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 필자들이 꼽은 화제의 무대
‘관객참여’라는 트렌드
요즘 소위 핫한 공연의 키워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관객참여’일 것이다. 관객이 물리적으로 참여하는 작품이 이젠 낯설지 않고, 그런 작품치고 흥행이나 화제 몰이에서 실패한 경우는 오히려 드무니 말이다. 사실 이 개념은 그다지 새로운 게 아니다. 모더니즘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감각이든 이성이든 관객을 깨우려는 시도는 젊은 예술가들의 공통된 화두였고, 관객을 참여시키는 공연의 문법은 점점 과격하면서도 기발하게 발전해왔다.
사실 과격하기로 따지자면 백 년 전의 공연이 지금보다도 훨씬 더했다. 예를 들어 미래파의 공연에서는 한 좌석에 일부러 티켓을 여러 장 팔아서 공연이 시작되기도 전에 관객끼리 자리를 놓고 싸우게 할 뿐 아니라 S석과 A석의 가격을 반대로 책정해서 제일 비싼 티켓을 산 관객을 제일 나쁜 자리에 앉히기도 했다니, 이 정도면 관객 참여가 아니라 관객 도발에 가깝다. 참여의 의지를 북돋는 데는 관객을 화나게 하는 것보다 효과적인 것이 없다나.
재미있는 것은 관객의 반응이다. 처음엔 당혹스러워 화를 내다가 이 공연이 원래 그런 것임을 알고서는 미리 토마토와 계란을 준비해가서 무대 위의 배우들을 향해 던지며 신나게 놀았다고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즐거울 방법을 찾아내는 것은 관객의 본능이다.
때때로 명작은 이런 관객들에 의해 탄생하기도 한다. 작가라는 상수에 매이지 않고 관객이라는 변수에 텍스트가 열려있을 때, 기존의 문법에서는 전혀 가능하지 않은 공연이 등장할 가능성은 오히려 커진다. B급이나 서브컬처나 컬트로 명명되는, 관객의 변덕스럽고 예측 불가능하며 비주류적인 취향에 온전히 열려있는 작품들이 공연의 역사에서 고전으로 회자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빛과 그림자는 동전의 양면인 법. 이런 부류의 공연이 고전이자 명작이라는 이름을 얻는 순간, 관객이 만들어낸 생동감은 재현해야 할 텍스트로 고정될 수밖에 없다. 그때의 관객이 공연을 즐겼던 방식은 지금의 관객에게 반복해야 할 매뉴얼이 되어버리는 거다. 그렇다면 관건은 ‘지금 여기의 관객과 더불어 어떻게 새로운 생동감을 ‘완성’해야 할 것인가’이다.
재현의 재미와 한계, ‘록키호러쇼’
‘록키호러쇼’의 고민도 똑같다. 관객이 완성한 작품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이라면 단연 ‘록키호러쇼’일 것이다. 엉뚱한 상상력과 도발적인 표현으로 가득 찬 이 작품은, 솔직히 극장이라는 공간과 공연이라는 특성으로 본다면, 실패할 수가 없는 기획이다. 이 작품이 망한 건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였다. 관객이라는 변수를 제거한 채 그저 텍스트에 기반을 둔 영화가 흥미로울 수 없는 건 당연지사. 그런데 정말 대단한 것은 관객이다. 공연이 재미있다는 소리를 듣고 영화를 보러 왔는데 어머, 지루하기가 짝이 없네. 에라, 그렇게 하려면 집어치워! 관객은 영화의 관극방식에 매이지 않고 스스로 ‘보는 자’에서 ‘노는 자’로 자리를 바꾸었다. 지루한 영화 텍스트 사이사이에 끼어들어 놀기 시작하면서 관객은 평면의 영화를 입체의 공연으로 탈바꿈시켰던 거다. ‘록키호러쇼’는 관객이 노는 방식을 덧붙이면서 진화해온 놀이공연(?)의 전형인 셈이다. 그 말인즉슨, 이 작품이 계속 ‘관객참여의 고전’이 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관객들이 채워 넣을 수 있는 또 다른 놀이의 가능성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면에서 볼 때 이번 ‘록키호러쇼’는 너무나 ‘고급스럽다.’ 극장의 규모에서나 무대의 만듦새도 그렇고 무엇보다 작품의 질감이 무척 세련된 거다. 천박하고 저속한 도발의 수위는 적당히 조절되어 시각적인 화려함과 배우의 매끈함을 편안하게 즐기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관객 역시 ‘전통적이다.’ 비를 맞는 것도, 랜턴을 비추는 것도, 빵을 던지는 것도, 춤을 추는 것도, 대답하는 것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매뉴얼에 충실하게 관객의 반응을 다한다.
물론 여기서 비롯되는 재미도 꽤 쏠쏠할 거다. 대극장과 스타 중심의 공연문화에서 보는 즐거움을 극대화하는 것이나, 전통적 방식의 참여를 재현하는 것이 오히려 관객이 원하는 안전한 재미일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할로윈 차림으로 극장을 찾는 관객에게 고작 로비에 마련된 부스에서 사진을 찍는 것 외에 참여할 만한 공간을 열어놓지 않는 것은 아쉽다. 관객은 놀 준비가 되어있는데 공연은 재현의 틀에 갇혀 있는 거다. 지금의 ‘록키호러쇼’는 원작을 구현하는 데는 유능하지만 관객에게 새로운 재미를 열어놓는 상상력이 풍부해 보이진 않는다. ‘노는 재미’를 내세운 작품이지만 ‘보는 재미’로 돌아간 느낌이다. 어쩌면 그러기엔 너무 고전이 되어버려서, 너무 규모가 커져서인지도 모르겠다.
사용되는 관객, ‘이블데드’
그렇다면 고전의 이름값이나 규모의 경제에 매이지 않은 작품에서는 ‘노는 재미’를 찾을 수 있을까? 겉으로만 보자면 ‘이블데드’가 그 역할을 할 것 같기도 하다. 일단 극장의 규모가 작고, B급 정서로 치자면 주류 고전에 가까워진 ‘록키호러쇼’보다는 훨씬 더 ‘정통’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공연으로 확인한 ‘이블데드’의 정체성은 애매하다. 성적으로는 건전하고 폭력으로는 만화적이며 패러디로는 무능하다. 이 공연에서 B급다운 도발을 찾아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 작품은 그저 말이 안 되는 상황의 연속을 배우에게 의존해 진행하는 소동극일 뿐이다. 어쩌면 이 작품이 진짜 힘주고 싶은 것은 B급의 완성도가 아니라 관객과 노는 것 그 자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작품이 선택한 관객참여의 방식은 실망스럽다.
웃고 즐길 준비가 되어있는 관객에게 좀처럼 웃을 계기를 마련해주지 못한 극적 무능도 큰 문제이지만, 좀비들이 객석에 내려와 관객에게 피 칠갑을 하는 마지막 장면의 연출은 그 의도와 효과를 알 수 없는 뜨악함으로 다가올 뿐이다. 비옷으로 갈아입고 참하게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관객에게 동백기름 발라주듯 곱게 피를 칠해주는 모양새라니. 비싼 티켓값을 치른 관객에게만 허락된 좀비들의 피칠갑은 즐겁지도 기발하지도 않은 지루한 이벤트에 불과하다. 이왕 그럴 거, 객석 전체를 헤집고 다니면서 피를 뿌리는 게 훨씬 낫지 않나? 이 공연장에 들어오는 모든 자, 깨끗함을 버려라! 이런 호기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관객들은 공연의 이벤트에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이런 관객사용에서는 무대의 벽을 허무는 통쾌함도, 관객을 도발하는 과감함도 생겨날 수 없는 법. 관객참여와 관객사용은 다르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작년에도 올해에도 ‘록키호러쇼’와 ‘이블데드’는 여름 시즌에 공연을 올렸더랬다. 제철 과일이 있듯이 제철 공연도 있는 바, 내년 여름에도 만날 수 있다면 참여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테니 부디 제대로 판을 깔아주시길.
글 정수연(뮤지컬평론가) 사진 클립서비스·오픈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