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향 아르스 노바 실내악 & 관현악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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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12월 3일 9:00 오전

REVIEW 서울시향 아르스 노바 실내악 & 관현악 연주회

 서주원(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서울시향

 

서울시향의 아르스 노바가 13년의 여정을 끝으로 마지막 인사를 고했다. 새로운 음향의 세계로 열렸던 커다란 문이 닫힌 것이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중략)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스물 아홉이라는 지나치게 이른 나이에 삶을 마감한 시인 기형도는 ‘빈집’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이 시는 오늘, 서울시향 아르스 노바를 위한 애가로 읽힌다.
라틴어로 ‘새로운 예술’을 뜻하는 ‘아르스 노바’에서 유래한 이 연주회 시리즈는 2006년에 작곡가 진은숙이 서울시향의 상임작곡가로 부임하면서 시작됐다. 고전과 낭만에 치중해 있던 국내 음악계에서 접하기 힘든 현대음악을 소개하는 이 시리즈는 국내 오케스트라 유일의 현대음악 시리즈였다.
낯설고 난해한 음악이라는 인식으로 청중에게 외면 받는 현대음악은 사실 우리와 시간적으로 가장 가까운 음악이다. 우리 시대의 살아있는 음악적 사건들에 동참하는 것은 미래의 새로운 음악적 유산을 함께 만들어가는 일이다.

 

 

아르스 노바Ⅲ 실내악 콘서트 

2018년 10월 19일 예술의 전당 IBK 챔버홀에서 열린 실내악 콘서트에서는 모두 다섯 작품이 연주됐는데, 이 중에서 네 작품이 초연작품이었다(초연은 세계 초연, 아시아 초연, 한국 초연 모두를 포함한다). 아르스 노바에서 연주됐던 수많은 작품 중 일부는 세대를 넘어 살아남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고전이라고 인정하는 작품들이 많은 경우에 당대에는 바로 수용되기 힘든 현대음악이었듯이. 이날 프랑코 도나토니의 ‘6명의 연주자를 위한 아르페지오’(1986), 프리드리히 골트만의 ‘12명의 연주자를 위한 굳어버린 불안’(1995), 디터 암만의 ‘반복의 층위’(2013-14) 등이 연주됐다. 작품에 붙은 독특한 제목들은 작품의 중심적 의도를 내포한다. 이 작품들은 귀로 인지하며 따라갈 수 있는 선율과 익숙한 화성 진행이 나오는 소리의 세계와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감상에 익숙하지 않은 청중에게 이것은 일종의 도전이다.
세계 초연곡인 김지향의 ‘14명의 연주자를 위한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2018)는 서울시향의 위촉곡이었다. 우리와 함께 호흡하는 작곡가의 작품은 그가 이 사회에서 음악가로서 느끼는 문제의식을 드러낼 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제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작곡가는 몇 년 전 봄에 일어난 죄 없는 아이들의 집단적 죽음이라는 비극적 사건을 자신의 수치심으로 느낀다. 그는 당시에 말러의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를 “끝도 없이 반복해” 들었고, “주머니를 뒤져봐도 가진 것이라곤 소리 밖에 없는 무능한 예술가가 자신의 무기력함에 쩔쩔매던 긴 시간”을 보낸 후에 이 작품을 완성했다. 과거의 작품을 가져와 현대적 음색으로 탄생시킨 이 작품은 음악가가 가진 소리가 슬픔과 수치를 기억하게 함으로써 인간다움을 지키게 할 수 있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예술이 일깨우는 이 가치는 잊기 쉽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가치이다.

 

 

아르스 노바 Ⅳ 관현악 콘서트 


10월 26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관현악 콘서트는 전곡이 초연이었다. 공간을 울리는 색다른 방식들에 대한 탐구가 담긴 이 작품들은 음악을 감상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경험하게 했다. 프로그램은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다섯 개의 관현악곡’, 요르크 휠러의 ‘비올라 협주곡’,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의 ‘소년의 노래’, 그리고 마르크-앙드레 달바비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연주회’였다.
이제는 고전이 된 현대음악인 쇤베르크의 작품은 초연된 지 100년도 더 지난 이제야 한국에서 초연됐다. 전자음악과 목소리가 결합된 슈토크하우젠의 ‘소년의 노래’는 공연장 곳곳에 배치된 5대의 스피커로 청중을 둘러쌌다. 마르크-앙드레 달바비의 작품은 오케스트라를 여러 그룹으로 나누어 색다른 소리 공간을 창조했다.
아르스 노바는 생소한 작품을 접하는 청중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음악회에 앞서 그날 연주되는 작품들을 소개하는 ‘프리 콘서트 렉쳐’를 진행해왔다. 이날 음악 칼럼니스트 송주호는 구체적이고 명확한 설명으로 작품 감상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모든 연주가 그렇지만 특히 새로운 작품을 연주할 때는 연주자의 역량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르스 노바 시리즈는 현대음악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지휘자와 협연자를 초빙해서 작품의 전달력을 높였다.
요르크 횔러의 ‘비올라 협주곡’은 서울시향의 공동 위촉곡이었다. 휠러는 자신의 작품을 ‘음시’라고 표현했는데, 음으로 말한다는 것은 결국 전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의미한다. 횔러는 작품의 해석자이자 전달자로 탁월한 비올리스트 타베아 치머만을 염두에 두고 작곡했다. 모든 음에 생기를 불어넣는 치머만의 연주는 작품을 가장 매력적인 모습으로 드러내면서 청중의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냈다. 좋은 작품과 작품의 진가를 아는 연주자의 연주가 현대음악을 새로운 소통을 위한 가장 훌륭한 도구로 만드는 것을 이날 목격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감동은 현대음악의 즐거움을 각인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 될 수 있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아르스 노바의 역사는 짧았지만, 이들이 남긴 여운은 길다. 현대음악 창작과 연주의 의미와 필요성에 대해 많은 이들을 담론의 장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지휘자 티에리 피셔는 이렇게 말했다.  “이 시리즈에 참가하는 것은 적재적소에서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특별한 느낌을 주었다… 아르스 노바는 이상향의 꿈에 가까워지는 하나의 본보기이다.”
아르스 노바는 차세대 작곡가들을 위해서도 많은 투자를 했다. 상임작곡가의 레슨과 외국 작곡가의 세미나뿐만 아니라 서울시향 리허설 시간에 그들의 작품을 연주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 프로그램 출신의 작곡가들은 이제 국내외 음악계에서 주목받는 작곡가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울시향 연주자들은 새로운 연주곡들과 씨름하면서 음악적 역량을 크게 키웠으며 미래를 열어가는 연주단체로 국제 음악계에서도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긍정적인 평가만큼 회의적인 시각도 지속적으로 존재했다. 무엇보다도 공공예술기관에 투입한 예산에 비해서 유료관객의 수가 적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취향의 계발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고, 가시적 성과로 바로 연결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음악을 통해 예상치 못한 놀라움을 경험하기를 바라는 청중의 근본적인 욕구까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에 희망이 있다. 영원한 청춘의 시인 기형도는 ‘정거장에서의 충고’에서 이렇게 결의를 다졌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희망이 살아있는 한 또 다른 전환점은 언젠가 다시 찾아올 것이다. 여기는 종착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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