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MeToo) 이후 변화하는 공연계와 새롭게 만나는 작품들

미투(#MeToo) 이후 변화하는 공연계와 새롭게 만나는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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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4월 1일 9:00 오전

하나의 인격체로 존재하는 여성을 노래하다

PART 1
미투(#MeToo), 그 후 1년
제도 변화의 지속성을 관찰하다

“예술의 근간은 사람이고, 사람을 짓밟는 예술은 없다”

2018년 2월 25일, 공연장이 밀집한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400여 명이 모여 벌였던 ‘위드유(#WithYou)’ 집회에서 등장했던 구호다. 지난해 2월부터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던 참담한 고백들이 담긴 공연예술계의 ‘미투(#MeToo)’ 운동에는 관객들이 함께했다. 성폭력 가해자나 방관자가 제작·출연한 공연을 보지 않겠다며 공연 예매 취소 인증이 이어졌고, 관객의 끊임없는 피드백에 창작자들 역시 촉각을 곤두세웠다. 연극인들 역시 자성의 목소리를 높였다. 100명이 넘는 연극인들은 피해자 보호와 연극계의 자정을 주장하며 ‘성폭력 반대 연극인 행동’을 결성했고, 남성 서사 일변도의 작품과 다양성의 부족을 지적하는 이들은 지난해 6월 제1회 페미니즘 연극제를 직접 만들었다. 그로부터 1년. 완벽한 변화를 일으키기에는 부족하나, 향후 변화의 물결이 지속할 수 있는가를 짚어볼 수 있는 시간이 흘렀다. 2018년 ‘객석’ 4월호에서 예술계를 휩쓴 ‘미투’에 대해 심층적으로 다룬 지도 정확히 1년이 지났다. 크게 넘실대던 첫 물결과는 다르게 조금은 잔잔하게 흘러가고 있진 않은가에 대한 성찰과 함께, 꺼지지 않는 변화의 물결을 좇아가본다.

극단 Y에서 작성한 ‘권리장전’. 한국여성의전화 내규를 참조로 하여 만든 것이다

인식의 변화에 앞장선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

‘미투’ 초기에는 성폭력이나 성추행이 폭로된 사람들을 징벌하는 차원에서 행동이 이루어졌다면 이후에는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성별 간 편견 및 인식 구조를 변화시키려는 움직임으로 확산됐다. 대표적인 단체가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이하 성반연)’으로, 지속적으로 공론의 장을 마련하며 문화예술계를 건강한 환경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을 해왔다. 공연예술계의 성폭력 및 위계폭력 문제에 대한 현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해결을 모색하는 것으로 시작된 성반연의 월요 모임은 여섯 번째 모임부터 ‘지금 말하기 자리’라는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성반연은 한국보다 앞서 ‘미투’ 운동이 일어났던 나라의 전문가와 함께하는 국제 포럼 역시 개최했다. 지난해 10월에는 스웨덴 ‘미투’ 운동을 이끌었던 배우 수잔나 딜버를 초청하여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인 연대의 힘을 확인했다. 올해 2월에는 서울시성평등활동지원센터와 함께 일터로서 보호받지 못하는 극장들이 스스로 규제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미국 ‘시카고 시어터 스탠다드(Chicago Theater Standards, 이하 CTS)’를 소개하고, 우리 현장에 맞는 자치규약을 마련하고자 CTS 코디네이터로 활동 중인 배우 로라 피셔를 초청한 워크숍을 개최했다. CTS는 시카고 지역의 극단 관계자·배우·전문가 등이 2015년부터 2년여에 걸쳐 제정한 일종의 규약이자 가이드라인으로, 오디션을 비롯한 연극 제작 과정 전반에 걸쳐 제작자가 따라야 할 내용이 세부적으로 명시돼 있다.

지난 2월, 서울연극센터와 대학로 연습실 등지에서 성폭력을 예방하고 교육하고자 배포한 ‘불편한 연극’ 역시 눈길을 끈다. 연극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희롱·성폭력과 불합리한 문화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대한 대처 방법을 다룬 교육용 안내서로, 성반연이 개발했고 여성가족부를 발행처로 한 공공저작물 형태다. 연기지도를 빙자해 흔하게 발생하는 신체적인 성희롱·성폭력의 사례나 가부장적 유사 가족공동체가 많은 연극계 문화를 보여주는 등 현장 연극인들을 통해 수집된 실제 사례 6가지를 바탕으로, 대화가 오가는 희곡 형태로 작성됐다. 지난해 ‘제1회 페미니즘 연극제’를 기획했던 나희경 PD는 “스웨덴에서 90% 이상의 극단이 연습 첫날 성폭력 방지 관련 규범을 함께 큰 소리로 낭독한 뒤에 연습을 시작하는 것처럼, 한국 역시 ‘불편한 연극’이나 극단 Y에서 만든 ‘권리장전’을 다 함께 읽고서 연습을 시작하는 단체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기획 면에서도 한 발짝 성장하다

지난해 ‘미투’와 관련해 가장 먼저 공연 취소 결정을 내렸던 남산예술센터는 올해 시즌 프로그램 6편 중 3편을 여성 연출자에게 맡겼다. ‘7번 국도’의 연출가 구자혜, ‘묵적지수’의 연출가 이래은, ‘드라마센터, 드라마/센터’(가제)의 연출가 류주연이 그들이다. 우연 남산예술센터 극장장은 “극장 식구들과 토론한 결과 창작자의 남녀 동수 비율이 중요하다고 결론지었다”며 “올해는 남녀 연출자를 동수로 참여시키기로 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6월 처음으로 열렸던 페미니즘 연극제 역시 올해도 개최한다. 기획자 나희경 PD는 “지난해 우리 연극제를 통해 보다 많은 페미니즘 연극이 가시화되는 효과가 있었다”고 말하며, “올해 연극제에서 선보일 작품 역시 선정은 마무리된 단계다. 그러나 극장 대관이나 홍보 마케팅은 제작사 쪽에서 개별적으로 진행하다 보니 정부 지원금 발표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페미니즘과 연대’라는 주제로 작품을 공모한 제2회 페미니즘 연극제에서는 일곱 작품 정도의 선정작을 선보일 계획으로, 여성과의 연대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 다수다. 나 PD는 “향후 페미니즘 연극제는 성소수자·난민·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로 영역을 넓혀갈 것이다. 이번에도 해당 주제를 담은 낭독 공연이나 포럼 등을 부대 사업으로 진행하려고 한다”는 계획을 내비쳤다.

성반연 워크숍에 참여한 배우 로라 피셔 ©김은빈, 공공누리 저작물 형태로 배포되는 ‘불편한 연극’

제자리걸음이 아니다

수차례 목격했듯이 용기 있는 폭로는 세상을 바꾼다. 하지만 아직도 ‘미투’ 가해자로 지명됐거나, 의혹을 받은 이들이 암암리에 무대에 서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한계다. 이를 극복하고자 성반연은 지속적인 팔로잉을 통해 ‘관대한 복귀’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의견문을 발표해오고 있다. 이러한 운동에 발맞춰나갈 뿐 아니라 늘 관심을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여전히 피해자가 안심하고 피해를 호소할 수 있는 통로가 부족하는 점에서 ‘미투’ 운동을 지원하는 공적인 ‘위드유’ 제도나 기관 역시 강화돼야 한다. 스웨덴의 예술영화인조합과 공연예술협회는 양쪽이 함께 참여하는 ‘평등과 다양성을 위한 위원회’를 만들고, 성희롱·성폭력에 대한 규범을 새로 갱신했다. 공연기관들은 모든 형태의 괴롭힘과 성폭력에 대한 정책과 피해자가 발생할 경우의 대처 방안을 전면 재검토했으며,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동의 여부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담은 법안도 마련됐다. ‘미투’ 이후 관련 법안만 130건가량 발의됐지만 국회통과는커녕 제대로 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러 한계가 잔존할 뿐 아니라 변화의 물결이 잦아든 것은 아닌가에 대한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이나,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지난해에는 ‘미투’ 운동이라는 큰 사건을 거치며 계단 한 칸을 올라섰기 때문에 파동이 도드라져 보였을 뿐, 지금은 다음 계단을 넘어서기 위해 평지를 걷고 있는 단계다. 인식의 변화가 시작된 이상, 더디더라도 꾸준한 투쟁만이 진정한 변화를 가져온다.

 

호프: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 ©알앤디웍스 , 베르나르다 알바, 더 데빌 ©알앤디웍스

무대 위 맞춰지는 힘의 균형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사례를 고발하는 ‘미투’ 운동만큼 공연계에 활발하게 나타난 양상은 콘텐츠의 변화다. 여성이 서사의 주체가 되는 작품이 다수 등장했고,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는 여성 인물이 무대를 활보했다. 성 구별 없는 ‘젠더 프리 캐스팅’이나 성별을 바꾸는 ‘젠더 밴딩 캐스팅’이 활발해짐에 따라 관객들은 여성 배우와 남성 배우가 한 배역을 번갈아 연기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여성, 무대를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다

스페인 시인 겸 극작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베르나르다 알바’는 20대부터 40대까지 각 세대를 대표하는 여배우 10명으로만 출연진을 꾸려 신선한 돌풍을 일으켰다. 노벨상을 2회 수상한 최초의 여성 과학자 마리 퀴리를 다룬 ‘마리 퀴리’와 에바 호프라는 노파의 파란만장한 삶을 시대상과 결부해 그려낸 ‘호프: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 역시 여성이 중심이 되어 서사를 이끌어나갔다.

다만, 단순히 여성 인물이 극의 주인공이라고 해서 여성 중심 서사라고는 할 수 없다. 뮤지컬 ‘플래시 댄스’의 주인공은 알렉스라는 여성이지만, 이 인물은 여전히 남성에 의해 기회를 얻고 구해진다. 여성 중심의 서사에 필요한 것은 한 명의 인간으로서 다양한 결로 살아내는 여성 주인공이다. 더 많은 성격, 더 많은 직업의 여성들이 무대 위에서 활보하면서도 이면의 섬세함을 드러내는 모습이 필요하다.

실제 그러한 작품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2017년 초연 이후 지난해 2월 다시 무대에 오른 창작 뮤지컬 ‘레드북’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자신의 이야기를 야한 소설로 쓰는 주체적인 여성 주인공 안나를 내세워 큰 호응을 받았다. 페미니즘 창극을 표방한 ‘우주소리’에서는 소녀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때 인류를 구원할 수도 있다는 진취적인 세계관을 드러냈다. 지난해 공연한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와 창작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에서는 힘의 불균형 측면에서 불편할 수 있는 장면을 줄이거나 변경하는 등 노력 역시 지속되고 있다.

한 배역을 남녀가 함께 소화하다

국내에서의 ‘젠더 프리 캐스팅’은 기존 남성이 맡았던 배역을 여성이 함께 맡는 식으로 주로 시도되고 있다. 괴테 ‘파우스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뮤지컬 ‘더 데빌’에서는 기존 남자 배우가 맡았던 X라는 배역을 배우 차지연이 맡는 동시에 X-화이트와 X-블랙을 모두 연기했다. 뮤지컬 ‘해적’ 역시 모든 배역을 혼성 캐스팅했으며, 연극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역시 다섯 명의 배역 중 두 배역에 남녀 배우를 동시 캐스팅했다.

2017년 초연한 이후 소년들의 성장담을 그렸던 연극 ‘비클래스’는 이번 시즌 한 배역에 남녀를 함께 캐스팅하며 소녀 버전을 새로 꾸렸다. 창작집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의 배우이기도 한 연출가 오인하는 “여성 중심의 서사로 이야기를 확장하고자 남학생 버전의 기본값에서 벗어나 배우들과 함께 자유롭게 고민하고 만들었다. 그 결과 이야기의 결이 풍부해졌다”고 말했다. 또한, “일부 디테일한 대사나 장면이 수정되기는 했지만,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대로 따랐다”고 덧붙였다.

‘젠더 프리 캐스팅’은 기존 남성이 맡았던 배역들을 여성 또한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개선점 또한 존재한다. 뮤지컬 평론가 원종원은 “재밌는 시도나 일종의 유행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단순히 남성이 맡던 캐릭터를 여성으로 바꾸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남녀 배역에 따라 서로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성 정체성을 넘어서는 효과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젠더 프리 캐스팅이 성립할 것”이라고 말했다.

 

 

2005년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연출, 2008년 극단 마부 마인 버전, 2018년 유리 부투소프 연출

PART 2
인형이 사람이 되기까지
최초의 페미니즘 희곡, 헨릭 입센 ‘인형의 집’이 던진 질문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 주게.”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당대 유명한 신여성이었던 나혜석(1896~1948)이 지은 ‘인형의 家’라는 시의 일부로, 그가 노르웨이 극작가 헨릭 입센(Henrik Ibsen, 1828~1906)의 희곡 ‘인형의 집’에 큰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얼마 전부터 작품들 속에서 활발하게 등장하고 있는 여성 중심의 서사나, 주체적인 여성의 뿌리는 헨릭 입센 ‘인형의 집’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1800년대 후반, 굳건한 인형의 집

1879년 코펜하겐 왕립극장에서 초연된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은 결혼 전에는 아버지의 인형으로, 결혼 후에는 남편 토르발트 헤르만의 인형으로 살던 자신의 굴레를 깨달은 노라가 가정을 떠나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 작품은 여성해방과 성 평등을 환기하는 최초의 페미니즘 희곡으로 평가받는다.

‘인형의 집’이 쓰인 19세기 후반은 프랑스 혁명 이후 싹튼 남녀평등 사상이 유럽 각국에서 여성의 참정권 및 재산권 획득 운동으로 불이 붙던 시기다. 여성의 지위와 권리라는 시의성 있는 문제를 다룬 이 작품은 출간 직후 바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출간 이후 석 달 만인 1879년 12월 21일 덴마크 코펜하겐 왕립극장 초연을 비롯해 유럽 각국에서 공연될 때마다 논란의 중심에 섰다. 당시 가부장적 사회에서 어머니이자 여성인 노라가 자식과 남편을 두고 집을 나가는 결말은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변화가 태동하는 시기인 것은 확실했지만 여전히 그 시대 결혼한 여성은 공식적인 서류에 독자적으로 도장을 찍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남편의 허락 없이는 유언을 남길 수도 없었다. 유언 자체도 죽음 이후 남편이 철회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시대 속 남편을 떠나는 여성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사회는 기존 3막짜리 희곡에 4막을 추가해 다시금 돌아오는 노라를 그리거나 남편과 화해하는 모습을 그리는 등 수많은 속편을 낳았다. 1881년 M.J. 부게 ‘노라는 어떻게 집에 들어왔나’, 1885년 월터 베산트 ‘인형의 집 그리고 그 이후’, 1891년 엘레아노르 마르크스 ‘인형의 집은 수리됐다’, 1903년 마리 이체로 ‘노라 또는 힘에 벅찬’ 등을 꼽을 수 있다.

인형의 집, 조금씩 허물어지다

초연 이후 140년이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또 하나의 인격체로 존재하는 여성을 위한 여러 투쟁과 노력을 통해 헨릭 입센 ‘인형의 집’이 갖는 충격적인 파동은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러나 21세기에도 많은 연출가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간 힘의 균형을 노래하는 변주작들을 내놓으며 자신만의 독특한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

노라가 집을 나가면서 남편을 죽이는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연출의 샤우뷔네 극장 버전과 남자 배역에 왜소증 장애인을 캐스팅한 리 부르어 연출의 극단 마부 마인 버전이 대표적인 예로, 두 작품은 LG아트센터에서 각 2005년, 2008년에 공연되었다. 지난해 11월 예술의전당에서는 러시아 연출가 유리 부투소프가 한국 배우들과 작업한 ‘인형의 집’을 올렸는데, 부투소프는 여성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속박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인류 모두의 이야기로 확장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아 극 중에서 갑자기 노라 역을 토르발트가, 토르발트 역을 노라가 연기하는 등 역할을 뒤바꾸는 것을 시도해 눈길을 끌었다.

 

 

PART 3
INTERVIEW
마침내 돌아온 노라, ‘인형의 집, PART 2’

15년 만에 노라가 집으로 돌아왔다.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이 초연된 1879년에 15년을 더한, 1894년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 속 노라는 예전처럼 남편과 화해를 도모한다거나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는 노라가 아니다. 결의에 찬 그녀의 노크 소리로 시작되는 미국 극작가 루카스 네이스 ‘인형의 집, PART 2’는 2017년 미국의 사우스 코스트 레퍼토리 극장을 거쳐 브로드웨이에 입성했고, 토니 어워드 작품상·연출상 등 8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2018년 미국에서 가장 많이 공연된 대본으로 꼽히기도 했다.

총 다섯 챕터로 구성된 이번 작품에는 노라와 그의 남편 토르발트, 유모 앤마리, 그리고 노라의 딸 에미가 각기 팽팽한 논쟁을 벌인다. 오는 4월, 한국 초연에서의 연출은 김민정이 맡았다. ‘비너스 인 퍼’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등의 작품에서 다양한 시대 속 여성의 이야기를 다채롭게 풀어냈으며, 올해 연말 ‘나, 혜석’을 통해 관객에게 새롭게 다가갈 준비를 하고 있는 그의 행보가 기대된다.

 

다시 돌아온 노라를 시작으로, 작품은 어떻게 전개되는가? 15년 전 집을 나갔던 노라는 어느덧 성공한 여류작가가 됐다. 그녀가 쓴 책들은 조금씩 사회에 파장을 일으키고, 많은 여성이 본인의 존엄을 위해 행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혼한 줄만 알았던 노라가 이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 당시 결혼한 여성은 서류에 간단한 사인조차 할 수 없었고, 출판 사업이 가능할 리는 만무했기 때문에 노라의 행적들은 큰 문제가 된다. 집을 나서는 순간 이혼이 성사된 줄로만 알고 있던 노라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이혼 절차를 확실히 마무리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와 벌어지는 논쟁의 이야기다.

이번 작품이 브로드웨이에서 크게 인기를 끈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인물들의 말이 치열하고도 재미있기 때문이다. 예측하기 어렵고 설득력이 강한 말들이 충돌하면서 관객을 사로잡지 않았을까?

노라에 대한 생각이 궁금하다. 개인적으로 노라가 최종적으로 가는 길에 동의한다. 그녀가 받았을 혹독한 비난과 억압뿐 아니라 아이에 대한 그리움 등 그녀는 여성의 존엄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수많은 기회비용을 치렀다. 극의 논쟁 중에서 노라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인 유모는 “노라, 넌 이기적이야. 나는 너처럼 차가운 사람이 아니야”라는 말을 한다. “왜 불편한 것을 하려고 하는가, 그러면 모든 사람이 불편해지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처럼 큰 기회비용을 지불하고서라도 움직이고 있는 그들을 통해서 남은 우리들은 수혜를 보고 있다.

헨릭 입센 ‘인형의 집’은 최초의 페미니즘 희곡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헨릭 입센 본인은 자신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주장한 바 있다. 해당 작품이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불리는 것에 동의하는가? 완전히 동의한다. 입센의 발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맥락 안에서 봐야 한다. 당시 주류 남성 작가가 페미니스트로 낙인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눈이 탁월했다. 사회가 가진 부조리와 모순적인 규범에 눈을 뜬 그에게 ‘여성’이라는 존재가 보였던 것이다. ‘억압과 부조리가 있으니 그것을 균형 있게 만들자!’ 결국 이것이 페미니즘의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작품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니까 내가 원하는 걸 생각할 수 있었어요. 내 목소리를 듣는 건 정말 어려워요.” 노라의 마지막 대사 중 한 부분이다. 실제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자 2년여의 침묵의 시간을 갖는다. 오직 자신의 소리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그 소리에 눈을 뜬 그녀는 스스로 독립성을 얻는다. 오늘날 많은 이들 역시 자신의 소리에 온전히 귀 기울이며, 더디지만 아름다운 투쟁을 계속해나가기를 바란다.

글 권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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