여 수익 확대를 꾀함과 동시에 새로운 청중들의 개발에도 매진하고 있다. 필하모니아는 일찍부터 유튜브 채널을 활용한 오케스트라에 속하며,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함으로써 현재 6만 명 이상의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다. 스마트폰용 전용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새로운 정보와 연주회 동영상 등을 제공하는 것도 필하모니아의 특별함 중 하나이다.

글 송준규(음악 칼럼니스트)

 

핀란드의 지휘자들
세계를 호령하다

한국에서 6,923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숲과 호수의 나라, 핀란드. 인구 5백만으로 서울 인구 절반에 미치는 숫자이지만, 너른 대지 위로 피어난 문화는 서리 낀 바람에도 달갑게 영글어 핀란드를 ‘지휘 강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교육열로는 우리나라와 1, 2위를 다투는 핀란드는 우수한 교육 제도를 바탕으로 꾸준히 세계적인 음악가들을 배출해 왔다. 핀란드의 아이들은 입학과 동시에 무상으로 악기교육을 받게 된다. 특히, 헬싱키에 위치한 시벨리우스 음악원은 핀란드 음악 교육의 중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유럽과 북미 지역에서 활약하며 거장으로 거듭나고 있는 핀란드 출신의 지휘자 대부분이 이곳을 거쳤다. 그중 일부는 이미 한국 무대를 찾은 적 있어 아마 낯익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글 정원 기자

©Kaapo Kamu, ©Marie Mazzucco, ©Jukka-Pekka Saraste, ©Benjamin Ealovega, ©Veikko Kahkonen, ©Simon Fowler, ©Jean-François Leclercq, ©Nguye Phuong Thao

 

 

 

 

 

 

오코 카무 Okko Kamu 1945.3.7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였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오코 카무는 헬싱키에서 태어나 6세에 시벨리우스 음악원에 입학해 처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19세에 헬싱키 필의 제2바이올린 부수석으로 임명되고 1년 후, 핀란드 오페라 오케스트라 악장 겸 부지휘자를 지내며 처음으로 지휘와 연을 맺게 된다. 카무는 이렇다 할 지휘 경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23세의 나이에 베를린에서 열린 제1회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콩쿠르에 참가해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우승을 차지하며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이후, 그는 오슬로 필의 예술감독 및 상임지휘자로 8년간 포디움에 선 뒤 헬싱키 필·네덜란드 로열 심포니·질랜드 심포니·헬싱보리 심포니 등 여러 악단의 상임지휘자 및 감독직을 맡아 북유럽을 중심으로 활동 중이다.

오스모 벤스케 Osmo Vänskä 1953.2.28
지휘자이면서 클라리네스트, 그리고 작곡가이기도 한 오스모 벤스케. 투르크 필에서 클라리넷 주자로 활동하던 오스모 벤스케는 헬싱키 필에서 수석주자로 활약하는 동안 시벨리우스 음악원에서 에사 페카 살로넨, 유카 페카 사라스테와 함께 요르마 파눌라에게 지휘를 배웠다. 1982년 브장송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한 젊은 지휘자는 이후, 라티 심포니의 수석객원지휘자를 지낸 뒤 1993년 아이슬란드 심포니 상임지휘자에 임명됐다. 1996부터는 BBC 스코티쉬 심포니 상임지휘자로 활동했고, 2003년 미네소타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역임했다. 2004년부터는 이 오케스트라와 함께 5년에 걸쳐 녹음한 베토벤 교향곡 전곡 음반을 BIS 레이블을 통해 발매했다. 2008년에는 직접 작곡한 ‘다리’를 메트로폴리탄 심포니 지휘로 세계 초연했다.

유카 페카 사라스테 Jukka-Pekka Saraste 1956.4.22
현재 쾰른 서독일 방송교향악단 상임지휘자인 유카 페카 사라스테는 시벨리우스 음악원에서 요르마 파눌라와 지휘를 공부했다. 그는 후기 낭만주의 레퍼토리에 특별한 애정을 보였으며, 뒤티외·린드버그·살로넨·사리아호 과 같은 현대 작곡가의 작품을 알리는 데에도 기여했다. 특히, 볼프강 림·파스칼 뒤샤팽 등의 작품을 세계 초연 지휘했다. WDF 심포니의 상임지휘자를 역임한 그는 스코티쉬 챔버 오케스트라(1987~1991), 핀란드 방송교향악단(1987~2001), 토론토 심포니(1994 ~2001), 오슬로 필(2006~2013)을 이끌었다. BBC 심포니 수석객원지휘자와 라티 심포니의 음악감독이기도 한 사라스테는 젊은 연주자들에게 오케스트라 경험과 소통하는 법을 전하는 프로젝트 ‘LEAD!’를 창립해 워크샵과 마스터클래스를 통해 후학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사카리 오라모 Sakari Oramo 1965.10.26
지휘자 사카리 오라모는 시벨리우스 음악원에서 수학하며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먼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오라모는 악장으로 활동했던 핀란드 방송교향악단과의 인연으로 처음 포디움에 섰다. 1993년, 건강 상의 이유로 돌연 공연을 취소한 지휘자를 대신해 무대에 오른 것이다. 이후 오스트리아·독일·미국 등지에서 여러 악단과 협연 무대를 가졌으며 1998년부터 2008년까지 시티 오브 버밍엄 심포니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했다. 로열 스톡홀름 필의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활동한 그는, 핀란드 방송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9년을 지냈으며, 2013년부턴 BBC 심포니에서도 동일한 지위로 활동했다. 오라모 역시 실내악주자로 무대에 서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으며, 많은 양의 음반도 녹음한 바 있다.

한누 린투 Hannu Lintu 1967.10.13
2018/2019 시즌 핀란드 방송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인 한누 린투는 시벨리우스 음악원에서 첼로와 피아노를 공부하며 음악과 연을 맺었다. 이후 요르마 파눌라와 에리 클라스에게 지휘를 배운 그는 1994년 베르겐에서 열린 북유럽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본격적으로 지휘자의 길로 들어섰다. 1998년엔 투르크 필의 상임지휘자로, 2002년부터는 헬싱보리 심포니의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활동했다. 2009년엔 탐페레 필, 2010년엔 핀란드 방송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임명됐다. 더블린 RTE 국립 심포니의 수석객원지휘자로도 활동한 그는 세계 각지를 돌며 유수의 악단과 무대에 올랐고,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나가는 중이다. ‘온딘’ ‘낙소스’ ‘아비’ ‘하이페리온’ 등의 음반사를 통해 수많은 음반을 남겼다.

수잔나 멜키 Susanna Mälkki 1973.6.19
시벨리우스 음악원에서 첼로 공부에 매진하던 수잔나 멜키는 요르마 카눌라와 에사 페카 살로넨의 추천으로 음악원 내 지휘 워크샵에 참여한 후, 본격적인 지휘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여성 지휘자의 신화’로 여겨지는 멜키는 베를린 필은 물론 매년 포디움에 올라 세계적인 악단을 지휘하고, 각종 음악 페스티벌에 초청돼 독보적인 음악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다. 현대 음악에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 프랑스의 현대 음악을 앞장서 이끌고 있는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 최초의 여성 음악감독으로 임명돼 2006년부터 7년간 활약했으며, 2016년에는 LA 필하모닉의 수석 객원지휘자로 임명됐다. 현재는 헬싱키 필의 상임지휘자로 다양한 레퍼토리를 선보이고 있으며, 악단 측은 그녀와의 계약을 2021년으로 연장했다.

미코 프랑크 Mikko Franck 1979.4.1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5세에 바이올린을 시작했고, 13세에 시벨리우스 음악원에 입학했다. 열여섯에 처음 포디움에 선 프랑크는 이후 지휘자를 꿈꾸며 요르마 파눌라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세계 각지에서 지휘 경험을 쌓았고, 2002년 23세의 나이로 벨기에 국립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일약했다. 같은 해 발매한 시벨리우스 ‘레민카이넨의 전설’ 음반은 그래미상 후보에 올랐다. 2005년에는 핀란드 국립 오페라 음악감독에 임명됐고, 2016년부터 라디오 프랑스 필의 예술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종종 의자에 앉아서 지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어린 시절, 축구를 하다 다리를 다친 후 찾아온 심각한 수술 후유증 때문이다. 어떠한 신체적 결함도 음악적 가능성을 가릴 수 없음을 보여주는 선례라고 볼 수 있다.

피에타리 인키넨 Pietari Inkinen 1980.4.29
바그너의 ‘반지’ 3부작 시리즈와 여러 오페라 작품을 지휘하며 세계 각지를 누비던 인키넨은 핀란드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선 핀란드 국립 오페라 오케스트라와 함께 ‘나비 부인’을 선보이며 명실공히 핀란드를 대표하는 지휘자로 거듭났다. 2015년 프라하 심포니의 상임지휘자, 뉴질랜드 심포니의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현재는 명예지휘자)를 역임했고 재팬 필의 상임지휘자로 2016/2017 시즌을 보냈으며, 2017년부터는 도이치 방송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에 임명됐고 현재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 첫 지휘를 앞두고 있다. 인키넨은 시벨리우스 음악원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지휘를 배우기 전 쾰른 음대에서 자카르 브론을 사사한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한데, 종종 그가 동료들과 함께하는 실내악 무대를 만나볼 수 있다.

※ 2013년부터 탐페레 필의 음악감독을 맡으며 최근에는 예테보리 심포니 상임지휘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수석객원지휘자로 활동 중인 상투 마티아스 로우발리(Santtu Matias Rouvali), 1996년생으로 이미 투르크 음악제의 예술감독을 지냈고, 타피올라 신포니에타의 상주 음악가이자 스웨덴 방송교향악단의 수석객원지휘자로 활동 중인 클라우스 마켈라(Klaus Mäkelä)의 행보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 외에도 쿠르트 마주어의 보조로 근무한 후, 프란츠 뵐저-뫼스트가 이끄는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에 임명된 사샤 마킬라(Sasha Mäkilä) 등 핀란드 출신의 지휘자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를 향해 날개를 펼쳐 보일 준비에 여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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