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예술이 꿈꾸는 평화
울림과 퍼짐의 책과 음악 ‘올리브나무의 꿈’
1월 8일|대안공간 울림과 퍼짐
서촌의 고즈넉한 풍경 속에 위치한 울림과 퍼짐은 벽산장학문화재단에서 후원하는 대안공간으로 그동안 책과 음악 있는 무대를 통해 많은 사람들과 작은 소통을 나누어 왔다. 이날 주제는 ‘올리브나무의 꿈’으로 박노해의 사진과 시집 속에 담긴 내용들을 나누며 클래식 기타리스트 황민웅의 연주로 타레가의 ‘꿈’, 꼬르데로의 ‘질문’ 등 서정적인 선율을 감상할 수 있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은식의 진행으로 시작된 이날 음악회는 박노해의 예술 세계를 통해 노동현장과 타지의 땅 위에서 시와 사진으로 남긴 메시지가 명료한 울림으로 우리 마음에 다가왔다. 삶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이 딛고 있는 곳에서 우리 이웃을 돌아보며 치열하게 고민하고 나누려고 했던 정신은 그렇게 예술로 남아 긴 여운을 주었다.
이날 무대는 박노해의 시를 관객이 자연스럽게 낭독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운 사람’ ‘부모로서 해줄 단 세 가지’ ‘디레 디레’ ‘내가 살고 싶은 집’ ‘그라시아스 알 라 비다’ ‘올리브 나무의 꿈’까지 그의 시어에는 우리가 잊고 지내던 소중한 것들을 마음에서 다시 소환하는 힘이 있었다.
‘올리브 나무의 꿈’은 박노해 시인이 종교분쟁지역인 파키스탄에서 전쟁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현장을 직접 찍어 전시한 사진전으로 평화와 반전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후 무대는 클래식기타리스트 황민웅의 연주로 이어졌다. 스페인 마드리드 왕립 음악원과 잘츠부르크 국립음대에서 공부한 그는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해설로 박노해가 시로 노래한 평화를 클래식 선율 속에 담아 냈다. 타레가의 ‘아랍 기상곡’ ‘꿈’ 속에서는 잊었던 감성을, 안성희의 ‘그늘아래’, 솔리스의 ‘낭만적 전주곡’과 ‘춤’ 선율에는 평화로운 들판과 하늘이 보이는 듯 서정적인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특히 호세 루이스 메를린의 ‘말타기’ 속에는 누군가 말을 타고 가는 모습과 경쾌한 말굽 소리가 어우러져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했다.
책과 음악이 함께 한 시간. 연주회가 끝나고도 사람들은 바로 일어나지 않고 서로 인사를 나누며 겨울밤의 따뜻한 온기를 나눴다. 삭막한 삶을 달리다 마주한 평화의 시간, 새해의 새로운 시간 앞에서 사람들은 그렇게 각자 앞으로 가야 할 길들을 다시 헤아리고 있었다. 박노해의 시에서처럼, 나의 빛, 나의 힘이 되어줄 내 마음의 봄 언덕을 꿈꾸며. 국지연
지성과 감성으로 걸어가다
이진상 피아노 독주회
1월 10일|예술의전당 IBK챔버홀
피아니스트 이진상의 연주는 사유하는 힘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대중의 환호와 갈채를 받는 스타보다 고독하고 진지한 수도자가 되고 싶다”는 그의 말은 그대로 음악이 되어 흘러나온다.
차가운 바람이 잔잔히 스치던 저녁 밤,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은 이진상이 그려내는 다채로운 빛깔로 채워졌다. 라벨 소나티네 M40와 슈베르트 3개의 피아노 소품집 D946, 멘델스존 엄격 변주곡 Op.54, 그리고 슈만 교향적 연습곡 Op.13까지. 그의 소리는 매 순간 다른 장면을 만들어냈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건반을 휘몰아치는 청중을 압도하는 연주도 있지만 나는 듣는 사람과 아주 작은 감정을 나누는 데서 더 큰 기쁨을 느낀다”고 했다. 실제로 이날 무대는 연주자 이진상과 청중인 나, 이 둘만의 공간이 만들어지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이러한 착각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소리 하나하나가 만들어내는 감동도 있었지만, 그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따질 틈도 없이 소리는 큰 파도가 되고,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통째로 다가왔다. 겉으로 쥐어짜내는 감성이 아니었다. 마음속 깊이 내재된 예술적 고민과 사유가 작품에 투영된 것이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말한다. “춤추는 별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부에 카오스를 품어야 한다”고. 예술가는 질서와 혼돈을 동시에 지닌다. 질서에서 혼돈을 발견하며 새로운 길을 열어가고, 혼돈 속에서 질서를 발견하는 창조의 삶을 살아간다. 스스로 타오르는 에너지를 지니고 살아갈 때 그것이 ‘춤추는 별’, 빛나는 예술의 길로 탄생하는 것이다. 피아니스트 이진상은 뜨거운 에너지를 가슴 속에 품고 자신의 별을 좇는 것 같다. 그의 연주가, 그의 음악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끊임없는 호기심과 탐구정신, 지성과 감성으로 걸어가는 이진상. 이날 무대는 그의 또 다른 예술 세계를 예고하고 있었다. 이미라
호루라기 소리에 마음을 담아
연극 ‘하이타이’
1월 10~12일 |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미국 텍사스 레인저스 구장 옆, 해태세탁소. 한국의 야구단 해태 타이거즈의 이름을 딴 것이지만, 미국인들은 ‘하이타이’라고 읽곤 한다. 세탁소의 주인은 한국에서 온 이만식.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응원단장인 그를 취재하기 위해 한국의 방송국 PD와 작가가 미국까지 찾아왔다. 해태제과 냉동설비기사가 광주의 야구단 응원단장이 된 흥미진진한 사연은 어느새 한 가족의 비극적인 이야기로 이어진다.
만 40세 이하 젊은 예술가들의 신작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인 두산아트센터의 두산아트랩 올해 첫 공연 ‘하이타이’는 김명환이 작·연출을 맡고 배우 김필이 홀로 무대에 오르는 1인극이다. 실제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응원단장이었던 임갑교를 모티브로 했으며, 그가 해태 타이거즈의 응원단장이었다는 사실을 제외한 모든 이야기는 허구로 각색됐다. 배우는 어떤 모자를 쓰느냐에 따라 주인공 이만식이 되었다가, 박찬호 선수가 되었다가, 텍사스 레인저스 단장이 되는 등 자유자재로 변모한다. 응원단장답게 실제 관객들을 대상으로 파도타기와 박수 응원을 유도하는 등 흥을 돋운다. 극 중 이만식의 삶도, 홀로 여러 캐릭터를 연기하며 진행되는 극 자체도 외로운 광대 놀이판처럼 펼쳐진다.
이만식의 삶이 처음부터 혼자는 아니었다. 그의 아내와 어머니는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에게 먹을거리를 나눠주다가 계엄군에게 사살당했고, 그의 동생은 난리통에 이만식의 아들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1999년이 될 때까지 해태 타이거즈는 단 한 번도 5월 18일에 광주에서 경기를 한 적이 없었기에, 이만식은 가족의 제삿날에 집에 갈 수조차 없었다. 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열혈 대학생이 된 동생 만호까지 1987년 민주항쟁에서 최루탄을 맞아 세상을 떠나자, 만식은 세상에 홀로 남겨지게 됐다. 그는 이 도시 저 도시로 원정경기를 다니며 얼굴에 분칠을 하고 호루라기를 불면서 한을 토해낸다.
행방을 모른 채 가슴에 묻어둔 아들이 사실은 그 옛날 광주항쟁 때 죽었다는 소식은 수십 년 뒤 미국으로 전해진다. 아들의 유해를 만나러 한국에 가기 위해 만식은 세탁소의 문을 닫는다. 텍사스 레인저스 선수들의 유니폼 빨래를 도맡았던 그를 위해 구단은 월드 시리즈 경기의 시구를 만식에게 부탁한다. 응원석에만 있던 그는 그제야 처음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해태 타이거즈는 왜 경기에서 이기고도 ‘목포의 눈물’ 같은 슬픈 노래를 불렀나, 하고 주인공 이만식은 가만히 돌아본다. 그 속에는 광주의 한과 아픔이 담겨 있다.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은 거시적이면서도 미시적이다. 이정은
누구에게나 품은 원고 하나는 있다
뮤지컬 ‘호프: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
1월 9~20일|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뮤지컬 ‘호프: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은 2018년 공연예술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뮤지컬 부문 선정작으로, 유대계 독일계 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실화를 모티브로 했다. 현대 문학의 거장 요제프 클라인의 미발표 원고를 둘러싼 이스라엘 국립 도서관과 에바 호프의 30년간 이어지는 재판을 그렸으며, 신진 크리에이터 작가 강남과 작곡가 김효은, 연출가 오루피나가 창작진으로 참여했다.
작품은 현재와 과거를 적절히 버무리면서 진행된다. 모두가 기피하는 노파가 되어버린 에바 호프가 끝까지 요제프의 원고를 지켜내려는 현재 재판 과정과, 요제프의 원고가 어떻게 에바 호프의 손에 들어오게 됐는지를 그려낸 과거가 전혀 이질적이지 않으면서도 평행적으로 전개된다. 간소하지만 핵심을 짚어낸 무대 연출, 대사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넘버, 배우들의 열연을 통해 가능해진 장면이다.
에바 호프가 끝까지 원고에 집착하는 이유는 작품이 전개되면서 밝혀진다. 요제프 클라인의 친구였던 베르트에게서 요제프의 원고를 지켜달라는 당부를 받은 에바 호프의 어머니 마리 호프는 전쟁 중에도 원고를 목숨처럼 지켜낸다. 마치 연인 베르트에게서 받은 원고가 사라지면 자신의 삶 자체가 부정당할 것처럼 행동하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에바 호프는 그녀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서 원고와 어머니 곁을 떠난다. 원고가 없는 그녀에게 닥쳐온 삶은 이전보다 훨씬 녹록지 않다.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 호프에게 남은 것은 반절의 원고와 그녀가 없는 동안 세상을 떠나버린 어머니의 흔적뿐이다. 심한 자책감과 동시에 원고가 없으면 자신의 삶이 더욱 악화하고 말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그녀는 이후 원고에 천착하는 삶을 살아간다.
도대체 왜 이를 의인화해서 표현해야 했을까 의문을 자아냈던 원고 ‘K’의 존재감은 작품의 절정에 달하며 빛을 발한다. 재판정에서 에바 호프에게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선 원고를 버려야 한다고 말하던 K는 마침내 그녀의 손에 들린 라이터에 자신의 몸을 태우기 위해 호프를 꽉 끌어안으며 위로를 건넨다. 에바 호프의 넘버 중에서 ‘원고를 지키는 여자’라는 가사가 ‘나만을 지키는 여자’라고 변하는 순간과 판결문 끝에서 ‘에바 호프의 삶을 에바 호프에게 돌려주기로 한다’고 모든 배우가 함께 외치는 순간, 관객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나는 내 삶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 채 무엇을 붙들며 살아가고 있는가.’ 주체적인 삶의 주인공이 되어 세상으로 한 발짝 나아갈 ‘희망(Hope)’을 전하는 작품이다. 권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