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친구가 건네는 이야기
4년 간 지속된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 시리즈의 마지막 여정에 다다른 그와의 대화
오랜 친구와 나누는 이야기에는 특별한 매력이 있다. 서로 함께한 시간이 너무나 많기에 만날 때마다 같은 주제의 이야기가 반복되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함께했던 추억을 기억하며 당시의 감정에 젖어들곤 한다. 몇 번이고 반복해도 질리지 않는 이야기, 그리고 그 안에서 느껴지는 소소한 행복과 잔잔한 기쁨.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선율은 내게 이런 느낌을 가져다준다. 눈을 감고 들었을 때 건네는 그 깊은 목소리가 오랜 친구와의 대화처럼 그렇게 서서히 마음을 적신다.
누군가에게는 오랜 친구와의 이야기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유년 시절에 대한 향수가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위로와 행복이 되는 슈베르트 소나타의 아름다운 선율이 피아니스트 김정원의 목소리로 다시 피어난다.
2014년 여름에 시작된 김정원의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 특별히 전국투어로 진행될 이번 공연은 기나긴 여정의 끝과 또 다른 여정의 시작을 예고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피아니스트 김정원의 슈베르트가 그리웠다! 2014년에 시작한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시리즈가 마지막 공연만을 남기고 있는데. 지난 한 해 동안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시리즈를 떠나서 잠시 외도를 했다. 처음 슈베르트에만 집중해서 파고들었을 때는 그 음악의 많은 매력에 빠져들었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길을 잃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롯데콘서트홀에서 선보인 ‘슈베르티아데’였다. 피아노 음악이 아닌 성악이나 실내악 등 슈베르트의 다른 편성의 음악들을 해보면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한 것이었는데, 결론적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제 마지막을 향해갈 준비가 된 것인가? 피아니스트로서의 슈베르트는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처럼 아주 뛰어난 연주자는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후대 사람들이 슈베르트의 피아노 작품을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또는 쇼팽이나 라흐마니노프처럼 전문적인 피아니즘을 구사했던 음악가들과 비교하며 낮게 평가한 경우도 있었다. 사실 슈베르트의 음악은 피아니스틱한 텍스처만으로 그 가치가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다른 공연을 통해 그의 실내악 작품을 들여다보며 더 많은 음악적 가치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며 그의 피아노 소나타가 많이 그리워졌다.
이번 ‘그랜드 피날레’는 D566과 D850, 그리고 D960으로 채워진다. 이 세 작품을 마지막 피날레로 남겨둔 이유가 있는가? 피아노 소나타 21개 중에 미완성 소나타 6개를 제외하고 15개를 연주했다. 처음부터 프로그램을 정확하게 구성해놓고 진행한 것은 아니고 리사이틀마다 주요 곡이 될 작품만 먼저 선별해두었다. 그중 D960은 당연히 마지막으로 연주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남겨둔 곡이다.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연주를 시작하게 된 도화선이자 빈에 대한 향수와 위로를 가져다준 곡이기 때문에 다른 소나타보다 개인적인 애정이 강한 작품이다.
다른 작품은 어떠한가? 이 곡이 마지막까지 아껴둔 곡이라면. 이날 같이 연주할 D850은 사실 계속 미뤄둔 곡이다. 큰 규모에 비해 개인적으로 연주하면서 매료되진 않았었기 때문에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슈베르트의 음악에 가진 내 고정관념일 수도 있겠지만, 다른 어느 소나타에서나 느껴지는 회화적이고 서사적인 느낌이 이 곡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힘 있고 발랄하지만, 곡의 길이가 길어서 조금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그렇게 몇 번을 만지작거리며 다음으로 미루다 보니 마지막까지 오게 됐다. 지금은 주로 이 소나타에 주력해서 연습하는 중이다. 사실 D960도 대작인데, 이 곡도 마찬가지라 규모 면에서 부딪히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초기 소나타인 D566과 함께 매치하니 공연 전체의 흐름이 잘 잡혔다. 처음 D566의 따뜻하고 서정적인 느낌으로 시작해서 D850의 넘치는 에너지로 1부를 마무리하고, 2부에서는 D960으로 마지막을 노래한다.
마지막을 장식할 D960은 이번 시리즈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한데. 소나타 D960은 악장마다 가지고 있는 멜로디가 매우 드라마틱하다. 모든 세상사에 관조적인 시선을 가지게 된 연륜의 사람이 감정을 다 배제하고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것처럼 시작해 아픔과 위로를 노래하며 굽이치는 1악장. 슈베르트 특유의 우울한 감성의 끝을 보여주는 2악장과 개구진 3악장, 그리고 완전한 생기를 되찾은 후 밝고 희망적으로 끝을 맺는 4악장까지. 다양한 스토리를 담고 있어 여느 소나타들과는 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D850 역시 연습할수록 더 와닿는 매력이 있을 것 같다. 원래 슈베르트의 원래 매력은 한 번에 알 수 있기보단 서서히 느껴지지 않나. D850도 마찬가지이다. 처음부터 손이 바로가진 않았지만, 점점 매료되고 있다. 하지만 공연장에서 처음 듣는 분들도 많고, 오랜 시간 동안 곡을 해석해서 연주한 내 입장과는 매우 다를 테니 어떻게 해야 그 오랜 기간 동안 정들었던, 그래서 그 매력을 찾아낼 수 있었던 음악을 한 번에 맛있게 연주할 수 있을까 많이 고민하고 있다.
슈베르트는 그 음악이 지닌 색깔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을 보여주는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 가장 신경 쓰고 있나? 슈베르트를 연주하다 보면 ‘내가 그냥 이렇게 연주해도 되나?’라는 걱정과 함께 계속 아이디어를 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중간에 있는 내성을 끄집어내서 다채로운 색깔을 만들어낸다든지, 타이밍이나 다이내믹으로 더 드라마틱한 효과를 만들려는 시도들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시도들은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아이디어가 너무 많아지다 보면 본연의 맛을 잃는 경우가 생겨버린다. 이것저것 시도해보다가 결국에는 곡을 믿고, 음악을 믿고 가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슈베르트는 심플한 만큼 소리가 굉장히 잘 들리기 때문에 그 소리와 울림, 그리고 성부 간의 밸런스에서 나오는 빛깔에 집중하고 있다. 그냥 흘려보내는 소리는 하나도 없도록 말이다.
4년의 시간, 슈베르트가 남긴 것
슈베르트와 오랜 시간 함께한 만큼 그 음악에서 받은 영향도 많을 것 같다. 슈베르트를 통해서 취향도 많이 변했고, 인생의 깨달음도 얻었다. 무엇보다도 자극적이지 않은 것이 주는 매력을 알게 됐다. 음식이나 영화·그림·글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말이다. 40대가 되니 건강검진에도 ‘생애전환’이라는 말이 붙더라. 이 시기가 되면 비단 몸의 건강상태뿐만 아니라 생각이나 마음가짐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생기는 것 같다. 욕심이나 집착, 미움 등의 감정은 옅어지고 좋은 의미에서 힘이 빠진 것 같다. 슈베르트의 음악이 내 삶에 준 영향도 있지만, 반대로 나의 이런 변화들이 그의 작품을 이전과는 다르게 바라보고 연주하게 한다.
슬픔과 기쁨, 상반된 다양한 감정들이 그의 음악 안에서는 하나로 통하는 것 같다. 슈베르트의 음악에서 느끼는 가장 큰 매력은 굉장히 슬픈 느낌이 있으면서도 그것이 절망적이지 않고, 언제나 그 안에 긍정적이고 따뜻한 희망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슈베르트라는 음악가를 사랑하는 이유도 바로 이 부분에 있다. 수많은 작곡가가 가난과 질병과 싸우며 힘든 삶을 살았는데, 그중에서도 슈베르트는 가장 불행했던 것 같다. 살아생전 자신이 작곡한 교향곡이 연주되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을뿐더러, 후대의 피아니스트인 라흐마니노프가 “슈베르트가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했는지 몰랐다”고 말했을 정도로 음악가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물론 그의 가곡들이 유명해지면서 현재는 ‘가곡의 왕’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그 역시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난 뒤의 일이다. 어찌 보면 음악가로서 불행한 삶을 살았던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스스로에 대한 믿음, 자기 음악에 대한 믿음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음악에 담긴 희망이 몇백 년이 지난 후에도 많은 사람에게 꿈과 위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멋지고 존경스럽다.
8년 전의 연주가 이번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 시리즈의 시작점이 되었듯이, 이번 공연도 또 다른 시작의 기점이 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앞으로도 20년은 더 연주할 테니 말이다. 사실 피아노를 떠나 다른 인생을 살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세상에 재미있는 일들이 너무나 많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도 또 다른 시작이 될 수도 있겠다.
특히 이번 공연은 이전과 달리 전국투어로 진행되는데. 이번 시리즈는 경기도에서의 연주 한 번을 제외하고는 투어를 진행했던 적이 없다. 감사하게도 마지막은 많은 분의 도움으로 전국투어로 진행하게 되었다. 슈베르트만을 가지고 꾸민 프로그램을 혹여 관객이 부담스러워 하진 않을까 걱정도 되지만, 연주가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주셨으면 한다. 지루하지 않게 들려드리기 위해 그 맛을 많이 찾아내고 있으니 지방에 계신 팬들도 많은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
시리즈와 함께 계획했던 음반은 언제 만나볼 수 있을까? 처음 계획했던 것처럼 시리즈를 진행하는 동안 음반이 다 나오지 않아 개인적으로 아쉬운 마음도 든다. 녹음한 것을 먼저 존경하는 선생님들께 들려드렸는데, 그중 오스트리아에 계신 파울 바드라 스코다 선생님께서 소리에 집중한 부분을 좋게 평가해주시며, 이 음반은 꼭 끝을 내라고 말씀해주셨다. 사실 연주를 다 마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고, 2015년에 슈베르트 소나타 6개를 음반으로 낸 것에 만족할까 하는 생각도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 나니 용기가 생기더라. 조금 미뤄지더라도 끝을 낼 생각이다. 음반이 다 나오고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가 되면, 다시금 슈베르트 여행을 추억하는 연주를 들려드릴 수 있지 않을까.
음악가가 가지는 또 다른 의미
독주회와 오케스트라 협연을 비롯해 롯데콘서트홀에서 진행하는 ‘김정원의 음악신보’와 네이버 ‘V살롱콘서트’ 등 다양한 영역을 동시에 소화하고 있다. 이런 활동들이 클래식 음악가로서 대중과 더 가까이 마주하고, 현장감 있는 반응을 느낄 수 있게 해줄 것 같은데. 대중과 가까이에서 만나고, ‘말’로 직접적인 소통을 하며 나 자신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었고, 이 일에 대한 가치를 점점 더 느끼게 됐다. 세상은 변하고 있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에서도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 속에서 클래식 음악은 그만의 가치를 분명히 고수하고 유지해야 하지만, 그 음악이 공감을 가지기 위해서는 다른 접근방식도 필요하다. 어느 정도 열린 마음으로 클래식 음악을 경험해보고자 하는 청중 층은 매우 많다. 그리고 그들은 조금 더 친절한 공연을 원한다. 이들을 계속해서 클래식 음악으로 이끌기 위해선 제대로 된 준비가 필요하다. 그저 공연 안에 ‘대화’와 ‘멘트’만 있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실제로 어설픈 ‘해설’이 공연을 더 지루하게 만든 경우를 많이 보았다. ‘말’이 들어간 공연일수록 더 많은 공부와 책임감이 필요하다. 공연 해설에는 음악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 등 지식적인 부분의 전달도 있지만, 그것이 너무 딱딱하거나 경박하지 않아야 하고, 음악과 어우러지는 감성으로 남아 하나의 콘서트를 이뤄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연주의 퀄리티가 더 높아야 한다는 것. 대중음악은 사람들이 더 친근하게 느끼기 때문에 조금 못 불러도 자기 감성을 보태서 들을 수 있다. 하지만 클래식 음악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음악을 들었을 때 그 연주의 퀄리티가 떨어져서 감동을 받지 못하면, 사람들은 바로 ‘나하고 맞지 않는다. 어려워서 못 듣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그건 결코 청중의 수준이 낮아서 이해를 못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감동하게 하지 못한 연주자의 책임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마음으로 롯데콘서트홀에서 하는 연주나 ‘V살롱콘서트’를 연구하면서 유지해왔다. 결과적으로도 처음보다 더 많은 관객이 찾아오고 있고, 좋은 피드백도 많이 듣고 있다. 이 일들과 함께 개인적인 프로젝트나 해나가고 싶은 공부, 연주를 병행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이 모든 것이 내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계속 이어나갈 생각이다. 글 이미라 기자
김정원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 시리즈 ‘그랜드 피날레’
9월 14일 대구 수성아트피아 용지홀
9월 16일 고양 아람누리 아람음악당
10월 2일 광주 빛고을시민문화관
10월 4일 부산 문화회관 중강당
10월 6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10월 10일 대전 예술의전당 앙상블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