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니스트 라도반 블라트코비치

호른에 묻어나는 따뜻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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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1월 14일 9:00 오전

©Branko Hrkač

2018년 4월 롯데콘서트홀에 불어왔던 프랑스의 바람, 그리고 그와 함께 공연장을 가득 채웠던 관객의 설렘과 열기는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세계 최정상의 목관 앙상블로 사랑받는 레 벙 프랑세의 첫 내한공연 날. 관악계의 스타플레이어들을 한 무대에서 만날 수 있었던 이날, 내게 가장 빛났던 음색은 단연 라도반의 호른이었다. 라도반 블라트코비치(1962~)는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서 태어났다. 자그레브 음악원에서 프레라트 데티첵(Prerad Detiček)을 사사하고, 독일 데트몰트 음악원에서 미하엘 횔트첼(Michael HÖltzel)과 함께 공부한 그는 프레미오 안코나(1979년), 뮌헨 ARD 콩쿠르(1983년) 등 다수의 콩쿠르에서 입상하며 주목받았다. 특히 ARD 콩쿠르에서의 우승은 14년 만에 호른 연주자에게 수여된 것이었다. 이후 다수의 초청 무대와 함께 1982년부터 1990년까지 베를린 방송교향악단(현 베를린 도이치 교향악단)의 수석 호른 주자로 활동한 그는 슈투트가르트 음대 교수(1992~1998)를 거쳐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교수(1998~) 자리에 올랐으며, 2000년부터는 마드리드의 퀸 소피아 음대에서 호른 학과장직도 함께 겸하고 있다. 솔리스트로서의 명성을 넘어 그의 활동 영역은 점점 더 넓어졌다. 안드라스 쉬프, 하인츠 홀리거 등과 정기적으로 연주하며 실내악 주자로서의 명성을 쌓았고, 2000~2003년에는 슬로베니아 마리보르에서 열리는 실내악 축제의 예술감독직도 역임했다. 지속적인 음반 활동은 물론이고, 최근에는 지휘자로서도 무대에 오르고 있다. 라도반의 소리에는 특별한 힘이 있다. 호른을 통해 나오는 유려한 프레이징과 아름답고 긴 레가토는 듣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싼다. 독일 시각으로 이른 아침, 그와 스카이프로 만났다. 따스함과 평안함을 주는 호른의 음색만큼 그는 인터뷰 내내 미소를 잃지 않았고, 열정적으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레 벙 프랑세 ©wildundleise.de Georg Thum

호른과의 첫 만남이 궁금하다. 아버지가 미국 위스콘신주 매디슨에 위치한 대학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네 살 때 미국에 가게 되었다. 내 첫 스승, 에드워드 브라운을 만난 것도 그때였다. 아버지가 값싼 멜로폰(프렌치호른을 단순화한 것) 하나를 사주셨고, 토욜일마다 레슨을 받으러 갔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취미로 악기를 불었지만, 여섯 살에 고향인 자그레브로 돌아와서부터는 본격적으로 호른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관악기를 하기에는 이른 나이가 아니었나? 대여섯 살부터 시작했으니, 조금 이른 나이일 수도. 그 나이대의 어린아이들은 아직 치아가 제대로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추천하고 싶지는 않지만, 일찍 시작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이점도 반드시 있다고 본다.

수많은 악기 중 호른을 선택한 이유가 있었나? 악기가 내게로 왔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니었고,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하지만 악기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호기심 많은 아이였기 때문이다.

음악가로서 터닝포인트는 언제였나? 열다섯 살 무렵. 당시 매우 열정적이었던 스승님께서 음악원에서 공부할 것을 독려하셨다. 일반 고등학교 공부를 병행하며 해야 할 일은 더 많아졌지만, 그곳에서의 음악 공부는 내게 많은 영감을 주었던 것 같다. 대부분 학생의 나이가 평균적으로 나보다 서너 살 많았고, 그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음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런 경험 때문에 나는 15~18세 사이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선호한다. 내가 가장 많은 것을 얻고 느낀 때이자 내 미래를 결정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Grgo Jelavic PIXSELL

음악가의 길을 그리다

그렇다면 교육에 대한 열정을 갖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나? 오케스트라를 떠나며 시간적 여유와 자유를 더 찾을 수 있었다. 학생들과 보내는 시간을 선택할 수 있었고, 연주자로서의 활동과 함께 연계해나갈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더 이전으로 거슬러가자면, 우리 가족은 대대로 교육계에 종사해 왔다. 내 어머니도 대학에서 언어를 가르쳤고, 양가 할아버지 모두 선생님이셨다. 일종의 가족 전통이랄까.

오랜 시간 학생들과 만나며 가지게 된 교육철학이 있을 것 같다. 내게 음악은 많은 요소를 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연주자로서의 수많은 경험이 교육에도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내 교육철학이라면 제자들이 학문적 지식과 연주력을 갖추고, 세계 시장 속에서 음악가이자 예술가로서 각자에게 맞는 직업을 찾아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술적인 연주력뿐만 아니라 레퍼토리와 시대에 대한 이해도 갖추어야 한다. 문화와 문명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고, 그것이 내가 연주하는 악기 안에서는 어떻게 그려질 수 있는지도 볼 수 있어야 한다.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연주자로 살아남기가 참 힘든 시대인 것 같다. 음악가들의 상황이 많이 바뀌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정규직도 많이 줄고 있고. 하지만 이 점은 음악계뿐만 아니라 지금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나는 제자들이 다양한 상황과 체계 안에서도 유연하게 대처하고 잘 준비될 수 있도록, 다재다능한 음악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그들의 모든 잠재력을 끌어내려 노력한다. 학생으로 공부하는 시기는 자신을 알아가고, 어떤 미래를 어떻게 그려갈지 생각해보는 아주 중요한 시기이다. 그 미래는 오케스트라 연주자나 교육자, 실내악 주자나 솔리스트일 수도 있고, 혹은 또 다른 분야가 될 수도 있다. 아주 다양한 선택지가 있고, 그에 따른 준비도 다양하다.

이런 교육에 대한 철학은 어떻게 가지게 되었나? 먼저는 내 스승들에게 받은 지적 재산과 경험에서부터고, 이후에는 함께 무대에 섰던 선배와 동료들로부터 계속해서 배울 수 있었다. 어린 나이부터 하인츠 홀리거 등 훌륭한 음악가들과 함께 연주한 것을 비롯해 오케스트라 안에서 수많은 거장 지휘자들과 함께하며 음악적으로 많이 성장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이루어진 수많은 만남을 통해 내가 알아야 할 것과 어떤 예술가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당신이 그린 그림은 어떤 것이었나? 새로운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전통을 따르며, 좋은 전통이 아닌 것은 깰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역사와 그림, 건축물, 조각, 연극, 문학 등 다른 예술 분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를 통해 완전한 예술가로 거듭날 수 있다. 요즘 ‘성공’을 가장 중요시하는 추세를 보며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어린 학생이었다면,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과 자신의 환경을 잘 이해하는 사람으로, 음악가로, 아티스트로 성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학생들에게 많은 음악을 듣고, 전시나 연주회 등 여러 장소를 찾아가 보라고 권한다. 이런 경험이 그들의 음악을 향상시키고, 레퍼토리에 대한 이해는 물론 앞으로의 음악 여정 또한 더욱 더 깊게 만들어 줄 것으로 생각한다.

 

두려움을 넘어선 사랑

긴 프레이즈로 이어가는 아름다운 음색이 독보적이다. 학생들로부터 소리에 대한 질문도 많이 받는다고. 모두 다른 목소리를 가졌듯이, 각자가 지닌 음색 또한 모두 다르다. 자신이 듣기에 좋은 다른 누군가의 호른 소리를 따라 해보는 것도 괜찮지만, 자신만의 소리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것은 머릿속으로 내가 내고 싶은 소리를 상상해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나 역시 학창시절 여러 악기를 가지고 많은 시도를 해보았다. 소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끝없는 여행과도 같아서 한번 소리를 찾았다 할지라도 그것에 영원히 만족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다양한 레퍼토리와 상황에 맞추어 조금씩 소리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마우스피스 등의 기술적인 부분뿐 아니라 오랜 경험과 공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성악가들이 노래할 때 어떻게 숨을 쉬고, 소리를 나타내며, 몸을 사용하는지를 들어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성악뿐 아니라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음악가들에게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무대 공포증을 가진 제자들에게는 어떤 조언을 해주는가? 무대에서는 누구나 긴장을 한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대처하느냐이다. 이 부분은 내 아내인 딩카(Dinka Migic-Vlatković)에게서 많이 배우고 있다. 그녀는 음악가를 위한 정신 코치로 활동하고 있는데, 종종 함께 마스터클래스도 개최하고 있다. 그녀는 음악가들을 세 부류로 나눈다. 첫째는 다른 사람에 비해 긴장감에 큰 비중을 두지 않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자연스럽게 대처하는 부류이고, 두번째는 무대 공포증을 심하게 겪는 부류이다. 이런 경우, 자신에 대해 더 깊이 알아볼 필요가 있다. 혹시 이전의 나쁜 경험과 기억이 이런 결과를 가져오진 않았는지 자신에 대한 더 많은 분석과 연구를 통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연주 자체에 불편함을 느낀다면, 교육이나 작곡 등 음악 안에서 다른 길을 찾아볼 수도 있다. 결국 음악과 예술에 대한 사랑이 두려움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내 음악을 표현하는 데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무엇이 훌륭한 음악가를 만든다고 생각하는가? 프랑스 첼리스트인 폴 토르틀리에는 음악가는 좋은 연주를 기본으로 배우, 가수, 건축가, 작곡가 등 많은 모습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음악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수단이고, 그 안에서 우리는 자유와 기쁨을 느끼며 성장한다. 스승으로서 나는 내가 가진 음악적 지식을 가능한 한 많이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결국 음악은 다른 누군가의 기대가 아닌 자신의 마음에서 나와야 하고.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연주하든 가르치든 자신이 하는 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을 온전히 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새해를 맞이하며 어떤 기대를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11월 서울국제음악제에서의 연주를 비롯해 앞으로 2년 동안의 스케줄이 이미 다 잡혀있다. 너무 많은 기대를 하다 보면 실망도 크기 마련이라 그저 매 순간 내가 하는 일에 집중하려 한다. 공연과 레슨, 새로운 인연과 오래된 친구들과의 만남도 있을 것이다. 매일 매일이 기대된다.

글 이미라 기자

 

©Jino Park

김홍박이 전하는 나의 스승, 라도반 블라트코비치

첫 만남 워낙 동경하던 연주자여서 한 번 레슨이나 받아보자 하는 마음에 연락도 없이 무작정 잘츠부르크로 갔다. 학교 선배의 도움으로 레슨을 받게 되었는데, 레슨 중에 혹시 이 학교에 오고 싶냐고 물으셨고 당연하다고 말하니 갑자기 다음날 시험을 보자고 하시더라. 그렇게 교수들과 학생들을 불러 모아 갑자기 만들어진 시험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미국 유학만 생각하던 내가 하루아침에 유럽에 가게 되었고, 라도반의 제자가 되었다. 특별한 기억 여름 방학 때면 선생님의 고향인 크로아티아의 작고 아름다운 도시에서 지내다 오곤 했다. 20시간 넘게 선생님이 직접 모는 차를 타고 여러 국경을 넘었고, 일주일 넘게 함께 지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아침에는 영화에 나올 법한 허름한 학교 건물에서 워밍업을 하고, 낮에는 뜨거운 태양 아래 해안가에 나란히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악기를 불었다. 저녁에는 선생님의 낡은 별장에서 직접 저녁을 만들어주시며 어린 시절 추억을 이야기해주셨는데, 이런 선생님의 따뜻함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최근에는 일본에서 열린 아시아 호른 페스티벌에서 만나 듀엣 연주를 했다. 함께 호흡하고 연주하면서 중간중간 나를 향해 흐뭇한 미소를 지으시는데, 지난 수년간의 추억이 떠올라 울컥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가르침 선생님을 만나기 전 내가 가지고 있던 호른의 이미지는 화려함이었다. 빠르고 정확한 테크닉을 연구했었다. 라도반 선생님은 삶의 여러 가지 모습을 호른 소리에 담아 표현하도록 생각하게 해주셨다. 음악뿐 아니라 자연이 주는 영감까지도. 금관악기가 소리로 감동을 줄 수 있는 악기임을 깨닫게 해준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스승의 모습 화려한 연주자이기 전에 소박한 아버지. 학생이나 동료 연주자에게 좋은 기운을 주는 겸손한 사람이다. 결론적으로 호른 소리에 그의 따뜻한 인품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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