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WAY
베토벤의 세 개의 후기 소나타로 무대 서는 그가 고백하는 새로운 음악 인생의 비전들
누구나 한번쯤 인생을 반추하게 되는 때가 있다. 베토벤의 음악은 앞만 보고 달려가는 우리를 뒤돌아보게 하는 힘을 지녔다. 평생 자신의 비극적인 삶에 대한 투쟁의지를 불태웠던 그였지만 후기에 들어서 남긴 그의 작품들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면서도 고뇌를 초월해 천상의 세계 속으로 날아오르는 아름다움을 담아내고 있다. 베토벤은 말년에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인류 음악사의 보석으로 남은 마지막 3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남겼다. 김대진의 이번 독주회는 어쩌면 쉼 없이 달려온 자신의 음악 인생을 돌아보고 다시 시작되는 여정 앞에서 선 자신에게 보내는 고백의 음성일지 모른다.
가을 풍경이 아름다운 연구실에서
그에게 근 2년간은 다사다난했다는 표현이 가장 어울렸던 해였다. 2017년 1월 대원상 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지만 그해 봄에는 10여 년 동안 정들었던 수원시향을 떠나는 아쉬움도 있었다. 그후 12월 창원시향의 지휘봉을 잡게 되었고 이듬해 3월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의 음악원장이 되었다. 쉴 새 없이 지나가 버린 2년. 이제 그는 새롭게 시작된 인생의 여정 앞에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음악가 베토벤을 만나려 한다. 비장미가 흐를 줄 알았던 그의 얼굴은 오히려 평온해 보였다.
“연구실에서 바라보는 가을 풍경이 참 근사하지요? 하지만 통유리라서 여름엔 무척 덥고 겨울엔 정말 춥답니다.(웃음) 그래도 넓게 펼쳐진 예술의전당 전경과 변해가는 자연의 풍경을 볼 수 있으니 축복이지요. 이렇게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면 복잡한 생각들이 많이 정리되고 평화로워집니다.”
일주일 동안 창원에서 오케스트라 연주 준비를 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낸 그는 작년부터 창원과 서울을 오가는 숨가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창원시향은 ‘통합’과 ‘화합’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며 꾸준한 기획 연주를 통해 좋은 평가를 받아온 음악 단체다. 그는 1년 동안 단원들과 함께 음악을 만들어 가면서 그들의 열의와 몰입도에 많이 놀랐다고 한다.
“음악적인 부분에서는 워낙 열심히들 하니까 그동안에도 괄목할 만한 성장이 있었다고 느껴집니다. 하지만 모든 오케스트라가 그렇듯이 어떤 단체가 온전히 자립해 서기 위해서는 음악적인 내용만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여러 문제들이 존재하지요. 특히 시에 속해 있는 오케스트라의 발전을 위해서는 음악을 잘 아는 행정가들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오케스트라가 스스로 자생력을 키울 수 있도록 전문적인 행정 시스템이 만들어지는 것이 급선무이지요.”
안으로는 자신들만의 오케스트라 사운드의 전통을 쌓고 밖으로는 효율적인 행정 시스템을 만들어 오케스트라가 자생력을 갖출 수 있도록 돕는 것. 김대진은 이것이 자신이 그리는 이상적인 오케스트라 경영이라고 말한다.
“지휘자는 오케스트라가 쌓은 전통 위에 자신의 음악적 특성과 철학을 가미해야 하지요. 그렇기에 지휘자로서 궁극적으로 이루고 싶은 것도 창원시향만이 갖고 있는 전통 위에 제 음악적인 색채를 더해 조화롭게 이끌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나라의 시향 음악감독은 음악적인 내용 뿐 아니라 행정 등 여러 역할을 해야 하는 어려움에 빠져 있다고 우려했다. 세계적으로도 전문성을 강조하는 시대인 만큼 각자의 분야에서 전문가들이 활약을 해야 오케스트라도 더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다행히 요즘은 음악을 잘 이해한 행정가들이 많아졌고 능력 있고 젊은 지휘자들의 활동도 늘어나 앞으로 우리나라 오케스트라의 운영에도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세계 속의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위하여
올해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장을 맡게 된 그는 특히 2018년 한예종이 개원 25주년을 맞으면서 더없이 바쁜 시간을 달려 왔다. 올 한 해 동안 개원 25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들이 펼쳐졌고, 12월 6일에는 오페라 공연 ‘박쥐’도 무대에 오른다. 지난 9월 30일 김대진은 손민수, 이진상, 문지영을 비롯해 피아노과 재학생들이 함께 피아노 오케스트라 무대에 섰다.
“평생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무대였지요.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에 나오는 특유의 리듬을 피아노로 살려낸 것은 정말 획기적이었고요. 편곡도 무척 훌륭해서 모두가 만족했고,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음악관이 뚜렷하고 진실한 사람들과는 결국 음악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는 그는 이제 교육자에서 학교를 이끄는 리더로 더 큰 숲을 가꿔야 하는 책임을 안게 되었다.
“음악원장이 되면서 생각한 건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앞으로 나가야할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25년 전 모든 교수들이 공유했던 생각은 ‘한예종을 유학을 갈 필요가 없는 학교’로 만드는 것이었지요. 이제 앞으로의 25년은 ‘외국에서 유학을 오는 학교’로 만드는 것을 비전으로 모두의 힘을 모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러한 비전을 공유하며 한예종은 해외 교류의 기회를 늘려 현재 동경예술대학교를 비롯해 인디애나, 콜번, 커티스 등 외국 대학과의 교류를 활발히 하고 있다. 내년부터는 유명 아티스트의 스승을 초청해 연주회와 마스터클래스 등을 가질 예정이다.
“한 번의 만남으로는 어떤 것도 연결되기가 쉽지 않지요. 함께 연주하고, 가르치고, 얘기를 나누는 과정 속에서 여러 요소가 자꾸 쌓이다 보면 우리나라에 해외 클래식 음악 시장이 자연스럽게 만들어 질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세계 속의 학교, 세계 속의 오케스트라, 세계 속의 한국으로 더 넓혀갈 수 있을 거라 확신하고요. 이제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그동안 씨를 뿌려 가꾸고 많은 열매를 맺었다면 지금부터는 그 나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울창한 수목원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역량을 모아야겠지요.”
천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우주의 언어
아이러니하게도 이 무거운 짐을 진(?) 그가 또 하나의 짐을 더해 오는 11월 2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세 곡으로 독주회를 갖는다. 피아니스트에게는 언젠가 넘고 싶은 베토벤 인생 역정의 세 개의 소나타들은 베토벤이 죽음과 상실의 고통 속에서도 초월을 향한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던 승리의 증거이기도 하다. 김대진은 그의 30·31·32번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하며 베토벤의 영적인 탐구에 동참한다.
“2년 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작품만으로 독주회를 했을 때 저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베토벤 후기 소나타 세 곡은 피아니스트라면 언젠가 무대에서 연주하고 싶은 곡들이지요. 사실 음악적인 면에서는 더 시간이 흐른 뒤에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테크닉적인 면에서 시간이 흐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 연주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연주는 자신을 가장 많이 닮기 마련이고 결국 본인 자체가 음악이어야 하지요. 이번 무대 역시 그동안 제가 겪었던 지금까지의 삶의 다양한 경험들이 어우러져 음악들 속에 자연스럽게 표현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는 오케스트라 지휘 활동이 음색의 변화를 느끼고 만들어내며 음악의 폭을 넓히는 면에서 큰 도움이 되었고, 직접적으로 피아노를 통해 음악을 표현하는 데에도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다고 말했다.
“베토벤의 마지막 소나타들은 고전주의 형식에서의 변화를 시도하고 푸가 등의 형식 뿐 아니라 연주기법에서도 낭만주의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어느 한 시대의 곡이라기보다는 모든 시대의 음악이라고 해야 할 만큼 현실의 음악이 아니라 영적인 교감으로 이루어진 음악입니다. 깊은 비탄의 순간에도 초월을 향한 베토벤의 의지가 승화되어 표현된 음악은 인생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걷는 모든 이들에게 큰 용기와 위로를 주지요. 그것이 베토벤 음악의 힘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건반위의 진화론자’라고 부른다. 그것은 김대진의 연주가 단 한 번도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고, 멈추지 않았으며 고이지 않았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는 계속 변하고 시도하고 도전하며 음악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연주자다. 예술이 한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라면 그가 걸어온 인생 여정이 어떤 길이었는지 이번 베토벤 음악이 말해 줄 것이다.
글 국지연 기자
김대진 피아노 독주회
11월 25일 오후 5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베토벤 피아노 30·31·32번 소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