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가 아힘 프라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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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10월 15일 9:00 오전

바그너의 질문에 무한한 상상으로 답하다

아힘 프라이어가 선보이는 대규모 바그너 프로젝트. 니벨룽의 반지는 ‘한국의 반지’가 될 수 있을까

 

아직 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9월의 남산창작센터.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배우의 몸에 의상을 맞춰보는 의상팀, 무대 세트를 정비하는 제작진, 영상을 편집하는 엔지니어, 피아노 주위에 빙 둘러서 노래 연습을 하는 가수들, 총보를 보며 악구를 분석하는 지휘자. 곧 시작될 리허설을 위해 저마다 준비가 한창이었다. 절반은 독일인, 절반은 한국인이었다. 그리고 연습실 안쪽, 플로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중앙 테이블에 아힘 프라이어(Achim Freyer, 1934~)가 앉아 있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제작되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4부작 음악극 ‘니벨룽의 반지’는 오는 10월 첫 번째 파트인 ‘라인의 황금’을 시작으로 2019년 6월 ‘발퀴레’, 2019년 12월 ‘지크프리트’, 2020년 5월 ‘신들의 황혼’까지 3년에 걸친 대규모 프로젝트다. 독일 BMW 본사로부터 120억 원의 거액을 협찬 받아 세간의 관심을 끌었고, 독일의 오페라 연출가 아힘 프라이어가 총연출을 맡아 애호가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1934년 베를린에서 태어난 아힘 프라이어는 베를린 국립미대에서 미술을 전공했고, 베르톨트 브레히트에게 극예술을 배웠다. 1972년 자유로운 예술 활동을 위해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했고, 지금까지 150편 이상의 오페라를 연출해 왔다. 지난 2011년 국립극장의 창극 ‘수궁가(Mr.Rabbit and the Dragonking)’의 연출을 맡아 파격적인 창극을 선보인 바 있다.

오페라 연출가이자 미술가인 아힘 프라이어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비주얼을 선보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은유와 상상으로 가득 찬 그의 미장센은 무대 위의 그 어떤 현실적 요소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 속 배우들은 커다란 가면을 쓰거나, 우스꽝스럽게 분칠을 하거나, 과장된 의상을 입는다. 환상이 강렬한 비주얼은 호불호가 크게 갈리지만, 그의 연출이 작품이 모든 요소를 하나의 점으로 집약하는 힘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그가 바그너 총체예술의 대표작인 ‘니벨룽의 반지’를 연출하니, ‘아힘 프라이어표’ 판타지의 최극단을 보여주리라는 것을 쉽게 예견할 수 있다.

연습이 없는 일요일, 그가 한 달째 머무르고 있는 명동의 한 호텔에서 아힘 프라이어를 만났다. 악수를 하려고 오른손을 건네자 그는 왼손을 내밀어 맞잡았다. 수술 중 사고로 신경이 손상되어 오른손의 움직임이 불편하단다. 여든넷 노구의 연출가는, 그러나, 작품을 이야기하는 동안 어린 아이처럼 상상의 세계를 유영했다. 한발은 노란색, 다른 한발은 초록색 스니커즈를 신은 그의 두 발을 보고 있자니 나이를 초월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2010년 LA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한 아힘 프라이어 연출의 ‘라인의 황금’

 

2011년 국립극장 수궁가가 ‘한국 작품을 독일 연출가의 손으로 연출한’ 작품이었다면, 이번 바그너 프로젝트는 ‘독일 작품을 독일 연출가가 연출해 한국 관객에게 보여주는’ 공연이다. 바그너를 한국 관객에게 선보이는 소감이 궁금하다. 독일에는 바그너 추종자를 뜻하는 ‘바그네리안(Wagnerian)’이라는 단어가 있을 정도로 바그너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 나는 바그너를 싫어하는 편에 더 가까웠다. 우리 모두 바그네리안이 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고,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바그너에 조금 더 가까워지길 바란다.

제작진과 출연진에 독일인과 한국인이 함께 구성되어 있는데. 언어 문제가 조금 까다롭지만, 큰 어려움은 없다. 한국 가수들은 정말 열심히 진지하게 공부한다. 로게 역은 뮤지컬 배우로도 활동하는 양준모가 참여한다. 독일어 딕션과 성악 발성을 집중적으로 훈련하기 위해 오스카 힐레브란트(알베리히 역)에게 매일같이 레슨을 받는데, 놀랄 만큼 발전했다.

‘니벨룽의 반지’는 북유럽 신화에 기반한 바그너의 창작물이지만, 시대와 국가를 뛰어넘어 현대의 세계인들에게 끊임없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모차르트가 보여준 혁신 이후 극음악은 한동안 정체되어 있었다. 바그너는 기존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이 세계에 대해 표현할 길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는 이 작품을 오페라라고 부르는 대신 ‘음악극’, 즉 종합예술이라고 이해했다. 작품 속 언어는 시로서 존재하고, 음악 없이도 스스로 존재할 수 있다고 바그너는 생각했다. 음악 자체도 그림이 될 수 있고, 무대와 조명도 예술적으로 표현된다. 낯선 시대와 환경에서도 충분히 연주될 가치가 있다. 과거에 만들어졌지만 지금에도 자연스럽게 공연될 수 있다. 신들의 왕 보탄과 난쟁이 알베리히 등 작품 속 인물들이 모두 지금의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는다. 예컨대 알베리히는 히틀러의 독재정권을 연상시킨다. 관객은 작품을 보면서 ‘자신이 그 상황에 처하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게 될 것이다.

그중 1편인 ‘라인의 황금’에서는 황금을 둘러싼 등장인물들의 갈등의 시작을 다룬다. ‘수궁가’에서는 페트병 등을 통해 환경에 대한 메시지를 연결한 바 있는데, 이번 ‘라인의 황금’에서도 사회에 대한 경고와 비판이 담겨있는가? 전쟁을 비롯한 현 사회의 심각한 갈등이 결국 인간의 탐욕 때문이라는 것이 이 작품의 근본적인 메시지다. ‘라인의 황금’을 포함한 ‘니벨룽의 반지’에는 이런 문제의식을 표현할 수 있는 재료들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마르지 않는 우주 같은 작품이다. 한국의 상황을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발전이 옛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인지, 혹은 급하게 서구화된 것인지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으며 이를 반영하려고 한다. 관객이 작품을 보고 함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도록 만들고자 한다.

의상과 무대미술을 다소 낯설게 느끼는 기존의 바그너 팬들도 있을 것 같다. 시각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연출 의도는 어떤 것인가? 회화적인 표현을 많이 보여주는데, 화가로서의 정체성이 반영된 것인가? ‘라인의 황금’은 라인강, 신들의 세계, 난쟁이들의 지하세계 등 여러 시공간을 표현한다. 바그너의 작품은 종합예술이다. 표면적인 스토리를 단순히 반영하는 것을 넘어, 바그너가 의도한 본질적인 의미를 담아내려 한다. 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음악과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연결하고자 한다. 마치 ‘움직이는 그림’처럼, 소리가 가진 색채적 성질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마치 술에 취하듯, 소리에 취하고 컬러에 취하는 공연이 될 것이다.

굵은 붓터치의 의상과 배경, 그로테스크한 분장과 거대한 가면 등 매 작품마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이 분명하다. 난 그저 원작의 메시지와 의도에 충실할 뿐이다. 다르게 표현이 안 되더라. 관객이 작품을 보면서 소리와 색채에 동시에 흠뻑 취하도록 만들고 싶다. 그럼으로써 관객이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많이 주려고 한다.

이번 ‘니벨룽의 반지’는 2010년 미국 LA오페라 극장, 2013년 독일 만하임 국립극장에 이은 세 번째 버전이다. 앞선 두 버전과 차별화된 연출 포인트가 있다면? ‘분단’이라는 한국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고자 했다. 또한 한국에서 한 번도 ‘니벨룽의 반지’가 제작된 적이 없다는 적을 염두에 두었다. 바그너의 작품은 가사에 사용된 언어 자체가 어려워서, 독일어를 아는 사람도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하지만 이번 프로덕션에서는 매우 직관적인 연출을 선보인다. 어린 아이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관객들이 이 작품을 보면서 어떤 걸 느끼길 바라는가? 그저 잘 봐주시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이 작품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면 좋겠다. 이정은 기자 사진 월드아트오페라

 

오는 11월 무대에 오르는 ‘라인의 황금’의 리허설 현장. 왼쪽부터 불의 신 로게, 난쟁이, 신들의 왕 보탄

‘라인의 황금’ 미리보기

음악극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는 리하르트 바그너가 북유럽 신화와 중세문학을 소재로 작곡한 4부작 시리즈다. 첫 번째 작품인 ‘라인의 황금(Rheingold)’은 전야(前夜)이며, ‘발퀴레(Walküre)’ ‘지크프리트(Siegfried)’ ‘신들의 황혼(Götterdämmerung)’이 각각 1·2·3부작으로 이어진다. 전곡을 다 감상하려면 무려 16시간이 소요된다. 바그너는 이 작품을 기존의 오페라와 차별되는 장르로서 ‘음악극(Musikdrama)’이라고 불렀다. 선율이 명확한 아리아와 대사 중심의 레치타티보로 구성되는 보편적인 이탈리아 오페라 구성이 아닌, 음악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등장인물과 연결되는 특정 선율주제인 바그너의 라이트모티프(Leitmotiv, 유도동기) 기법이 적극적으로 사용된다.

라인강에는 황금을 지키는 세 요정 처녀들이 있다. ‘라인의 황금으로 반지를 만들면 온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전설이 깃든 황금이다. 욕심 많은 니벨룽족 난쟁이 알베리히는 처녀들에게 구애하지만, 처녀들은 그를 놀리며 거절한다. 화가 난 알베리히는 라인강의 황금을 빼앗아 달아난다. 한편, 신들의 왕 보탄은 거인족 형제인 파졸트와 파프너를 시켜 거대한 성을 지어 올린다. 보탄은 그 대가로 청춘의 여신 프라이아를 그들에게 내어주기로 했는데, 보탄을 제외한 신들은 극렬하게 반대한다. 프라이아가 사라지면 신들은 영원한 젊음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프라이아 대신 거인들에게 줄 선물을 고민하던 그때, 불의 신 로게가 나타나 난쟁이 알베리히와 그가 만든 황금 반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반지를 둘러싼 신들과 난쟁이와 거인의 갈등은 점점 고조되고, 이들의 끝없는 욕망은 수그러들 줄 모른다.

 

바그너 ‘라인의 황금’

11월 14~18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아힘 프라이어(연출)/랄프 바이커트·마티아스 플레츠베르거(지휘)/김동섭·양준모(보탄 역)/아놀드 베츠옌·양준모(로게 역)/세르게이 레퍼쿠스·오스카 힐레브란트(알베리히 역)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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