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예브게니 키신이 들려줄 음악세계
별 생각 없이 고르는 물건이나 음식이라도 어떤 것을 취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오랜 시간의 신뢰감을 통해 믿을 수 있는 브랜드의 고유명사처럼 된 경우도 있다. 콜라, 햄버거, 운동화··· 각자 떠오르는 이미지나 상표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단순 비교는 절대 불가하지만, 30여 년의 세월 동안 최고의 퍼포먼스와 음악을 선보여 온 피아니스트의 무대를 떠올릴 때 예브게니 키신의 이름은 절대적인 신뢰를 얻은 지 오래다. 내한 때마다 이어지는 높은 관심, 아이돌급의 초고속 매진 세례가 단순히 높은 인기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덧 그의 이름은 반드시 가봐야 할 공연, 듣는 이들을 실망하게 하지 않는 믿음직한 브랜드가 되었다.
파데레프스키와 슈나벨을 길러낸 19세기 후반의 명교사 테오도르 레세티츠키는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서 타고나야 할 세 가지 조건을 문하생이 되고자 찾아온 학생들에게 질문했다고 한다. “당신은 천재였소? 당신은 유태인이오? 당신은 슬라브 혈통이오?” 말할 것도 없이 키신은 이 세 조건에 정확하고 놀랍게 들어맞는다.
모스크바의 인텔리 집안에서 태어난 키신은 두 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여 여섯 살 때부터 모스크바 그네신 음악학교에서 그의 유일한 스승으로 기록된 안나 파블로브나 칸토르에게 배웠다. 대부분의 애호가들이 그렇듯 나 역시 그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그야말로 ‘전설’의 연주인 1984년 3월 드미트리 키타옌코와 협연한 쇼팽의 협주곡 무대였다.
곧 이어 키신은 1988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이끄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송년콘서트에서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협연한 무대가 방송으로도 소개되며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는데, 이 연주는 카라얀이 남긴 실질적인 마지막 기록 중 하나였다.
키신은 이후 주빈 메타, 클라우디오 아바도, 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 등의 지휘자들과 협연하며 젊은 대가의 행보를 시작했다. 2000년, 클래식 음악 영화를 많이 남긴 감독 크리스토퍼 누펜은 키신의 비범한 재능에 영감을 받아 그의 놀라운 활동을 ‘The Gift of Music’이라는 다큐멘터리 DVD로 제작했다.
공연뿐 아니라 키신의 음반은 구매자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최고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가 받은 음반상과 영예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2006년 스크랴빈, 메트너,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집으로 그래미상 최우수 기악솔로연주 상을 받았고, 2007년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상을 받기도 했다. 2009년 그래미상 최우수 기악솔로연주(협주 부문)를 받은 음반은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과 3번의 탁월한 해석이었다.
거대하다기보다 단단하고, 화려하다기보다 흔들리지 않는 존재감을 지닌 예브게니 키신의 위상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나는 그가 음악가로서 매우 ‘단순한’ 행보를 걷고 있는 것을 첫 번째 원인으로 꼽는다.
SNS나 그 외 미디어를 통한 노출이나 인터뷰 등을 최소한으로 조절하는 그는 오로지 피아노 앞에만 앉아 있다. 베르비에 페스티벌을 포함한 일부 이벤트 성의 무대에서 동료들과 앙상블 연주를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실내악이나 새로운 콘셉트의 기획에도 나서지 않는다. 오직 피아노 건반에만 집착하는 듯 보이는 그의 이미지는 일견 답답하지만 한 분야에 대한 지독하리만큼의 전문성을 보장한다.
키신에 대한 글을 쓸 때마다 그가 지향하는 레퍼토리에 대해 언급했다. 어느 작곡가이건 예외 없이 생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전성기 때의 걸작들을 선곡하여 굵직한 성과를 뽑아낸다. 수많은 선배들이 쏟아낸 탁월한 해석들 앞에서 다시 한번 피아니즘의 마스터피스들을 다뤄야 하는 길은 참으로 어려운 길인 바, 텍스트를 정확히 재현하며, 창작 전후에 나타나는 작곡가들의 감성의 일면을 정확히 집어내는 그의 자세는 늘 확신에 차 있다. 작고 하찮게 보이는 음표들이라도 그 안에 들어있는 메시지를 조리있게 해체해 누구든 이해할 수 있는 논리로 풀어내는 그의 해석은 한결같이 강한 설득력을 띤다.
최고의 레퍼토리들과 정면 승부, 베토벤과 라흐마니노프
키신 독주회의 프로그램은 최고의 레퍼토리들을 통해 정면승부를 하는 그의 스타일이 드러난 동시에, 보색의 성격을 띠는 두 작곡가의 세계에 좀 더 깊이 있게 침투하려는 의도에서 이전까지의 옴니버스적 프로그램 구성과 차별된다. 다만 이번에도 시즌 중 무대에서 충분한 시간의 경험을 거친 후 음반으로 만드는 과정이 예상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1부에 올려질 베토벤 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는 최근 발매된 소나타와 변주곡 실황 앨범의 연장선으로 그 흐름을 짐작할 수 있다. 제아무리 노련한 피아니스트라도 겁먹을 수밖에 없는 곡이지만 갈고닦은 솜씨를 비교적 여과 없이 내보인 라이브 음원을 듣고 있자면 그가 능히 이 문제작을 요리할 수 있는 단계에 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유롭고 웅대한 악상으로 로맨틱의 문을 활짝 열고 해석한 소나타 3번과 변화무쌍한 진행 중에도 결코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은 32개의 변주곡 C단조 등은 실황의 생동감이 더해져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세련된 음색과 템페라멘트가 적절한 조화를 이룬 소나타 23번 ‘열정’이나, 의외의 절제미가 빛을 발한 소나타 32번도 키신이 베토벤의 의식 흐름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 있는지 알게 해주는 호연이다. 이미 오래전 마스터한 협주곡들에서도 키신만의 비범함은 두드러진다. 제임스 러바인과의 만남으로 화제를 모은 후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녹음 중 좋아하는 연주는 초기작인 소나타 2번 B♭장조다. 특별히 강변하지 않아도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생명력과 유연한 흐름, 탄력 있는 명인기의 향연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매력이 되고 있다. 콜린 데이비스와의 전집에서는 3번 협주곡이 가장 개성적이다. 우직할 정도로 무거운 템포를 고수하며 나타내는 당당한 품격과 고급스런 비장미는 이 유명한 곡에서 피아니스트가 뭔가 번쩍이는 ‘한 방’을 내놓아야 한다는 강박이 없이도 듣는 이들의 가슴을 휘저을 수 있다는 멋진 증거로 보였다.
베토벤 이후 무대는 라흐마니노프로 채워진다. 러시아의 적자 키신에게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선택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보리스 베레좁스키, 니콜라이 루간스키 등 동시대 러시안들의 활동과 비교했을 때 그의 디스코그라피에 라흐마니노프의 비중이 크지 않았다는 사실은 새삼스럽다. 주요 작품인 협주곡 2번과 3번 녹음은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조력자들과 만나 이루어진 명연들이다. 1988년 아직 소년기가 남아있을 당시 만들어진 협주곡 2번 C단조(발레리 게르기예프 지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유연한 흐름과 거기서 나오는 환상성은 작품의 본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서정성에 놀랍도록 많이 기여하고 있다. 세이지 오자와가 보스턴 심포니를 지휘해 실황으로 녹음한 협주곡 3번 D단조(1993년)는 드넓은 공명감각을 통한 스케일 설정과 상상력을 극대화해 표현한 기교의 향연을 통해 감상자들에게 짜릿함과 음악적 포만감을 동시에 전달한다. 아울러 낭만파 에튀드의 방점을 찍는 Op.39의 ‘소리의 그림’ 연습곡들은 묵직한 중량감으로 쇼팽, 리스트로부터 건너온 비르투오시티의 본질과 묘사 음악으로서의 색채감을 흥미롭게 포착해낸 바 있다.
이번 독주회에 키신이 고른 전주곡들은 작곡가의 영감과 의욕, 에너지가 최고조에 달했던 황금 시기의 걸작이다. 오랜 슬럼프 끝에 협주곡 2번으로 기사회생한 라흐마니노프가 전작인 Op.3-2보다 진일보한 음악성으로 내놓은 회심작이 Op.23의 열 곡이다. 쇼팽, 드뷔시 등의 프렐류드에서 영향받았으나 훨씬 규모가 크고 폴리포니적 다양성을 한껏 추구한 작품의 완성도가 무척 높다. 유명한 2번과 5번 등을 꾸준히 연주해 온 키신은 이번 무대에서 1번부터 7번까지를 쉬지 않고 들려준다. 아울러 Op.23에 비해 내성적인 매력이 강한 1910년의 Op.32(13곡) 중 그가 고른 세 곡은 이 작품집의 진정한 하이라이트로서, 환상곡풍의 대곡 10번 B단조, 호로비츠의 앙코르 피스로 유명한 12번 G#단조 등이 연주된다.
친숙하면서도 오리지널리티가 살아있는 독자적인 콘셉트와 프로그램 배치로 주목받곤 했던 키신의 네 번째 독주 무대가 어떤 그림으로 나타날지 기대를 모은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거대한 시각으로 보아 로맨틱 피아니즘을 열고(베토벤 ‘함머클라비어’), 또 닫은(라흐마니노프 프렐류드집) 걸작들을 한 무대에서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브랜드가 예브게니 키신이라는 것이다.
글 김주영(피아니스트, 음악 칼럼니스트)
PART 2 키신을 낳은 러시안 피아니즘의 역사
러시아는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매우 특이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지리적으로 보면 동아시아뿐 아니라 중앙아시아와도 밀접해 있어 다양한 문화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과거뿐 아니라 현재도 넓은 국토를 가진 러시아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노르웨이·핀란드·에스토니아·라트비아·벨라루스·우크라이나·조지아·아제르바이젠·카자흐스탄·중국·몽골까지 12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고 하니 그들이 접하는 문화의 폭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지리적 배경은 러시아의 문화를 매우 복합적이고 다채롭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데 이것은 음악 분야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또한 러시아는 전반적으로 추운 날씨가 더 많은 나라다. 이런 기후적인 조건 역시 그들의 기질을 만드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고 이런 점은 그들이 추구하는 음악적 가치에도 상당 부분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러시아는 피아노 연주계에도 가장 많은 피아니스트를 배출한 나라이며 그들의 피아노 주법은 세계의 피아노 연주계를 주도하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음악의 다양성과 독창성에 비추어 볼 때, 러시안 피아니즘을 몇 가지로 단순 정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또 그다지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피아니스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몇 가지 두드러진 성향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그들이 갖추고 있는 준비되고 훈련된 기교의 정교함이다. 이것은 어릴 때부터 전문적인 교육을 통해 기술의 연마와 완벽함을 중요시하는 러시아의 피아노 교육이 이룬 특별한 결과물이다.
러시안 피아니즘의 두 번째 특징은 추운 기후를 이겨내는 강인함과 근성이 그들이 구사하는 피아노 주법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러시아 피아니스트들의 직설적인 냉정함과 열정을 다한 자유로움을 들 수 있는데, 극단적인 성격의 이 두 요소가 함께 공존하며 만들어 내는 음악적 표현법이야말로 그들만의 독특한 연주 스타일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특징을 공유한 러시안 피아니즘의 계보는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대표적인 러시아 피아니스트들의 행보를 살펴보면 러시아 피아노 연주의 역사 역시 넓게 파악할 수 있다.
러시안 피아니즘의 두 산맥, 라흐마니노프와 스크랴빈
1870년 즈음을 현대 러시아 피아노 교육의 기초가 정립되고 방향이 확립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당시의 피아노 연주의 전반적인 흐름을 주도했던 대표적인 피아니스트로 모스크바 음악원의 니콜라이 즈베레프(Nikolai Sergeievich Zverev, 1832~1893) 교수의 제자들인 라흐마니노프(1873~1943)와 스크랴빈(1872~1915)을 꼽을 수 있다. 같은 문하에 있었음에도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진 두 피아니스트 중 스크랴빈은 바그너의 영향으로 급진적인 스타일을 선호하면서 자신의 독창적인 화성 위에 신비주의를 첨가해 독특하지만 호불호가 확연하게 갈리는 음악 세계에 심취했다. 반면, 라흐마니노프는 전통적인 독일식 피아니즘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러시아 특유의 낭만적 심미안을 추구한 피아니스트였다. 라흐마니노프는 리스트와 공부한 적이 있었던 사촌인 알렉산더 질로티에게도 피아노를 배웠는데, 그런 영향 때문인지 그의 음악은 리스트의 낭만성이 충만한 피아노 비르투오시즘을 20세기 어법으로 재해석하여 후기 낭만주의의 주법을 완성하면서 근대 피아노 주법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연주는 깨끗하고 기교적인 연주로 평가되는데 정확성, 리듬감 있는 추진력, 독특한 스타카토의 다양한 사용, 복잡한 구성을 연주할 때에도 흔들림 없이 유지되는 명확성 등이 그의 연주의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주로 자신의 작품을 많이 연주했지만 19세기의 낭만주의 피아노 작품들의 명해석자이기도 한 라흐마니노프는 선천적으로 매우 큰 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신체적 장점은 복잡한 화성을 가진 폭넓은 화음으로 구성된 패시지도 쉽게 연주할 수 있게 했고, 왼손의 기교는 특별히 강력했다.
라흐마니노프는 악보에 적힌 작곡가의 지시어에 매우 충실했고 결과적으로 명료한 해석이 가능했으며 이것은 그의 작품을 연주하는 다른 연주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요구하고 있다. 광범위한 오페라의 경험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선율에 대한 라흐마니노프의 집착은 프레이즈의 길이나 구성의 복잡함과 관계없이 음악적으로 노래하는 선율을 만들어 낼 것을 요구한다. 이런 특별한 강점을 가진 라흐마니노프 주법의 탁월함은 그가 작곡가적 시각으로 작품을 바라보고 분석하는 것에 기초한 결과라 할 수 있고 이것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정통한 연주해석의 근간이 되고 있다.
라흐마니노프에 비해 피아니스트로서의 영향력보다는 작곡가로 더 명성을 얻은 스크랴빈의 음악이나 그의 피아노 주법은 일반적이기보다는 구분되는 마니아층을 형성한다. 이것은 스크랴빈이 가진 독특한 개인적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철학에 큰 흥미를 가지고 각종 철학 서적을 섭렵하면서 니체 철학에 심취하여 초인사상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 후, 신비주의적인 철학을 접하면서 음악과 철학의 융합을 시도하게 되는 시점을 시작으로 스크랴빈의 음악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그의 피아노곡 특징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왼손의 난도가 매우 높다는 것인데 이는 스크랴빈이 과거에 무리하여 연습하다가 오른손 부상을 입었던 이유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에튀드는 왼손에서의 넓은 도약과 아르페지오로 종횡무진하게 움직일 수 있는 힘과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스크랴빈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작곡가인 쇼팽 역시 왼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지만, 쇼팽의 비교적 규칙적인 움직임과는 달리 스크랴빈 작품의 왼손은 박자의 분할이 상당히 특이하게 전개된다. 예를 들어 흔히 쓰는 셋잇단음표뿐 아니라 7분할, 9분할까지도 빈번하게 사용하는데 이런 왼손의 복잡한 분할은 넓은 화음을 오가는 오른손의 정박과 극단적인 대비를 이루는 엇박자 음형들과 함께 스크랴빈의 작품을 쉽게 접근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철저하고 계획적인 러시아 피아노 교육
라흐마니노프와 스크랴빈외에도 콘스탄틴 이굼노프(Konstantin Nikolaievich Igumnov 1873~1948), 라자 베르만의 스승으로 알려진 알렉산더 골덴바이저(Alexander Borisovich Goldenweiser, 1875~1961), 리흐테르와 에밀 길렐스를 키워낸 전설적인 교육자였던 하인리히 노이하우스(Heinrich Gustavovich Neuhaus, 1888~1964) 등은 20세기 초 사회주의 혁명 전후의 러시아 피아노 교육과 연주계를 견인해 갔던 중요한 인물들이다. 또한 펠릭스 블루멘펠트(Felix Mikhailovich Blumenfeld, 1863~1931)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마리아 그린베르크·시몬 바레르의 스승이었고, 전통을 중시하는 엄격한 분위기 속에서 악보의 치밀한 분석과 작곡가의 의도를 찾아내어 전달하는 사실주의적인 연주의 전통을 마련했다.
이들 가운데에서도 러시안 피아니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는 피아니스트 가문으로 유명한 집안의 일원이었던 하인리히 노이하우스였다. 그는 독일과 폴란드의 혈통을 이어받은 러시아인이다. 피아노 교사였던 부모가 있었지만 자신은 부모에게 교육받지 않고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웠을 만큼 독립적인 기질과 탁월한 재능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만의 개성을 낭만적 기질과 예민한 프레이징, 독창적 해석 등으로 표현했고 야코프 자크·레프 나우모프·이고르 주코프·블라디미르 크라이네프 등 셀 수 없이 많은 러시아 피아노연주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의 아들 또한 당시에 유명했던 피아니스트였고 1985년에 쇼팽콩쿠르에서 우승하며 혜성처럼 나타나 2000년대 초반 가장 활발하게 연주했던 스타니슬라프 부닌(Stanislav Bunin, 1966∼)이 바로 그의 손자인 것은 아직도 화제로 떠오를 만큼 명문 음악 가문이 되었다.
이런 음악 가문들이 나타날 만큼 러시아의 연주계는 근대 공연 무대에서 세계적인 수준으로 인정받았고 이것은 국제 콩쿠르에서 빛나는 결과물로 나타났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콩쿠르는 전문 연주자들의 등용문이 되면서 커리어를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과제였다. 오랜 세월을 통해 이어진 러시아 피아노 교육은 국제 콩쿠르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게 되는데 이는 정부의 직접적인 개입과 주도하에 이루어지는 철저하고 계획적인 엘리트 교육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제도적 장치와 개인의 노력은 그리고리 소콜로프·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에밀 길렐스 등 뛰어난 연주자들을 줄줄이 배출해 냈다.
금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리흐테르와 에밀 길렐스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Sviatoslav Teofilovich Richter, 1915~1997)는 러시아-독일 혈통을 지닌 인물로 지금은 우크라이나로 독립한 지역에서 성장했다. 20세기에 활동한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의 하나로 반드시 언급되는 그는 피아니스트이자 오르가니스트, 작곡가였던 아버지 테오필 리흐테르와 러시아 지주 집안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테오필 리흐테르가 오데사 음악원에서 교사로, 루터 교회에서 오르가니스트로 재직했던 1920년대 초부터 아들 스뱌토슬라프 역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아버지로부터 음악의 기본만 배운 리흐테르는 독학으로 피아노를 알아가고 습득했다.
어린 시절부터 리흐테르는 초견에 뛰어났으며 지역 오페라단과 발레단에 반주를 맡았다. 15세부터 오데사 오페라단에서 리허설 반주 일을 시작할 만큼 실력이 탁월했다. 1934년에 첫 연주회를 시작했으면서도 정작 그가 공식적으로 피아노를 공부한 것은 3년 후부터라고 한다. 리흐테르가 모스크바 음악원의 피아노 교수 하이겐리히 네이가우스에게 가서 쇼팽의 발라드 4번을 연주했을 때, 네이가우스의 반응이 흥미롭다. 그는 주변에 함께 있었던 동료들에게 “이 사람은 천재”라고 말했다는데 이것은 쇼팽의 연주를 처음 들었던 슈만의 반응과 매우 흡사하다. 에밀 길렐스·라두 루푸 등 수많은 피아니스트의 스승이었던 네이가우스가 리흐테르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은 평생을 기다린 천재적인 제자”라고 말했다 하니 이 특별한 제자에 대한 스승의 경이감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리흐테르는 당시 엄격했던 사회주의적 정치에 냉담한 태도로 일관했고 음악원에서 필수로 이수해야 하는 정치 수업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음악원 첫해에 두 번이나 추방당한 이력이 있다.
정치와는 무관하게 오로지 음악 활동만을 고집했던 리흐테르가 서방 세계에 알려진 것은 1950년대부터 시작된 음반 활동을 통해서였지만 당시 냉전 중이던 미국에서의 활동이 허락된 것은 1960년이 지나서였다. 첫 미국 공연인 카네기홀의 콘서트 시리즈의 리흐테르 공연의 티켓은 짧은 시간에 매진되면서 미국에서 리흐테르의 연주는 큰 화제가 되었다. 이렇게 대중적인 인기를 끈 리흐테르였지만 정작 그는 작고 어두운 홀이나 작은 램프만 비춰지는 보잘 것 없는 장소에서의 즉흥적인 연주를 선호했다.
그의 연주 레퍼토리 범위는 헨델과 바흐의 시대인 바로크부터 20세기 작품들까지 총망라할 만큼 광범위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특히 슈만 작품에 대한 뛰어난 해석과 통찰은 금세기 최고의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악보를 놓고 연주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던 리흐테르는 작품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늘 진지하고 겸허한 연주자였다. “연주자는 작곡가의 의도를 전달하는 집행자이다. 작품에 있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재능 있는 연주자라면 작품의 진실한 면모를 연주자의 모습을 투영하며 보여줄 것이다.”라는 리흐테르의 말이 오늘날 연주자들에게 던지는 의미가 크다. 12도가 닿는 큰 손이 구사하는 뛰어난 기교, 시적인 프레이징을 비롯하여 불가능할 정도의 큰 레퍼토리를 가진 리흐테르였지만 피아노 앞에서의 진지함은 듣는 사람들조차 숙연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고 이것은 러시아 피아노 연주에 품격을 높인 가장 중대한 원인이다.
역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성장한 에밀 길렐스(Emil Grigoryevich Giles, 1916~1985)도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이다. 테크닉의 기본을 확고히 하기 위한 엄격한 훈련을 받았던 길렐스는 12살에 첫 번째 공개연주를 시작했고 1933년 모스크바에서 제1회 올 유니온(All-Union) 콩쿠르에서 만장일치로 1등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전국으로 연주 여행을 시작하였다. 콩쿠르가 배출한 전형적인 유명 피아니스트인 길렐스는 1936년 빈 피아노 콩쿠르 2위, 1938년에는 현재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전신인 이자이 페스티벌에 참가해 1등상을 수상했다. 당시 미국 망명중이었던 라흐마니노프는 길렐스의 연주를 라디오로 들었고 길렐스를 피아노의 계승자로 지명하고 훈장과 졸업장을 보낸 것은 매우 유명한 일화이다. 뛰어난 기술과 기교는 다른 러시아 명인들과 다를 바 없지만 길렐스만의 독특한 반짝이는 톤은 누구도 모방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이다. 모든 시대를 아우르는 폭넓은 레퍼토리 중에서 특히 베토벤·브람스·슈만의 해석에 정통한 길렐스는 강철과 같은 힘 있는 타건과 명확한 분석력으로 그만의 연주 스타일을 만들었다. 길렐스 피아노 연주의 결정체를 들을 수 있는 베토벤 소나타 전곡 녹음 중에 갑작스럽게 사망하여 더욱 안타까운 연주자로 기억된다.
러시안 피아니즘의 계보를 잇는 예브게니 키신의 등장
이렇듯 엄청난 재능과 성과를 이룬 기라성 같은 피아니스트들의 뒤를 이어 미하일 플레트네프(Mikhail V. Pletnev, 1957∼), 보리스 베리좁스키(Boris Berezovsky, 1969∼) 등이 차이콥스키 콩쿠르와 리즈 콩쿠르에서 상위 입상함으로 세계무대에 등장했지만, 러시안 피아니즘의 계보를 빛나게 한 가장 충격적인 인물은 20세기 후반에 혜성처럼 나타난 예브게니 키신((Evgenin Kissin, 1971∼)으로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다른 피아니스트들과는 달리 국제 콩쿠르를 거치지 않고 바로 신동 피아니스트로 출발한 키신은 두 살이 되기 전부터 들리는 모든 음을 피아노로 연주할 수 있었던 천재였다. 10세에 협연을 시작으로 11세에 첫 독주회를 할 수 있었던 키신은 20세기가 낳은 가장 비상한 천재로 평가된다. 그러나 키신에게 주목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저 잠깐 빛나며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신동에서 천재로, 천재에서 진지한 연주자로 계속 성장하여 이제 40대의 중후한 음악세계를 가지고 대중 앞에 설 수 있다는 점이다. 혹자는 키신의 연주를 완벽한 기교로 무장하고 치밀하게 기획된 연주로 라이브 연주의 아찔한 즉흥성이 결여되었다고 하기도 하지만 키신의 연주가 빛나는 것은 바로 그렇게 일관되게 음악에 몰입하고 치밀하게 매진하기 때문이다. 음악에 임하는 자세와 철학에는 변함이 없지만 끊임없이 성장하여 탁월한 어른의 연주로 거듭날 수 있는 용기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일관된 음악적 가치가 청중으로 하여금 키신에게 다시 열광하게 한다.
이런 음악적 가치는 키신 이후의 러시아 피아노계보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하고 그 기대에 부응하는 젊은 피아니스트들이 나타나고 있다. 아르카디 볼로도스(Arcadi Volodos), 니콜라이 루간스키(Nikolai Lugansky), 드미트리 마슬레예프(Dmitry Masleev), 데니스 마추예프(Denis Matsuev), 알렉산더 코브린(Alexander Kobrin), 다닐 트리포노프(Daniil Trifonov)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많은 피아니스트와 그들의 뒤를 잇는 신예들이 지금도 계속 배출되고 있는 것이 러시아 피아노 교육의 저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마법 같은 연주는 때로는 열정으로, 또 때로는 냉정한 기교로 세계의 청중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이런 마법의 재현을 향한 기대가 키신의 네 번째 내한 공연을 설렘으로 기다리게 하는 이유가 아닐까?
글 최현숙(피아니스트, 침례신학대 교수)
PART 3 음반으로 듣는 키신의 발자취
예브게니 키신의 음반을 보면 바흐부터 흐레니코프까지 섭렵하고 있지만, 사실상 슈베르트·쇼팽·슈만 등 19세기에 과몰입되어있다. 심지어 바로크 음악은 바흐가 유일하며, 현대음악은 전혀 손대고 있지 않다. 많은 연주를 감당해야 하는 스타 연주자에게 일반적인 모습이기는 하지만, 그의 기량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는다.
하이든과 슈베르트
키신은 고전시대를 대표하는 세 작곡가인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을 모두 녹음했다. 하지만 하이든은 다른 두 작곡가보다 비중이 현격히 적다. 17세인 1988년에 녹음한 피아노 협주곡 11번, 그리고 23세인 1994년에 녹음한 피아노 소나타 45번 A장조, Hob.(흔히 쓰는 작품번호 Op.는 곡의 출판된 순서를 나타내는 것이고 Hob.는 하이든의 작품을 정리해 A.V.Hobok란 사람이 만든 개념으로서 작곡 순서를 표현하는 단어다) XVI:30과 피아노 소나타 62번 E♭장조 Hob. XVI:52이 전부. 하지만 그의 기량은 시대와 작곡가에 구애받지 않고 고르기 때문에, 해석에 대해 우려할 필요는 없다. 피아노 소나타, Hob. XVI:52는 하이든의 마지막 소나타로서, 개량된 피아노가 갖는 중후한 화음을 맘껏 활용하는 작품이다. 키신은 이 할 것 많은 작품에 신중한 접근을 취하고 있는데, 음악적 위트에 무게감이 지나치게 실리지 않도록 조절한다. 이것은 앞의 작품과 지나치게 비교되지 않게 하는 효과가 있는데, 하나의 앨범 또한 하나의 작품이라는 측면에서 설득력이 있다.
이와 함께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A단조 D784가 함께 수록되어있다. 반복되는 특징적 패시지에 나름대로의 성격을 부여하고 퍼즐을 맞춰가는 진행은, 슈베르트 특유의 고독과 방황에 대한 공감보다는 이 곡을 정복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먼저 보이게 한다. 그럼에도 그의 연주는 슈베르트가 주제의 발전이 아니라 주제의 반복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는 하나의 해법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모차르트
키신은 모차르트에 많은 관심을 보인 편은 아니다. 무대에서 협주곡을 종종 연주하기는 하지만, 녹음은 몇 곡뿐이다. 20세 전후에 12번과 20번, 한참을 지나 35세 때 24번, 2년 후에 20번과 27번을 녹음했지만, 최근 10년 동안에는 새로운 녹음을 내놓지 않았다. 그럼에도 최근 모차르트 녹음에 특히 주목하는 이유는 키신이 직접 지휘했기 때문이다.
피아노 협주곡 20번은 D단조라는, 모차르트에게 흔치 않은 조성이기에 자주 언급된다. D단조의 경우 오페라 ‘돈 조반니’ 중 지옥 장면과 ‘진혼곡’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아, 모차르트에게는 죽음의 상징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 시작과 함께 무섭게 달려드는 관현악 서주 부분은 ‘돈 조반니’의 한 장면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이다. 하지만 키신의 피아노 연주는 관현악에 동참하기보다는 관조한다. 아기자기한 패시지들을 돋보이게 하고 서정적인 선율에 더욱 집중하는 모습은 어린 시절의 연주 스타일과 많이 다르지 않아 보이지만, 극적이기보다는 고전적인 표현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카덴차는 베토벤의 것을 사용했다. 피아노 협주곡 27번은 모차르트의 마지막 피아노 협주곡으로, 피아노의 활약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래서 보통 피아노를 화려하고 돋보이게 연주하곤 하지만, 키신은 오히려 앙상블의 일원으로 위치시킨다. 이것은 직접 지휘를 하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라고 생각된다.
베토벤
최근에 다섯 곡의 소나타를 두 장의 음반에 수록한 앨범을 발매하여 그가 바라보는 베토벤을 훑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에게 베토벤의 소나타는 아직 도전과제에 머물러 있다. 키신은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회에서 베토벤 ‘환상곡’의 솔리스트로 등장했다. 하지만 그가 베토벤을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1997년이 되어서였다. 제임스 러바인이 지휘하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전격적으로 피아노 협주곡 2번과 협주곡 5번 ‘황제’를 녹음한 것이다. 이후로 소나타와 소품을 연달아 내놓았으며, 2008년에 콜린 데이비스가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와 함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내놓기에 이른다. 만 25세의 청년이 베토벤 협주곡에서 추구하는 가치는 거칠 것 없는 과감함과 젊음으로 무장된 산뜻함보다는, 이미 완숙의 경지에 이른 앙상블로서의 조화였다. 느린 악장에서는 비교 대상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의 진심 어린 감성을 전달한다. 이러한 특징은 심지어 ‘황제 협주곡’에서도 나타난다. 첫 아르페지오부터 강렬하고 압도적인 분위기가 아닌, 구도자의 발걸음으로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쇼팽
키신이 오늘날과 같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1984년의 실황 연주가 1986년에 발매되면서였다. 바로 드미트리 키타옌코가 지휘하는 모스크바 필하모닉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연주한 쇼팽의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 음반이다. 소비에트 키즈를 상징하는 붉은 머플러를 목에 매고서 고개를 약간 치켜들고 지그시 눈을 감은 매끈한 소년의 연주 사진도 인상적이었지만, 당차게 등장하는 피아노 소리가 이 앳된 소년의 손에서 나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이 음반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이후 키신은 곧 쇼팽으로 통했다. 그래서 많은 연주회에서 쇼팽을 연주했고, 음반 또한 쇼팽에 집중되었다. 초기에는 마주르카와 여러 소품을 녹음했다면, 1998년에 녹음한 네 개의 발라드와 이듬해 24개의 전주곡으로 쇼팽에 보다 진지해졌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2004년 베르비에 음악제에서 네 곡의 폴로네이즈와 세 곡의 즉흥곡, 그리고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즉흥환상곡’을 연주하여 또 하나의 완벽한 쇼팽 프로그램과 앨범을 선보였다. 폴로네이즈에서 그는 낭만적 표현에 집중하며, 다양한 루바토를 구사하여 자신의 음악을 만들어낸다. 함께 녹음된 즉흥곡들은 빠른 속도와 밝은 분위기로 폴로네이즈와 대비된다. 하지만 대비의 폭은 그다지 크지 않은데, 이 프로그램 전체를 진지하게 진행하고자 하는 키신의 의지가 보이며, 그러한 점에서 매우 성공적이다. 그래도 ‘즉흥환상곡’은 모두가 기대하는 화려함 그 자체를 들려준다.
슈만
키신이 쇼팽 다음으로 자주 녹음한 작곡가는 리스트와 슈만이었다. 그런데 리스트로는 단 한 장의 단독 음반도 없다. 반면 키신은 2001년에 소나타 1번과 ‘카니발’을 수록한 슈만 앨범을 녹음했다. 이전에 ‘아베크 변주곡’ ‘교향적 연습곡’ ‘크라이슬러리아나’ ‘환상곡’ ‘아라베스크’ 등을 오랫동안 차근차근 섭렵하면서 슈만을 정복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쇼팽 컬렉션처럼, 후에 이들을 모아 슈만 컬렉션 음반이 발매되기도 했다. 이 와중에 발매된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가 지휘하는 빈 필하모닉과 협연한 피아노 협주곡의 1992년 실황 앨범은 그가 한 단계 성장한 계기가 되었다. 만 20세 키신의 연주는 정확하고 명료한 타건이 돋보인다. 이러한 스타일은 이후 협주곡 녹음들과 비교하면 어린 시절의 모습이 남아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슈만의 성격 강한 화음과 봐주지 않는 관현악 음량과의 경쟁을 위해 필요하기도 하다. 음악을 리드하기보다는 줄리니에 이끌리고 있다는 인상도 지울 수 없는데, 2006년에 콜린 데이비스가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이 곡의 두 번째 녹음에서 음악을 리드하는 여유 있는 모습과 사뭇 비교된다.
프로코피에프
키신은 러시아 출신으로서 러시아 레퍼토리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라흐마니노프·스크랴빈·프로코피에프에 관심을 가져왔고 음반도 여럿 남겼다. 라흐마니노프의 경우는 피아노 협주곡 2·3번과 연습곡을, 스크랴빈의 경우는 소나타 3번과 여러 소품을, 프로코피에프는 소나타 6번과 피아노 협주곡 1~3번 및 여러 소품을 녹음한 음반들이 있다. 일반적으로 자주 연주되는 차이콥스키와 쇼스타코비치는 피아노 협주곡 1번만을 녹음했다. 그래도 키신의 러시아 레퍼토리에 대한 접근은 유럽의 고전이나 낭만과는 사뭇 다르다. 어떠한 기준이나 공통의 가치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직감에 대한 확신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2008년 1월 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가 지휘하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연주한 프로코피에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과 3번의 실황 녹음에서 이러한 모습이 눈에 띈다. 독주 분량이 많은 피아노 협주곡 2번에서는 첫 주제의 연주에서부터 남다른 긴장감을 지속하고, 제2주제에서도 감각적으로 음악을 리드하면서 신뢰감을 준다. 피아노 협주곡 3번에서는 강력한 에너지가 바탕에 있으면서도 시나리오에 의존하여 과장되지 않고 음악적인 범위 안에서 적극적인 표현이 이루어지는 것에서, 키신의 수준 높은 예술적 감각을 보여준다.
티혼 흐레니코프
키신이 녹음한 작품 중 가장 최신의 작품은 티혼 흐레니코프가 1972년에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2번일 것이다. 흐레니코프는 1948년에 스탈린에 의해 소련작곡가연합의 총서기장에 임명된 후 소련이 해체된 1991년까지 무려 43년간 자리를 유지한 인물로, 소련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작곡가였다. 그는 쇼스타코비치 등을 ‘형식주의’라는 이름으로 비판했던 데 앞장서는 등 증오의 대상이었는데, 놀랍게도 소련 해체 이후에도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남아있었고,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영향력을 유지했다. 키신이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가 지휘로 흐레니코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한 것은 1988년으로, 아직 소련이 존재했던 때였다. 이 앨범은 모스크바 방송국 소속의 차이콥스키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소련의 신동들과 함께 제작한 것으로, 독주자로 이름을 올린 키신과 바딤 레핀은 17세였으며, 막심 벤게로프는 불과 14세였다. 키신은 강력한 타건과 명확한 리듬을 들려주며, 쉬지 않고 이어지는 음표들의 공세에도 전혀 흐트러짐 없이 돌진한다. 또한 불협화음과 같은 두드러지는 음들을 분명하게 드러내어 곡의 극적 흐름을 자극한다.
글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