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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 필자들이 꼽은 화제의 무대
제15회 평창대관령음악제 지난 7월 25일부터 8월 5일까지 강원도 평창군 일대에서 열렸다. 개·폐막을 비롯한 다채로운 공연의 후기를 전한다.
여전히 건재한 무대 위의 디바
공연의 1부나 2부 중 하나를 가득 채울 법한 굵직한 실내악 작품이 세 곡. ‘끝은 어디’라는 제목의 개막공연(7월 25일 알펜시아 콘서트홀)은 15분의 인터미션을 두 번씩 밟아가며 3부로 진행되었다. “지난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음악제에 오른 적이 없었던 곡들로 채워봐야겠다”는 손열음 예술감독의 의지가 올곧게 반영된 시간이었다.
1부는 개막공연 속 ‘작은 축제’였다. 바이올리니스트 닝 펑의 무대로, 축제명을 붙인다면 ‘닝 펑의 1-2-3’ 쯤 되겠다. 닝 펑은 무반주 독주로 밀스타인의 ‘파가니니아나’를 시작으로 하여, 스베틀린 루세브와 프로코피예프의 바이올린 소나타 Op.56을 지나, 안티 시랄라(피아노)·레오나드 엘셴브로이히(첼로)와 브람스 피아노 3중주 2번 Op.87을 선보였다.(사진 ①) 연주의 규모가 점점 불어나며 한 연주자가 품은 작은 불씨부터 거대한 불꽃까지 맛볼 수 있었다. 독주에서 ‘내세우기’를 주저하지 않던 이 청년은 다른 이들과 함께 할 적에는 ‘받쳐주기’의 유연한 변용을 통해 음악을 일궈나갔다.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한 명의 음악가를 집중적으로 내세운 스페셜 코너가 이 축제에 들어서 그가 일구는 ‘1-2-3-4-5···’의 실내악을 만나보는 것도 기대해본다.
개막무대는 팽팽한 젊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음악을 둘러싼 노장과 젊음은 결국 어울림으로 귀결하지만, 젊음은 어떤 격전의 기류로 향하기도 하다. 2부에서 드뷔시의 ‘백과 흑’을 두 대의 피아노를 놓고 연주한 안티 시랄라와 김선욱은 제목 그대로 ‘백과 흑’이었다. 드뷔시 특유의 불협화음을 도드라지게 하는 상반의 전략이 인상적이었다. 2부를 가득 채운 드보르자크의 4중주 2번 Op.87은 국내에서 쉽게 접하는 곡이 아니다.
청중은 미지의 음악에 설렘을 가지면서도, ‘아는 곡’에 대한 집착이 있다. 하지만 연주만 훌륭하다면 미지의 작품도 ‘아는 곡’이 된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시간이었다. 프레디 켐프(피아노), 보리스 브로프친(바이올린), 막심 리자노프(비올라), 알렉산더 차우시안(첼로)은 세심한 화음보단 터프한 연주로 각자의 모습을 드러냈다. 낮은 산자락이라 생각되던 실내악에서 산맥의 웅혼한 기운이 느껴진 흥미진진한 연주였다.
시곗바늘이 10시를 향해가고 있을 무렵, 3부가 열렸다. 김선욱, 클라라 주미 강(바이올린), 김두민(첼로)이 함께 슈베르트의 피아노 3중주 D.929를 선보였다. 날쌔게 이끌어나가는 주미 강의 선두지휘가 돋보였고, 대중에게 잘 알려진 2악장에선 김두민의 기품 서린 선율이, 4악장에선 김선욱의 아르페지오와 고음의 스타카시모가 청량한 느낌을 선사했다.
15회를 거듭해온 평창국제음악제가 새로운 예술감독으로 손열음을 맞이하며 제목으로 내건 ‘멈추어, 묻다’는 새로운 출발을 위한 호흡 고르기의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끝은 어디’라는 질문에 ‘새 시작은 여기’라는 대답을 외치는 것 같은 개막무대였다.
송현민
실내악 파티, 지금 이곳에서만 가능한 앙상블
페스티벌의 묘미는 ‘뜻밖의 만남’이다. 아티스트와 청중의 만남뿐 아니라 아티스트들끼리의 만남 역시 예측불허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실내악시리즈 다섯 번째 공연 ‘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8월 3일 알펜시아 콘서트홀)는 다양한 만남을 만끽하는 시간이었다. 알레나 바예바(바이올린)는 김윤지(피아노)와 라벨 바이올린 소나타 1번 A단조를 연주한 뒤, 바로 이어서 율리안 슈테켈(첼로)과 손열음(피아노)과 함께 라벨 피아노 3중주 A단조를 선보였다. 2부에서는 안드레이 이오니챠와 김두민이 클렝엘의 두 대의 첼로를 위한 모음곡 D단조 Op.22를 연주했다.(사진 ②) 낯선 조합의 앙상블이 선사하는 기대 이상의 어울림에 청중은 뜨거운 박수로 화답했다. 같은 날 저녁, 실내악시리즈 여섯 번째 공연인 ‘금요일 밤의 열기’ 역시 다채로운 만남의 장이었다. 낮 공연의 마지막을 서정적인 차이콥스키로 장식했던 노부스 콰르텟이 하이든 현악 4중주 D장조 Op.17 No.6으로 밤의 무대를 유쾌하게 열었다. 알렉상드르 바티(트럼펫)가 가세한 6중주 앙상블이 선보인 마르티누의 코믹한 발레음악 ‘요리책’(사진 ③), 미치노리 분야(더블베이스)가 4대의 더블베이스 버전으로 편곡한 비제 ‘카르멘 모음곡’ 등 이색적인 레퍼토리가 연이어 소개됐다. 이례적인 폭염으로 뜨거웠던 여름밤의 뮤직텐트는 앙상블의 열기로 흥겹게 달아올랐다.
프랑스의 베르비에나 미국의 아스펜 등 유수의 음악축제에서도 볼 수 있듯이, 페스티벌의 미덕은 결코 원숙함에 있지 않다. 이음새가 다소 매끄럽지 않아도, 다양한 결합을 통해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있다. 연주자들은 이른바 ‘정규 시즌’ 중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조합을 통해 예상치 못했던 가능성과 시너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자유롭게 발산하며 청중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평창대관령음악제의 실내악시리즈는 이러한 명제에 충분히 부합하는 무대를 선보였다.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축제의 피날레
이번 축제의 대미를 장식한 폐막공연 ‘한여름 밤의 꿈’(8월 4일 알펜시아 뮤직텐트)은 ‘올스타전’을 연상케 했다. 악장 스베틀린 루세브·헝웨이 황(비올라), 김두민(첼로), 조성현(플루트), 함경(오보에), 조성호·조인혁(클라리넷), 김홍박·미샤 에마노프스키(호른), 알렉상드르 바티(트럼펫).
오케스트라의 멤버들 중 몇몇 이름들만 꼽아도 이 정도다. 준(準)야외 공연장인 뮤직텐트의 불완전한 음향 조건 속에서도 이들은 정치용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고 유연한 연주를 들려줬다. 폐막 공연에 함께한 연주자들의 면면도 화려했다. 평창대관령음악제가 주관하는 협주곡 콩쿠르의 올해 우승자인 한재민이 생상스 첼로 협주곡 1번 A단조의 협연자로 무대에 올랐다. 초등학교 6학년답지 않은 보잉과 짙은 소리가 눈길을 끌며 새로운 신예 연주자의 등장을 알렸다. 축제 기간 동안 루세브와 함께 공동악장으로 활약한 클라라 주미 강(바이올린)은 이날 무대에서 협연자로 올라 번스타인의 ‘플라톤의 “향연”으로부터 온 세레나데’를 연주했다(사진 ④). 폐막 공연의 대단원은 베토벤 ‘피아노·합창·관현악을 위한 환상곡’ Op.80으로, 이진상(피아노)과 강릉시립합창단이 함께했다. 모든 연주가 끝나고 단원들이 서로 어깨를 끌어안으며 한참 동안 인사를 나누는 모습에서, 음악축제는 관객뿐 아니라 연주자들에게도 특별한 즐거움을 안겨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페스티벌 곳곳에서 예술감독을 맡은 손열음의 세밀한 수고가 느껴졌다. 지난해까지 정명화·정경화 예술감독 체제 아래 부감독으로 활동했던 손열음이 전면에 나서면서, 평창대관령음악제는 한결 젊어지고 트렌디해졌다. 친밀하면서도 식상하지 않고, 신선하면서도 낯설지 않은 프로그램들이 2주 밤낮을 가득 메웠다. 이정은
글 송현민(음악평론가)·이정은 기자 사진 평창대관령음악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