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 필자들이 꼽은 화제의 무대
2월 14~16일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관객 입장과 함께 무대에는 한동안 계속 파도소리가 들린다. 잠시 후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두 아이가 등장한다. 둘 다 여자아이들이다. 두 아이는 옷을 겹겹이 껴입었다. 아이들의 옷도 무겁다. 한 아이가 담배를 꺼낸다. 담배를 피우려다가 캐리어를 보고 그만둔다.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고 또 한 아이가 등장한다. 이번엔 남자아이다. 컨테이너 박스들이 무덤처럼 줄지어 있는 곳이라는 설명이지만 무대엔 단무대 몇 개가 놓여있을 뿐이다. 이 공연은 두산아트랩1 쇼케이스 무대로, 정식으로 무대세트를 갖춘 공연이 아니다. 연출가 고유빈과 작가 도은이 함께 하는 프로젝트 고도의 작품 ‘아빠 안영호 죽이기’이다. 가출 청소년들이 만든 또 하나의 가족인 ‘가출팸’(‘가출 패밀리’의 줄임말)에 대한 이야기다.
맞다. 관객들이 짐작하듯이, 크고 무거운 캐리어 속에는 ‘아빠 안영호’의 시체가 들어있다. 그런데 아이들은 시체 옆에서 아무 대책이 없다. 바다에 던질까, 산에 묻을까, 궁리하지만 정작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 이 아이들은 어리다. 제일 언니로 불리는 무해는 18세, 이번이 첫 번째 가출이다. 둘째 코다는 19세라고 말하지만 때에 따라 17세이기도 하고 18세이기도 하다. 코다에게는 안영호의 가출팸이 두 번째 경험이다. 막내 오카는 17세 남자아이다. 무해와 코다와 오카는 이들이 가출팸을 만들 때 사용했던 인터넷 채팅 별명들이다. ‘아빠 안영호’도 20대 청년일 뿐이다. 이들은 마치 가족처럼 서로를 아빠, 언니, 동생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죽은 아빠가 살아 돌아왔다. 아이들이 죽인 ‘아빠 안영호’다. 아이들은 안영호가 좀비인지, 부활한 것인지 혼란스럽다. 게다가 죽은 아빠는 갑자기 존댓말을 쓴다. 더 무섭다. 죽은 아빠는 캐리어 옆에서 아무 대책 없는 아이들을 비웃는다. “나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그리고 묻는다. 누가 자신을 죽였느냐고. 공연은 누가, 왜 아빠를 죽였는지 의문을 풀어가는 이야기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구성이다. 가출하기 이전 장면에서 아이들은 별명이 아니라 본명으로 불린다. 황아연, 이재희, 곽다인 등 아이들의 본명은 배우들의 실명이기도 하다.
아빠가 밖에 나가서 돈을 버는 방법이란 ‘가출팸 구함’ 채팅창을 보고 가출한 아이들을 유인해서 돈을 뺏거나, 부모들을 협박해서 돈을 뜯어내는 것이다. 다른 가출 청소년들에게 접근해서 유인하는 역할이 무해와 코다와 오카의 일이다. 매일매일 채팅창에는 가출한 아이들의 메시지가 올라온다. 돈이 떨어진 아빠는 오카를 미끼로 남자손님들을 불러오고, 아이들은 도망치려다 우발적으로 아빠를 죽인다. 다시 현실 속의 파도소리가 들려오고, 바닷가에 선 무해/황아연은 묻는다. “우리에게 아버지가 왜 필요했을까?”, “아버지를 죽인 자식이 다른 아버지를 가질 수 있을까?” 아버지를 죽인 아이들, 오이디푸스의 아이들이다. 프로젝트 고도는 매년 여성 서사 창작극을 공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집단이라고 한다. 오이디푸스 모티브를 여성 청소년 주인공인 무해/황아연의 시선으로 보여주는 방식이 흥미롭다. ‘지독한 폭력’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아버지를 죽인 자식, 죽지 않고 다시 살아 돌아오는 아버지, 여성 청소년 주인공이 던지는 오이디푸스적 질문이 향하는 방향이 아직 정확하지는 않지만, 집요하게 이야기를 만드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들의 질문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힘이 느껴진다. 오이디푸스 또한 자기 문제를 끝까지 알고자 했다.
글 김옥란(연극평론가) 사진 두산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