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ORTRAIT
올 한해, 음악 안에서 피운 그의 수많은 이야기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으로 기억되는가, 그리고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살면서 무수히 되뇌는 이 질문은 수많은 생각과 고민을 낳는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생각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이루고, 미래의 나를 그리게 한다.
피아니스트 김태형, 무대에서 본 그의 첫인상은 ‘맑고 선한 사람’이었다.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도 없었던 때이지만, 그의 음악과 맑은 음색이 그를 따뜻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이후 다양한 무대에서 여러 차례 마주했던 김태형은 그때마다 조그마한 차이를 더해갔다. 맑고 부드러운 음색과 자연스러운 연주, 음악을 마주하는 진실된 발걸음은 여전했지만, 깊어진 눈동자만큼이나 그의 음악은 가을의 색을 닮아가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기분 좋게 스며드는 가을의 초입, 김태형과 다시 마주한 곳은 경희대학교 음악대학의 한 교수실에서였다. 올해 9월부터 경희대 음대 피아노과 교수라는 새로운 타이틀을 더한 그는 첫 솔로 음반과 트리오 음반 발매, 그리고 11월에 있을 독주회를 앞두고 또 다른 자신과 만나고 있었다.
김태형의 ‘초상’
‘Portrait’은 ‘초상’ ‘인물사진’이라는 사전적 의미가 있다. 단순히 누군가 혹은 무언가의 외적인 모습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와 더불어 내면적 기질이나 성격을 주로 보여주는 것을 말한다. 오는 11월, 소니 클래시컬 레이블을 통해 발매될 김태형의 첫 독주 음반에도 ‘초상(PORTRAIT)’이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앨범에 바흐 크로마틱 환상곡과 푸가 BWV903과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K333, 그리고 슈베르트 세 개의 피아노 모음곡 D946까지, 지금의 김태형으로 성장하기까지 그 과정을 함께해온 의미 있는 작품들이 담겨있다. “사람들이 현재의 나를 통해 듣고 싶은 곡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는 그는 내 몸에 꼭 맞는 옷처럼 가장 자연스럽고, 또 지금 이 순간에 꼭 남기고 싶은 작품들을 선택했다.
음반에 수록된 세 곡 모두 피아니스트 김태형의 성장과 함께해온 작품들이다. 세 곡 모두 내가 성장하는 데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나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작품들이기도 하다. 바흐 크로마틱 환상곡과 푸가는 한창 콩쿠르에 도전했던 시기에 좋은 성과를 가져다주었던 작품이고,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K333는 비르살라제 교수님과 공부한 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를 준비하며 배웠던 곡이다. 많이 혼나기도 하고 칭찬도 받으며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소나타로 애정이 깊다. 그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실황음반에 내 모차르트 소나타 연주가 실리기도 했다. 슈베르트 D946은 그 후에 만난 작품이다. 성악 가곡을 배우면서 작품에 어떻게 접근할 지 공부했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도 좋아하지만, 지금의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옷은 D946 같다. 그래서 지금 꼭 녹음으로 남기고 싶었다.
음반 녹음은 통영국제음악당에서 이루어졌다고. 원래 함부르크에서 녹음할 예정이었는데, 현지 사정상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다행히 비슷한 일정에 최진 감독님과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에서 녹음할 수 있었다. 3일 동안 하루에 6시간 정도를 오롯이 녹음에 집중했다. 워낙 힘든 과정의 연속이다 보니 지치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콘서트홀 밖으로 빠져나와 바다를 봤다. 서울보다 한결 따뜻한 날씨에 음악당 바로 옆에 펼쳐진 바다를 보며 다시 여유를 찾고 영감을 얻었다.
바로 어제(10월 11일) 막 녹음을 마쳤는데, 첫 녹음 작업은 만족스러웠나? 조율사 선생님부터 최진 감독님까지, 모든 작업이 너무 좋았다. 감독님이 내 연주를 들으며 “김태형은 슈베르트네!”라고 말씀하셨다더라. 그런 칭찬을 들으니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기대가 된다. 녹음하다 보면 집중도나 몸의 상태 등 모든 게 딱 잘 맞아떨어지는 때가 있는데, 바로 어제가 그런 날이었다. 이미 그 전날 모차르트 소나타 녹음을 다 마친 상태였는데, 감독님이 그런 내 컨디션을 캐치하시고는 한 번 더 연주해보라 하시더라. 그래서 다시 연주해봤는데 역시나 그 흐름이 무척 잘 나왔다. 뭘 해도 다 되는 날이었다. 신기한 경험이었고, 홀가분하게 녹음을 마칠 수 있었다.
이번 첫 음반에는 다양한 곡을 수록했지만, 연주자로서 집중해서 작업해보고 싶은 레퍼토리도 있을 것 같다. 바흐를 집중적으로 해보고 싶다. 리스트·부소니 등 다른 작곡가들이 편곡한 바흐 작품까지. 꽤 무게감 있는 프로그램으로, 내가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때 한다면 굉장히 의미 있을 것 같다. 또 하나는 프렌치 음악이다. 오랜 꿈이랄까?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번 녹음을 시작할 때도 ‘나답게’ 보람되고 좋은 시간으로 값지게 채우고, 그 순간들을 모아 음반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음반 발매와 더불어 11월 20일 예술의전당에서 개최할 독주회에는 한 곡이 더 추가됐다. 리스트 ‘스페인 광시곡’ S254는 최근에 익힌 작품이다. 전체적인 프로그램의 구성을 생각하다 보니 엔딩을 화려한 곡으로 마무리하면 좋을 것 같았다. 비르투오소적인 작품으로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지금의 나를 나타내는 것들
‘모든 아이는 예술가로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모든 인간에게는 예술적 잠재력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예술은 평생에 걸쳐 인간의 지적·정서적 발달을 위한 연료가 되며 창의적인 시대를 살아가는 힘이 된다. 한 개인뿐 아니라 사회 전체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예술이기에 이를 탐구하고 교육하는 이들의 역할 또한 매우 중요하다. 김태형도 이제 예술가의 또 다른 사회적 책임이라 할 수 있는 교육 분야에 더 깊은 한 걸음을 내디뎠다. 경희대 음대 정교수로 임용된 것은 불과 두 달 전의 일이지만, 이미 그는 이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한 수많은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교수’라는 새로운 타이틀이 주는 무게감이 있을 것 같다. 20대의 이 시간은 학생들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그 중요함을 알기 때문에 그냥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단순히 레슨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인생에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내게도 서로를 받아들일 공간이 충분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에 교수로 임용되기 훨씬 이전부터 스승으로서의 역할과 마음가짐에 대한 고민은 물론, 어떤 식의 교육방법이 학생들에게 더 도움이 될 것인가를 연구하며 준비했다. 다른 마스터클래스나 레슨을 보면서도 ‘내가 저 자리에 앉아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줄 것인지’를 생각해 보는 등 이런 타이틀에 대한 준비는 일찍부터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내 티칭에 대한 학생들의 피드백도 좋았다. 아무리 연주력이 좋아도 꼭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이 부분은 내가 받은 재능 중 하나인 것 같다.
여러 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피아니스트로서의 경험도 중요하게 작용할 것 같다. 이전에 교육과 연주, 이 두 가지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생각했던 것이 우리 세대에서는 달라졌다. 사실 이런 분리 방식은 우리나라에서 유난히 자리매김한 인식인 것 같다. 강충모 선생님, 엘리소 비르살라제 선생님도 계속해서 교육과 연주를 병행하고 있고, 러시아만 보아도 연주를 못하는 선생님은 있을 수도 없고 음악계에서 살아남을 수도 없다. 나는 그냥 피아노를 잘 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대에 섰을 때 청중에게 자신의 음악을 잘 전달할 수 있는 입체적인 연주법을 알려주고 싶다. 큰 홀과 작은 홀에서의 연주는 분명 다르게 접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교수 임용과 독주 음반 발매, 리사이틀까지 올 한 해는 정말 바쁘게 달려온 것 같다. 트리오 가온의 음반도 준비 중이라고. 지난해 9월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실내악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받은 부상 중 하나다. 브람스 피아노 3중주 2번과 멘델스존 피아노 3중주 2번, 그리고 두 작곡가의 듀엣 작품으로 구성했다. 쉽지 않은 프로그램이지만, 독특하고 신선해 보일 수 있을 것 같다. 트리오 멤버들은 내게 음악적 자극과 동기부여를 주는 친구들이다. 같이 연주하다 보면 서로가 가진 테크닉이나 음색 등에 자극을 받기도 한다. 각자의 장점은 배우려 노력한다.
이제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앞으로 계획 중인 일이 있는지 궁금하다. 이번 가을과 겨울은 내게 여러 가지로 결실이 피어나는 때였던 것 같다. 내년에는 금호아트홀에서 자주 뵐 수 있을 것 같다. 1월 첼리스트 김두민과의 연주를 시작으로 9월에는 비올리스트 이마이 노부코와 함께, 11월에는 ‘슈베르트로 가는 길’이라는 타이틀로 슈베르트의 작품을 중심으로 하는 세 번의 무대를 선보인다. 그중 한 번은 ‘겨울 나그네’를 연주할 예정인데, 전곡으로는 처음 선보이는 무대라 기대가 된다. 협연도 계속 있을 거고, 4월에는 트리오 가온으로 이탈리아에서 연주한다. 스승으로 해야 할 역할도 잘 해내고 싶다.
글 이미라 기자 사진 심규태(HARU)
김태형 피아노 독주회
11월 20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슈베르트 세 개의 피아노 모음곡 D946,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K333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