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희 ‘더스크’ & 하상현 ‘아이소메트릭’

시간의 향유와 욕망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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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10월 6일 12:20 오전

‘객석’ 필자들이 꼽은 화제의 무대

 

‘더스크’ ©김재범

너무나 순식간이거나 지나치게 더딜 때, 우리는 시간이라는 것을 감각한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지나가 버렸지?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는 거지? 우리가 이렇게 자문할 때는 벌써 뭔가 벌어지고 있다는 신호다. 이러한 어긋남의 감각,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우리는 평소 무심결에 지나쳐 보내던 시간을 비로소 의식한다.

이것은 흘러가는 강물 같다고 할 때의 그런 시간이 아니다. 이는 과거에서 미래로 흐른다고 가정되는 것이며, 세계 내 어떤 고정된 위치에 있는 증인을 전제로 할 때 성립되는 얘기이다. 하지만 배를 탔을 때를 생각해보자. 흐르는 강물은 과거가 되어버리고, 미래는 오히려 새롭게 만나는 강어귀의 풍경에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시간은 사물과 나와의 관계에서 탄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시간은 음악에서의 박자 감각이나 시계처럼 측정되는 그러한 성격의 것과도 다르다.

어쨌든 이러한 시간 감각은 나를 일깨우며 나에게 유의미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안정적인 고정불변의 해답이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안타깝지만 훌훌 털어버리기도 하는, 혹은 그래서 더욱 향유하고자 하거나 욕망하기도 하는 그런 것일 수 있다. 최근 공연된 이양희의 ‘더스크(Dusk)’와 하상현의 ‘아이소메트릭(Isometric)’이 주목되었던 것은 흔치 않게 이러한 시간에 대한 각성과 욕망을 기꺼이 감당해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더스크’, 경계에서 오는 시간의 자극

‘더스크’ ©김재범

안무가 이양희의 ‘더스크’(8월 11일, 아트선재센터 전시장 2층)는 말 그대로 어스름의 시간을 의미하는 한편 경계에서 발생하는 교차적 시간 감각을 자극한다. 해가 지고 낮과 밤이 바뀌는 경계의 시간이란 어느 특정 시간대를 뜻한다기보다 사물과 나와의 관계에서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마치 어린 왕자가 석양을 보기 위해 계속해서 의자를 당겨 앉았듯이, 전시장 내 춤 움직임의 구성과 배치나 조명의 변화에 의해, 그리고 관객의 이동에 의해 그러한 시간이 수시로 호출 가능하다는 것이다.

정오에서 시작해서 해가 완전히 지고 난 다음인 8시까지 총 여덟 시간 동안 지속되는 공연으로, 물론 관객이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키리라고 기대할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전시장 중간마다 섬처럼 떠 있는 하얀 스티로폼 좌석을 건너다니거나, 바깥에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거나, 줄곧 벽에 우두커니 기대어 앉아, 가까이 왔다가 기둥 뒤로 보이지 않기도 하는 무용수(이양희)나 다양한 형태의 조명기를 들고 왔다 갔다 하며 설치하고 위치와 각도, 온오프를 수시로 바꾸는 출연자이기도 한 조명 디자이너(노명준)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공간을 진동시키는 사운드(류한길)의 개입을 느끼며, 어느 순간 뜬 눈을 다시 확인하면서 주시하게 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신체·빛·소리가 각각의 경계에서 빚어내는 무수한 조합은 일본 가무극인 ‘노’의 리듬 구조인 조-하-큐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한국 춤의 굴신 자세처럼 시작이나 발단의 단계인 ‘조’, 그리고 파괴 또는 발전을 나타내는 ‘하’, 빠름 혹은 절정의 ‘큐’는 각각 세 가지 매체를 통해 해석되고 조합되어 총 100개의 모듈을 만들어냈다. 그 경우의 수가 어떻게 드러나며 어떤 효과를 발생시키는지 세세하게 쫓을 수는 없지만, 사소하지만 어느덧 넘어가 있는 어스름의 시간학을 문득문득 드러낸다. 중단되었다가 어느새 시작해 있고, 요소들의 전환과 개입이 가쁘다가도 느슨한 촘촘함으로 끊임없이 변형된다.

이러한 가운데 두드러지게 포착되는 것은 공간 자체라고 할까. 다시 말해 이것은 일종의 ‘장소특정형’ 공연으로서, 빛의 배치와 거리에 따라, 느리거나 느닷없는 무용수의 개입에 따라, 공간은 좁혀지거나 확장되고 LED 빛으로 물들여지는 등 다양한 표정을 드러내며, 공간 그 자체를 새롭게 바라보게 만든다. 보통은 전시장으로 쓰는 이 공간을 이토록 충분히 즐기고 느껴본 적은 여태껏 없었던 것 같다. 해지는 저녁 하늘을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듯,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 언제까지라도 볼 수 있을 것 같은 공연이었다.

 

 

‘아이소메트릭’, 시간의 각성

‘아이소메트릭’

‘더스크’가 경계로부터 생성되는 전이의 국면들을 환기하고 즐기는 편이라면, 시간의 각성을 그것의 음화와 함께 보여준 작업은 하상현의 ‘아이소메트릭’(8월 31일~9월 2일, 문래예술공장 포켓갤러리)이었다. 작은 화이트큐브 내 미니멀한 입체 설치물과 결부된 퍼포먼스는 의외로 누와르적인 면모를 내포한다. 그것은 좁고 밝은 갤러리 공간이 바로 옆의 크고 어둑한 박스씨어터의 영상과 연계되면서부터다.

일단 ‘아이소메트릭’이 주목한 것은 제목 그대로가 나타내는, 정지 상태에 가깝지만 가장 활발한 에너지를 소비하는 신체의 상태이다. 한 회에 8명씩 입장하게 되어 있는 이 공연에서, 퍼포머들(강호정·임은정)은 전시장에 설치된 구부러진 원통이나 바닥에 켜켜이 쌓인 흑경, 스테인리스 봉이나 구형의 물체 등의 일상에서 찾아볼 수 있을 법한, 그러나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사물들과 접합되거나 동화되려 한다. 즉, 살아있지만 사물의 상태인 신체를 애써 구현하는 것이다. 그러한 불가능한 노력은 관객과 거의 코앞에 닿을 만한 공간 안에서 더욱 적나라하다. 유연한 재질의 원기둥을 곧추세우려는 손가락의 떨림, 반복적으로 바닥에 몸을 깔았다가 아래팔로 몸 전체를 버티면서 수반되는 미세한 진동이나 호흡의 기복이 감지되지 않을 수 없다. 사물이고자 하지만 사물 되기가 거부된 신체랄까. 시간은 한없이 느리지만 살아있는 신체를 재발견하게 하면서도, 한편 그 지난한 기다림은 다소 새삼스럽게 여겨지기도 한다.

‘아이소메트릭’

공연 도중에 퍼포머가 퇴장함에 따라 옆 공간으로 안내받으면, 극장을 측면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난간과 연결된다. 어느새 극장에 내려가 있는 퍼포머에 의해 마치 사과 속 벌레 구멍을 통과한 것처럼 시간의 차원 이동이 펼쳐진다. 극장의 영상 속 텍스트는 관객을 미래로 데려간다. 쿠키 그릇에 손을 대면 얼마만큼 쿠키가 먹고 싶은지 읽어내서 제공해주는 미래라니, 이젠 욕망조차 측정되고 통제된다는 것일까. 그것은 억지로 멈춤을 당한 교통사고의 신체 같은 사태일까. 진리임을 확인하고자 하나 결괏값이 어긋나버린 탈출한 실험 대상을 다시 잡아넣으려는 실험실의 과학자도 텍스트에 등장한다. 측량 불가능한 욕망조차 통제하려는 욕망, 살아 있음을 가두고 붙들려는 욕망이란 도착적임이 문득 환기된다. 이는 다시 이어지는 공연과 일종의 몽타주 효과를 일으키며, 이전의 그것 또한 이러한 욕망이 깔려 있던 것임을 의식하게 된다. 원통에 머리를 집어넣어 접합된 신체는 생경하면서도 사물화와 멀어지는 면면을 포착하게 하지만, 그것은 도착적 욕망에 의한 힘겨운 각성인 것이다. 이미 알지만 실제로 해보면 의외로 신선한 단계를 넘어 시간의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차원까지 끄집어내는 저력을 보여준 작업이다.

글 허명진(무용평론가) 사진 아트선재센터·하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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