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POSER OF THE MONTH
이달에 주목해야 할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에서 비올리스트로, 연주자에서 작곡가로, 불협화음에서 협화음으로, 나치의 협조자에서 망명자로, 파울 힌데미트(1895~1963)의 음악과 삶은 끊임없이 변화했다. 여기에는 과거와 현재,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갈등 사이에서 끊임없이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이 있었으며, 그는 매 순간 나름의 가치관을 세우고 몸소 실천했던 현실적인 예술가였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천상 음악가
힌데미트는 프랑크푸르트 근교에 위치한 하나우의 넉넉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페인트공이었던 아버지는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은 음악이라고 생각하고, 세 자녀를 음악가로서 키우기 위해 엄격한 교육을 시켰다. 다행히 아이들은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였으며, 프랑크푸르트 어린이 3중주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힌데미트는 바이올린으로 프랑크푸르트 음악원에 입학하여 정규 교육을 받았고, 1914년에 그의 스승인 아돌프 레브너가 자신의 4중주단에 힌데미트를 제2바이올린으로 합류시킬 정도로 일찍 인정받았다. 또한 그 해에 프랑크푸르트 오페라 관현악단에 부악장으로 입단하여 1917년에 악장이 되었다.
힌데미트가 작곡을 시작한 것은 이즈음이었다. 아르놀트 멘델스존과 베른하르트 제클레스에게 1912년부터 정식으로 작곡을 배우고, 현재는 분실된 피아노·클라리넷·호른을 위한 3중주에 ‘Op.1’을 붙여 작곡가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뒤이어 현악 4중주단의 일원답게 Op.2로 현악 4중주 1번(1915)을 작곡했으며, Op.3으로 규모 있는 첼로 협주곡(1916)을 내놓아 창작에 대한 왕성한 열의를 보였다. 이 작품들은 당시의 대작곡가였던 말러와 R. 슈트라우스 등의 후기 낭만 스타일을 따르면서 자신의 음악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의도적인 불협화음이나 과감한 화음 진행이 종종 들리지만, 전체적으로 낭만적인 선율과 익숙한 조성적인 흐름에 기초하고 있다.
현을 위한 여섯 개의 소나타 Op.11(1919)에서는 낭만뿐만 아니라 바로크 시대에 대한 관심도 드러냈다. 힌데미트는 바흐의 모든 바이올린 작품을 연주했을 정도로 바흐에 크게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특히 바흐의 ‘샤콘’을 연상시키는 무반주 비올라 소나타 Op.11-5(1919)의 4악장 파사칼리아에서 그 면모를 확인해볼 수 있다. 이외에도 첫 번째 바이올린 소나타(1918)는 브람스를, 마지막 여섯 번째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1917)는 이자이를 향한 짝사랑이 엿보인다.
내가 선택한 나의 음악
현대음악에 큰 관심을 두고 있던 그는 스승의 4중주단을 탈퇴하고 비올리스트로 변신, 1921년에 현대음악만을 연주하는 아마르 4중주단을 창단했다. 이 단체는 유럽을 순회하며 수많은 곡을 초연하는 등 매우 성공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작곡가로서의 주목받기 시작했다. 잘츠부르크에서 열린 국제현대음악협회(ISCM) 페스티벌에서 연주된 그의 실내악 작품이 호평을 받으면서 쇼트 사와 악보 출판 계약까지 성사된 것이다. 1923년에는 ‘도나우에슁엔 음악의 날’의 조직위원 위촉으로 이어져 힌데미트의 영향력은 급속히 신장됐다. 당시 쇤베르크와 베베른 등 새로운 음악을 쓰는 작곡가들이 힌데미트에 의해 축제에 초청되었다.
힌데미트는 신바로크주의를 표방할 정도로 옛 형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쇤베르크와 비슷한 면이 있다. 또한 작곡을 수공예와 같은 장인의 기술로 보았다는 점도 닮았다. 공연을 하루 앞두고 연주 장소로 가는 기차 안에서 그 공연에서 연주할 비올라 독주 소나타 Op.25 No.1(1922)의 두 악장을 작곡하고 거의 초견으로 무대에서 연주한 일은 장인으로서의 작곡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힌데미트는 쇤베르크와 달리 현대적 이론에 큰 무게를 두지 않았다. 힌데미트는 청각적으로 들리는 소리 자체를 중시하는 절대 음악적인 가치를 추구했다. 감정을 음악의 주제로 사용하거나 특정 대상에 대한 묘사를 거부했으며, 거칠고 아름답지 않은 사운드를 요구하는 반낭만적인 성향을 띄었다. 비올라 독주 소나타 3악장의 ‘음을 아름답게 내는 것은 부차적인 사항임’, 첼로 독주 소나타 Op.25 No.3(1922) 1악장의 ‘경직된 운궁으로’와 4악장의 ‘어떤 표현도 없어야 하며 항상 피아니시모로’ 등의 지시어들은 이와 관계가 깊다.
불명확한 조성도 반낭만적 성향에 적지 않은 공이 있다. 이것은 쇤베르크처럼 으뜸음을 실종시킨 무조성이라기보다는 으뜸음이 모든 12음을 통해 자유롭게 이동하는 부유하는 조성에 가깝다. 그리고 불협화음의 적극적인 사용도 기여한 바가 있다. 화음에 비화성음이 추가되고 반음 차이의 두 화음을 동시에 소리 내는 등 지엽적이기는 하지만, 타악기 효과를 내는 데는 효과적이었다. 피아노곡 ‘래그타임’에 대해 ‘단지 매우 거칠게, 그러나 기계처럼 모든 리듬이 반짝이게 쳐라. 피아노는 재미있는 타악기의 일종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다루라’라는 설명이 이를 확인할 수 있는 한 예이다. 또한 빠르고 강하게 타건하기 쉽도록 손 모양을 고려하여 음정 선택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의 의도가 개념을 넘어 매우 현실적이고 실천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옛 음악에 대한 관심
신바로크주의를 표방한 힌데미트는 바로크에서 유래한 요소들을 감추지 않았다. 바흐에 대한 그의 경의가 녹아있는 첼로 독주 소나타에는 지그를 연상케 하는 셋잇단음이나 사라방드의 부점 리듬 등 바로크의 향수를 간직한 리듬이 자주 보인다. 그리고 현악 4중주 5번 Op.32(1923) 4악장의 푸가로 풀어가는 파사칼리아에서 옛 양식을 다루는 솜씨는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발전했다. 반면에 새로운 음악과는 거리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그가 청중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과 관련이 있다. 심지어 힌데미트는 청중에 대한 배려를 ‘음악의 윤리적 필연성과 음악가의 도덕적 책임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절대 음악적인 가치와 명확한 형식을 강화하면서도 음정 선택에 보다 신중을 기하기 시작했는데, 점차 불협화음의 자제와 조성으로의 복귀로 나타났으며, 머지않아 새로운 음악과의 작별로 이어졌다.
이러한 갈등과 변화는 다양한 편성을 가진 여덟 곡의 실내음악(Kammermusik: 1922~1927) 시리즈에 반영되었다. 현대적인 선율과 거친 불협화음, 타악기적인 리듬이 협화적으로 해결되는 순간, 과거의 조성적 화성 진행에 대한 애정이 드러난다. 첫 두 곡을 제외하고는 모두 독주 악기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데, 이 때문에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에 빗대어지기도 한다. 드물지 않게 들리는 바로크적 선율과 꾸밈음은 힌데미트 자신이 이를 의도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게 한다.
실내음악 시리즈 중 6번(1927)은 특이하게도 비올라 다모레를 독주 악기로 사용한다. 이 악기는 17세기 말에 유행하여 18세기 초반까지 사용되었던 악기로, 6~7개의 현과 연주하지 않는 공명 현이 있다. 힌데미트는 이 곡 이전에 이미 비올라 다모레 소나타 Op.25-2(1922)를 작곡했는데, 바로크 음악의 대한 열정이 작곡을 넘어 연주로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실내음악 시리즈에 이어 등장한 협주 음악(Konzertmusik: 1926~1931) 시리즈도 관악 밴드, 금관과 현, 비올라와 앙상블, 피아노와 금관과 하프 등 독특한 편성을 실험하고 불협화음과 복조성(서로 다른 조성들이 동시에 연주되는 경우로, 섞이지 않는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등을 들려주지만 협화음으로 해결되는 조성적 해결을 꾀한다. 그리고 마침내 ‘화가 마티스’(교향곡: 1934, 오페라: 1935)로 자신의 음악이 나아갈 길을 확고히 했다.
그가 택한 현실
1933년에 나치가 정권을 잡은 후 힌데미트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나치는 그의 음악을 퇴폐적 음악으로 분류했으며 정치선전정책을 이끌었던 요제프 괴벨스는 1934년 12월에 힌데미트를 ‘무조성의 소음 제작자’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힌데미트는 무조성을 사용한 적이 없었으며, 그나마 불협화음도 줄여가고 있었기에 이것은 옳지 못한 비판이었다. 나치에 협조적이었던 지휘자 푸르트벵글러조차도 ‘힌데미트의 경우’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즉각적으로 괴벨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교향곡 ‘화가 마티스’를 연주하기도 했다.
유대인이 아닌 힌데미트가 이렇게 나치로부터 눈엣가시가 된 이유는 그의 친유대인적 성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부인이 부분적으로 유대인에 속해있었으며, 그와 함께 3중주 활동을 했던 바이올리니스트 시몬 골드베르크와 첼리스트 에마누엘 포이어만도 유대인이었다. 독일 내에서는 이들과 연주할 수가 없었음은 물론, 본인의 연주뿐만 아니라 심지어 힌데미트의 작품조차도 연주 금지를 당했다.
그래서 그는 1936년에 금지 항목에 있지 않았던 저술을 시작하여 이듬해에 ‘작곡 지침서(Unterweisung im Tonsatz)’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 책은 힌데미트의 음악 스타일과 관점을 정리한 것으로, 그는 이 책에서 조성을 배음에 의해 형성된 ‘음의 자연’이라는, 유명한 음악분석학자인 하인리히 솅커와 같은 주장을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교향곡 ‘화가 마티스’ 이후 그의 음악은 자연스럽게 협화적인 조성으로 회귀했다.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작곡된 15개의 기악 소나타들이나 비올라 협주곡 ‘백조고기를 굽는 사나이’(1935) 등 여러 협주곡 역시 음악관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연주와 작품 발표는 독일 밖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백조고기’는 1935년 11월 14일 암스테르담에서 자신의 연주로 이루어졌으며, ‘장례 음악’(1936)은 1936년 1월 22일 런던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장례 음악’이 초연된 공연은 본래 ‘백조고기’를 연주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초연 전날에 조지 5세가 서거하자 힌데미트는 밝고 명랑한 분위기의 ‘백조고기’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연주 당일 비올라와 현을 위한 ‘장례 음악’을 작곡하고 그 날 저녁에 초연했다! 이 일은 청중을 배려하고 용도에 따라 작곡해야 한다는 ‘실용적 음악’(Gebrauchsmusik: 교육용 음악이나 애호가들을 위한 음악 등 대상과 목적을 가진 작품을 작곡한 경향을 일컫는 말로, 정작 힌데미트는 이 표현을 좋아하지는 않았다)에 입각한 음악관의 단면을 보여준다.
플루트 소나타(1936)의 경우는 1937년 미국 워싱턴 소재의 의회 도서관에서 초연이 이루어졌으며, 그의 성악 작품과 비올라 작품이 함께 연주되었다. 그리고 비올라와 비올라 다모레 연주자로서 미국을 투어 하는 등 연주와 작품 발표 금지는 오히려 그의 명성과 활동 영역을 더욱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힌데미트는 독일에서의 활동을 위해 나치의 요구들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나치를 위한 연주회에서 지휘를 하고 국가적인 직위도 맡았다. 1927년에 베를린 음대에서 가르칠 때부터 이집트의 카이로와 터키의 앙카라 등을 방문하여 유럽음악을 알리면서 터키 국립 오페라단과 발레단을 조직하는 데 힘을 쓰기도 했던 그는, 1935년에 터키 정부로터 음악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줄 것을 요청받는 등 이 시기에 지속적으로 독일 문화 대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도 나치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이 지속적으로 논란의 중심에 놓이자 결국 1938년에 스위스로의 망명을 택했다.
평온한 여생을 위하여
그리고 힌데미트는 1940년에 당시 망명의 종착지였던 미국으로 이주했다. 예일대에서 음악을 가르치면서 1946년에 시민권도 획득했다. 그러다 1949년에 취리히 대학의 교수를 겸하여 활동하면서 1953년에 스위스로 완전히 이주했다.
미국 체류 시절에 작곡된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곡은 피아노곡 ‘음의 유희’(Ludus tonalis: 1942)이다. ‘작곡 지침서’의 지침에 따라 작곡된 이 작품은 바흐의 평균율 피아노곡집을 연상케 하는 열두 개의 장조로 되어있는 푸가가 중심에 있으며, 각 곡 사이에 11개의 간주곡이 끼어있고 전주곡과 후주곡이 전체의 앞과 뒤에 배치되어 총 25곡으로 구성되어있다. 후기 스타일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손색이 없는 대작이다. 그런데 이 곡의 조성 배치는 바흐와 같이 다장조에서 반음씩 올라가는 순서가 아닌, ‘작곡 지침서’에서 제시한, 힌데미트가 배음렬을 기초로 만든 ‘음렬1’의 순서(C-G-F-A-E-E♭-A♭-D-B♭-D♭-B-F#)를 따르고 있다.
후기에는 자유롭게 불협화음을 구사하던 과거의 작품들을 과오로 여기고 새로운 이론에 따라 수정하면서 연주 활동에 주력했다. 그만큼 새로운 작품을 발표하는 횟수는 줄었지만 대규모의 작품의 비중이 높은데, 이것은 비올라 연주자로서보다는 지휘자로서의 활동이 왕성해진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작곡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마지막 작품은 세상을 떠난 해에 작곡된 아카펠라 합창곡 ‘미사’(1963)이다. 평안한 안식을 구하는 기도인 듯, 그가 찾은 마지막 해답은 신비와 경건함으로 가득하다.
글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기고와 해설, 강의 등 여러 활동으로 우리를 위한 음악으로서의 클래식을 나누고 있다. 서울시향의 프리렉쳐를 진행하고 있으며, 화음쳄버오케스트라 자문위원, 현대음악앙상블 ‘소리’ 프로그래머로서 흥미로운 음악회도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