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카이노의 눈’ & ‘고독한 목욕’

 젊은 연극인들이 과거에 접근하는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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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4월 1일 9:00 오전

‘객석’ 필자들이 꼽은 화제의 무대

기억은 불현듯 공격해 들어온다. 내 의식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불쑥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다. 보고 듣고 겪어냈기 때문에 조그마한 단서에도 그것을 빌미 삼아 깊숙하게 공격해오는 것이 기억이고 체험이다.

우리의 현대사는 불쑥불쑥 들어오는 그런 아픈 기억들이 많다. 겪은 이들에게는 현재진행형의 상처를 남겼고, 겪지 못한 이들에게는 집단기억으로 남아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데 세대가 달라지면 어떨까? 주관적인 경험과 기억에서 자유로워진다면, 혹은 그런 경험을 하지 못했다면 수많은 사건과 과거는 어떻게 기록되고 형상화될까? 시간의 간극, 세대의 변화와 교체는 불쑥 들어오는 기억의 감정과 정서에서 한 발짝씩 떨어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최근 젊은 연극인들이 올린 연극 두 편은 바로 이러한 세대적 감각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공통적으로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과거를 기억과 상처, 감정의 직접화법으로 대하는 것에서 이성과 논리, 객관과 관찰의 간접화법으로 찬찬히 들여다보는 감각과 태도의 변화. 이런 변화가 반가운 것은 이제야 과거의 유령에서 벗어나 제대로 그 시대를 떠나보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역사 속 생생한 삶을 그리는 감각

‘이카이노의 눈’

차세대열전2018의 첫 번째 작품인 ‘이카이노의 눈’(김연민 각본·연출, 3월 1~3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은 재일한국인 2세 작가 원수일의 소설 ‘이카이노 타령: 어머니의 이야기로 만든 이카이노 연대기’(2016)를 원작으로 한다. 일본 오사카에 위치한 이카이노는 식민지 시기 강제징용부터 해방과 4·3 사건, 한국전쟁의 격동기를 거치며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들이 모여 사는 재일한국인 집단 거주지이다. 재일한국인 작가의 작품에 근원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이 작품에서도 나타나지만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국과 얽혀버린 자이니치의 일상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이카이노에서 가내수공업의 샌들 공장을 운영하는 영춘에게 어느 날 서울로 유학 보낸 손자 노리히로가 간첩단 사건에 휘말려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바로 당시 정권이 조총련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고 체재 안정을 위해 조작한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이다. 실제 사건을 작품 속에 가져왔지만 인물들은 이 사건에 휘둘리지 않는다. 간첩단 조작을 위한 끔찍한 고문 장면도 없고 극도로 피폐해진 피해자도 없으며 상실의 무력감으로 울부짖는 가족도 없다. 영춘과 가족들, 공장의 일꾼들은 노리히로가 풀려나길 기다리면서, 또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다양한 구명활동을 하면서 잔잔하게 일상을 영위해 나간다. 자극적인 장면 없이도 끌려간 사람에 대해 남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남은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고 변화되었는지를 차분하게 보여주었다.

사건을 직접적으로 말하기보다 그 사건을 겪어낸 사람들의 일상을 중심으로 간접적으로 말하는 태도, 여기까지는 원작자의 몫이다. 연극 ‘이카이노의 눈’이 주목되는 것은 이러한 원작을 선택한 연출가 김연민의 감각이다. 연출의 글에서 “역사를 통해 나를 찾고 미래의 나를 발견하려는 것”이라며 역사의 의미를 현재화하고 있는 김연민 연출은 역사나 특정한 사건 자체보다는 그 시간들을 견뎌내고 살아온 사람에 무게중심을 두었다. 그리고 이런 태도와 가장 잘 맞는 작품을 선택했고 본인이 직접 각색하는 과정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선명하게 만들었다. 감각적이고 실험적인 형식과 방법을 적극 활용한 차세대열전 연극에 선정된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이카이노의 눈’은 익숙하고 친절한 사실주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젊은 연출가라고 해서 새로운 형식 혹은 감각적 연출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특히 전국향, 강애심 등의 연륜 있는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 무대장치의 섬세함 등을 통해 연출가가 이 공연에 오랜 시간 정성스럽게 공들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달라진 세대의 감각은 익숙한 형식에서도 빛을 발한다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침묵의 고독과 무게

‘고독한 목욕’

국립극단 젊은극작가전 세 번째 작품인 ‘고독한 목욕’(안정민 작, 서지혜 연출, 3월 8~24일 백성희장민호극장)은 사법살인이라는 치욕을 안고 있는 인혁당 사건을 다룬다. 젊은 작가가 1970년대의 사건에 관심을 둔 것도 흥미롭지만 더 인상적인 것은 사건을 정공법으로 파고드는 대신 인물의 감성에 집요하게 접근했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송씨의 아들로, 그는 무대 한가운데 놓인 욕조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사이사이 고등학생 때 여자친구,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더 어린 아버지 등이 퍼즐 맞추듯 등장하면서 아들이 왜 욕조 속에서 고독하게 있는가를 관객에게 이해시켜준다. 급작스러운 아버지의 상실과 부재로 아들은 세상에 겁을 먹었다. 책을 보는 것이 두렵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두렵다. 고요한 물속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나열하는 중년의 아들은 나이는 먹었으나 성장을 멈춘 모습이다. 고문 때문에 너덜너덜해진 아버지의 몸을 닦아주면서 비로소 아버지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보는 순간 아들의 고독한 목욕은 끝이 난다.

사건이 몰고 온 고통을 직접적으로 그려내기보다는 인물의 정서 속에 스며들어 있는 고통의 무게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안정민 작가의 의도는 서지혜 연출의 손을 거쳐 보다 선명하게 전달되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연출이 선택해 다양하게 편곡되어 작품 곳곳에 배치된 팝송 “더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였다. 침묵의 소리. 아버지를 권력에게 뺏겼기에 침묵할 수밖에 없는 아들, 소리가 없는 물속에서 편안한 아들, 성장도 멈추고 고립되어 보편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진공의 상태가 되어버린 아들. 그런 아들이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한 것은 침묵이 내지르는 외침이고 비명이었다. 제 몫을 해내는 배우들 덕분에 분절된 장면들의 의미가 꿰어졌고 구석구석 활용된 무대는 스스로를 가둔 아들의 내면을 적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아버지보다 더 나이든 아들의 어리광에 가슴이 아린 것은 우리의 과거가 그만큼 아팠기 때문일 것이다.

이 두 작품 외에도 작년 말에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된 ‘두 번째 시간’의 이보름 작가는 장준하 추락사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지금 이야기를, 최근에 서울시극단 창작플랫폼으로 공연된 ‘포트폴리오’의 장정아 작가는 위안부 할머니와의 정서적 교감에 초점을 두었다. 직접 말하지 않아도, 아니, 직접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젊은 세대는 더 많은 고민과 더 많은 접근 방법을 고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에 다양하면서도 진지하게 접근하는 젊은 연극인들의 감각과 태도에 반가운 박수를 보낸다. 역사가 다채로워지고 예술이 풍성해지는 현장을 함께 하는 것 같아 뿌듯하기 그지없다.

글 배선애(연극평론가)

사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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