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석(1924~2006) 희곡 전집 발간
유민영 단국대 명예교수와 전성희 명지전문대 교수에 의해 차범석의 희곡전집이 태학사에서 발간되었다. 1951년부터 2005년까지 집필한 희곡 64편이 현재 여덟 권의 양장본으로 나왔으며, 향후 무용·오페라·시나리오·방송대본·평론·논문·수필 등도 연이어 정식 출간되어 총 12권을 채울 예정이다. 생전에 차범석은 자신의 전집을 발간하고 싶어 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이번에 차범석연극재단이 유지를 받들어 전집을 발간하였다. 현재 ‘차범석’의 이름은 조선일보가 주최하는 차범석희곡상으로 인해 작가들 사이로 이어지고 있으며, 목포문학관에서 그의 삶을 더듬어볼 수 있다. 이번 전집은 이와 함께 차범석을 기억하는 또 하나의 기념비로 우뚝 설 것이다. 전집의 각 권의 서두에 실린 전성희의 ‘차범석의 생애와 예술’을 편집·수록하여 2006년 고인이 된 차범석의 삶을 다시 한 번 만나보자(편집자 주).
| 영화에 빠진 목포소년, 최승희에 매료되다
차범석은 1924년 11월 15일(음력 10월 19일) 전라남도 목포시 북교동 184번지에서 아버지 차남진(車南鎭) 어머니 김남오(金南午) 사이에서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일본 유학생 출신의 아버지는 중농 규모의 할아버지 유산을 잘 관리하였고, 그 덕에 차범석은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가정환경 덕분에 차범석은 식민지의 궁핍한 상황에서도 교육과 일정부분 제도적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으며 예술적 환경에 일찌감치 노출될 수 있었다. 차범석은 외향적이며 저돌적인 형이나 소유욕이 강하고 고집스러운 아우의 성정과는 달리 말수도 적었고 자기주장을 하기 보다는 조용히 책을 읽거나 어머니의 곁을 지켰다.
목포공립보통학교 4학년 때 교지 ‘목포학보’에 ‘만추’라는 글을 실어 ‘예사롭지 않은 문재’가 엿보인다는 말을 듣고 소설가를 꿈꾸기도 했다. 이 무렵부터 차범석은 목포극장과 평화관을 드나들며 영화 관람에 빠져들었다. 그러던 중 6학년이 되던 해에 최승희(1911~1969)의 무용 발표회를 보고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최승희는 차범석에게 ‘무대라는 세계, 막이 객석과 무대를 갈라놓은 공간, 보여주는 자와 봐주는 자 사이의 공존의 의미를 깨우쳐 준 첫 번째 예술가’였다.
| 영화와 문학 그리고 연극
차범석의 어릴 적 이름은 평균(平均)이었는데, 중학교 입시를 앞두고 범석(凡錫)으로 개명했다. 광주고등보통학교(후에 광주서중으로 개칭) 진학을 위해 목포를 떠나 광주로 갔지만 소극적인 성격은 변함이 없었다. 호기심이 많았던 그는 책방을 드나들며 하이네나 바이런의 시집, 일본 소설들을 읽고 장차 문학가가 되어야겠다는 꿈을 키웠다. 그러면서도 어린 시절 목포에서 그랬던 것처럼 광주에서 보낸 5년 동안 약 40~50편의 영화를 관람하고 영화잡지까지 사서 보는 등 적극적으로 영화의 세계에 빠져 들었다. 후에 연극으로 진로를 변경하기는 했지만 극의 세계라는 같은 뿌리의 영화에 마력을 느꼈다. 방학이 되면 목포 본가에 내려가서 골방에 있었던 세계문학 등을 독파했다.
아버지는 차범석이 의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그는 의사보다는 문학과 예술에 뜻을 두고 있었다. 아버지와의 불화는 권위적인 아버지가 어린 시절부터 형과 차별 대우를 했던 것에서 비롯, 그를 내성적이고 비사교적인 반면 ‘회의적이고 반항적이면서 한편으로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성과 공격성’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위해 도쿄로 건너가 2년 동안 입시 준비를 하면서도 극장을 드나들었다. 극장은 그의 예술적인 호기심에 불을 붙인 ‘기폭제’였으며, 드라마가 무엇인가를 암시하고 시사하고 터득해 준 또 하나의 ‘교실’이었다. 이 무렵 차범석은 영화뿐만 아니라 일본 연극에도 관심이 생겨 자주 관람했다.
하지만 연이어 입시에 실패한 차범석은 재수 준비를 하고 있었고, 때마침 일어난 전쟁으로 위험하니 귀국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으로 급히 돌아왔다. 차범석은 귀국하자마자 군대를 가야하는 징집의 위기를 맞았지만, 병역면제의 혜택을 받기 위해 1년 과정의 관립광주사범학교 강습과에 입학을 했다. 교육에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현실도피 생활에서 오는 자포자기의 심정과 허무는 그를 술로 이끌었고 이후 차범석의 건강과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교사 발령 4개월 만에 징집, 4개월간의 군대생활 중 해방이 되고 다시 모교에 복직하게 되었다.
| 본격적인 연극의 길로
그는 1946년 문학공부를 위해 연희전문학교 전문부 문과에 입학하였다. 뒤늦게 사회적·정치적으로 개안을 한 그는 친일세력에 관한 과거청산이 필연적 역사라는 것과 동학혁명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이나 3·1운동 정신과도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역사의식과 재확인은 자아각성으로 연결되고 그 결과 문학이나 연극에 대한 인식과 태도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차범석은 일제 말기에 폐간되었던 문학잡지 ‘문장’지 전질을 구해 읽으며, 다시 문학공부를 하는 등 문학의 참다운 뿌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이 가야할 길이 문학과 연극에 있다는 신념으로 문학서클 ‘새마을회’에서도 활동하고, 연세대 연극동아리인 ‘연희극예술연구회(연희극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대학 시절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을 그대로 거울 속에 비춰보고 싶다”던 그에게 유치진(1905~1974)의 강의는 사실주의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해주었고 이후 자신의 연극관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면서 차범석은 직업극단의 공연과 연습장까지 찾아다니는 등 점차 연극 세계에 깊이 빠져 들어갔다.
1949년 유치진이 만든 제1회 전국남녀대학 연극경연대회에 연희극예술연구회가 차범석이 번역하고 연출한 ‘오이디푸스 왕’으로 참가하여 우수상을 수상했다. 차범석은 연극경연대회에 함께 참가했던 각 대학의 연극인들을 모아 ‘대학극회’를 조직하는데 앞장섰다.
그리고 1950년 초 국립극장이 설립되자 당시 유치진 극장장의 배려로 전속단원이 되어 현장에서 활동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고향으로 피난을 갔던 차범석은 목포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교직생활 중에도 습작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도 ‘목중예술제’를 만들었다. 목중예술제에서 1951년 처녀작 ‘별은 밤마다’를 무대에 올리고 주연까지 맡았다. 이 시기에 ‘닭’ ‘제4의 벽’ ‘전야’ ‘풍랑’ 등의 습작품을 국방부의 정훈잡지에 발표하기도 했다.
| 치열한 습작기와 대표작 ‘산불’로 우뚝 서기
대학 다닐 때 방학이면 고향에 내려와 목포청년들과 주변의 섬들을 여행하며 얻었던 소재를 바탕으로 ‘밀주’를 창작한 그는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가작으로 입선하였다. 가작 입상에 만족을 못한 차범석은 이듬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재도전하였고, ‘귀향’이 당선되었다. ‘밀주’는 흑산도, ‘귀향’은 해남을 무대로 그가 나고 유년시절을 보낸 바닷가 마을이 배경이다. 차범석은 ‘밀주’에서 가난한 어민들의 찌든 삶을 그렸지만, ‘귀향’에서는 가난한 농민을 묘사하며 그 이유가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 때문이라는 것을 지적했다. 이 지점에서 그의 희곡의 특성, 즉 ‘로컬리즘을 바탕으로 한 사실주의’의 출발을 확인할 수 있다.
신춘문예 당선을 계기로 서울로 이주한 그는 덕성여고에서 교편을 잡았고, 중앙무대를 향한 열정을 불태우며 창작에 몰두했다. 그러면서도 대학극회에서 같이 활동했던 김경옥, 최창봉, 조동화, 박현숙, 노희엽, 이두현 등과 함께 1956년 ‘제작극회’를 결성하여 한국연극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이 시기에 차범석은 활발하게 희곡을 창작하여, 문예지에 ‘불모지’ ‘4등차’ ‘계산기’ ‘상주’ ‘분수’ ‘나는 살아야 한다’ 등을 발표했다.
앞서 발표했던 로컬리즘을 바탕으로 한 사실주의극과는 다르게 고향을 벗어나 전쟁으로 좌절한 사람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특히 ‘껍질이 째지는 아픔 없이는’은 4·19 1주년 기념공연으로 제작되었는데, 혼탁한 정치 상황에서 드러난 신·구세대 간의 갈등을 형상화한 것으로 차범석의 정치·사회의 비판적 인식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러한 창작 경향은 이후 1961년 작 ‘산불’로 절정을 이루었다. 차범석의 대표작이며 ‘한국 사실주의 희곡의 최고봉’이라고 일컬어지는 ‘산불’은 한국 전쟁을 겪은 작가가 전쟁을 객관화시키는 사유의 시간을 통해 이데올로기가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리얼하게 보여주었다. 그러한 점에서 ‘산불’은 한국 사실주의 연극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고 할 수 있다. 차범석은 당시 연극들이 주로 오른 답답한 소극장이나 응접실 같은 무대에서 벗어나, 대숲이 있는 마을을 무대로 하여 이념의 대립과 갈등이 동족 전쟁을 야기하고 궁극적으로 인간 그 자체를 파괴해 간다는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산불’은 국립극장 초연 당시 큰 인기를 얻었고 이후 영화·방송드라마·오페라·뮤지컬·창극 등 다양한 매체의 전환을 통해 관객과 만났다. 원 소스 멀티 유즈라는 측면에서 보면 ‘산불’은 원천콘텐츠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작품이다.
| 극단 산하 창단과 연극계의 살림을 도맡아
차범석은 ‘산불’의 성공 이후, 극단 신협의 재건을 위한 이해랑(1916~1989)의 요청으로 집필한 ‘갈매기떼’가 1963년 명동국립극장 무대에 올라 ‘산불’ 못지않은 인기를 끌었다. 목포 부둣가에 있는 영흥관이라는 식당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치권력과 조직폭력배간의 갈등, 그리고 그로 인해 무구하게 희생당하는 서민들을 그려냈다.
‘산불’과 ‘갈매기떼’의 성공으로 고무된 차범석은 전문적인 극단을 창단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당시 연극계가 동인제 극단시대로 진입하기 시작했고, 1962년 드라마센터의 개관이라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추어적인 수준의 제작극회로는 변화에 대처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차범석은 제작극회의 다른 멤버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963년 연극의 대중화와 전문화를 지향하는 극단 산하(山河)를 창단했다. 현실과 동떨어진 번역극 대신 창작극을 주로 공연했고, 창단 당시 의도대로 지방공연도 가지면서 왕성하게 활동을 이어갔다.
이 무렵 차범석은 MBC로 직장을 옮겨 바쁜 와중이었지만, 극단 산하의 일뿐만 아니라 창작에도 매진하여, 유명배우 강효실을 위해 ‘청기와집’을 집필했는가 하면, 극단 산하에 상업적 성공을 안겨준 ‘열대어’와 ‘풍운아 나운규’, 동성애 문제를 다룬 ‘장미의 성’과 ‘대리인’, 정치와 정치인을 풍자한 ‘왕교수의 직업’ 등의 희곡을 집필했고, 산하의 공연을 위해 여러 편의 각색 작업과 연출로도 참여하였다.
1969년 사단법인 한국연극협회 제7대 이사장으로 선출되었지만 건강에 이상이 생긴 그는 이듬해에 방송국까지 그만두었다. 하지만 발병 전에 국립극장에서 차기공연작으로 위촉한 장막극 ‘환상여행’을 위해 와병 중에도 무리를 하면서 완성을 했다. 하지만 퇴원 후 1년간의 요양생활을 하는 동안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그의 곁을 떠났다.
| 방송과 연극을 횡단한 글쓰기. 그리고 비판적인 시선
1972년 차범석은 MBC의 요청으로 일일연속극 ‘물레방아’를 집필했다. ‘물레방아’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5개월 동안 방영, 100회를 넘겼으며 이러한 장기방영은 MBC 역사에 있어서도 최초였다. 이전에 라디오 드라마, TBC(동양방송) 단막극, ‘태양의 연인들’과 같은 특집극을 쓰기도 했지만 일일연속극은 그로서도 처음이었다. 드라마의 성공은 차범석에게 경제적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차범석은 연극 현장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1974년, 6년 동안 맡았던 한국연극협회 이사장직을 이진순(1916~1984)에게 내주고 그해 봄 극단 산하의 사무실도 마련하고 연극현장의 기록이 소실되는 것이 안타까워 ‘극단 산하 10년사’를 펴내는 등 다각적인 활동을 펼쳤다. 1975년에 극단 산하는 동양극장과 전속 계약을 체결했고, 계약금과 중도금을 지불하며 의욕적으로 공연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동양극장의 매각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속수무책 사기를 당한 차범석은 잔금은 안 털렸으니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러한 차범석의 긍정적 태도는 이후 창작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유신의 시대를 거치며 유신을 지지하기보다는 오히려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하고 있었던 그였지만 ‘약산의 진달래’ ‘활화산’ 같은 새마을 극본을 쓰기도 했다. 그렇지만 새마을운동의 찬양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이 시대의 이야기로, 가난과 싸우는 농촌여성의 삶을 리얼하게 묘사함으로써 우리가 안고 있는 퇴영적이면서도 부정적인 행태를 드러내려 했다. 이 시기에 그의 역사인식은 자연스럽게 개화기를 향했다. ‘새야새야 파랑새야’에서는 동학도와 같은 민중의 저항을, ‘손탁호텔’에서는 외세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자존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서재필과 같은 진보적 청년들의 연대를 그리면서 창작의 지평을 넓혀갔다.
| 농촌드라마 ‘전원일기’의 성공, 연극 재기의 아픔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연극계는 상업주의가 팽배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성과 연극성을 지닌 레퍼토리라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그는 1979년 ‘제인 에어’를 무대에 올렸지만 관객들의 외면으로 흥행에 실패하고 말았다. 일련의 일들로 차범석은 회의가 일어나고 산하의 해산까지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유신정권의 횡포와 비민주적인 정권욕으로 급격하게 경색되어가는 시대에 연극을 통해서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결심은 더 단단해졌다. 그 무렵 연극대본의 사전심사제로 창작극의 공연이 어렵게 되자 숀 오케이시의 ‘쥬노와 공작’ 연습에 들어갔다. 하지만 1980년 5월, 공연을 보름 앞둔 그는 광주민주화항쟁이 일어나자 공연중지를 선언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총칼에 쓰러지고 있는데 연극을 하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실의에 빠진 차범석에게 MBC에서 농촌드라마 의뢰가 들어왔다. 옴니버스 형식의 농촌드라마 ‘전원일기’였다. 이 드라마는 1980년 첫 방영을 시작으로 2002년 종영될 때까지 최장수 드라마로 자리 잡았는데, 차범석은 초창기의 극본 집필을 맡아 1년 동안 48회분을 집필했다. 이후 연극을 위해 방송국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극본 집필을 포기했다.
산하에 돌아온 그는 중단했던 ‘쥬노와 공작’을 무대에 올려보았지만, 흥행에 참패하고 말았다. 산하의 재기를 위해 옛 멤버들을 규합해 보기도 했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결국 ‘산불’ 공연마저 실패하고 1983년 산하를 해단하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그를 무대로 이끌었던 유년시절 최승희 공연의 영향과 대학시절 무용을 배우러 다녔던 경험 때문이었는지 1982년 ‘강’을 시작으로 국립무용단의 1996년 작 ‘오데로’까지 여러 편의 무용극 대본을 창작하였다. 1984년 국립무용단의 LA올림픽참가공연 ‘도미부인’도 그의 손을 거쳤다.
| 경계 넘기를 위한 다작과 ‘차범석표 사실주의’
1983년 청주대학교의 요청으로 연극영화과 교수로 부임한 그는 한적한 곳에서 창작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예술대학장직을 맡은 시절에 학원민주화 운동이 번지고 있었고, 학생들의 기물파괴 등의 파괴적인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던 그는 보직에서 물러났다.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때에 조직된 ‘88서울예술단’의 창립공연 ‘새불’을 올린 그는 다시 대학으로 복귀했다. 이후 특정사회단체의 요청이기는 하지만 신채호를 다룬 ‘식민지의 아침’, 김대건 신부의 일대기를 그린 ‘사막의 이슬’ 등을 창작했다. 1989년 학교 측에서 총장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교수직을 사퇴하고 이후 서울예술대학의 교수로 자리를 옮겨 창작에 몰두했다. 이 시기에 차범석은 창작방식에 있어 변화가 일어났다.
1992년 징용 노무자의 딸 야마네 마사코의 자전적 수기를 바탕으로 ‘안네 프랑크의 장미’는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을 용서와 화해의 차원에서 접근한 작품이었으며, ‘통곡의 땅’은 김구의 삶을 작품화하면서 한국현대사에서 이념문제를, ‘나는 불섬으로 간다는 소작쟁의와 그로 인해 생긴 연좌제 문제를 제기하였다. ’바람 분다, 문 열어라‘에서는 여성들의 변화를, ’그 여자의 작은 행복론‘에서는 어머니와 아들 간의 근친상간적 욕망을 그려내는 등 소재의 영역도 넓어졌다.
차범석은 본래 대중예술과 고급예술을 경계 짓는 것에 대해 우려했던 작가다. 하지만 노년의 그는 경계를 허물고 뮤지컬 ‘처용’, 오페라 ‘백록담’ ‘연오랑 세오녀’ 등의 대본을 집필했다. 그러면서도 2003년 작 ‘옥단어!’ 같은 작품에서는 우리의 현대사와 그 아픔을 되돌아보는 것에 대한 깊은 사유를 보여주었다. 그는 이 작품에 “평생 동안 삶의 방식으로 지켜온 자유정신을 투영”시켰으며 떠돌이 옥단이를 통해 인생의 허망함을 보여주며 한국적 사실주의의 진전을 이루어 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차범석은 차범석은 한국연극사에서 최고의 사실주의 희곡작가이며 64편의 희곡을 발표한 다작의 작가다. 한국에서 사실주의 연극의 시작은 유치진에 의해서였지만 찬란하게 꽃을 피운 것은 차범석이라 할 수 있겠다.
글 전성희(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사진 객석DB·태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