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을 이겨낸 꽃과, 칼바람 가득한 어둠 뒤에 마주한 파아란 하늘은 보는 이의 마음에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온다. 피아니스트 크리스천 블랙쇼가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금 무대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이 느꼈을 감정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맨체스터 로열 칼리지와 런던 왕립 음악원에서 고든 그린을 사사하며 금메달을 수여 받은 크리스천 블랙쇼는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 수학한 최초의 영국인이다. 1978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입상한 것을 시작으로 실력 있는 연주자로서 자리를 잡아가던 그는 무대에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하던 1990년, 홀연히 무대를 떠났다. 암으로 세상을 떠난 아내를 대신해 세 자녀의 육아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커리어 초반 “아직 준비되지 않은 것 같다”는 이유로 도이치그라모폰과 EMI의 녹음제의를 고사하며 음반 한 장 남기지 않았던 터라 라이브 무대조차 만나기 어려워진 그를 기억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후 약 20년의 세월이 지난 2009년 크리스천 블랙쇼가 다시 대중 앞으로 돌아왔다. 오랜 침묵의 시간 동안 피아노를 놓지 않고 내면을 더욱 충실히 채운 그의 연주는 단숨에 관객과 평단을 사로잡았다. 세인트 조지 브리스틀에서 선보인 모차르트 소나타 시리즈가 음악 자체의 순수한 아름다움에 목말랐던 대중에게 신선하게 다가갔던 것. 블랙쇼는 이를 기점으로 그간 펼쳐내지 못했던 자신의 음악을 마음껏 풀어내기 시작했다. 발레리 게르기예프, 사이먼 래틀, 유리 테르미카노프 등의 명 지휘자와 함께 작업했고, 베를린 필 등 세계 유수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다양한 무대에 이름을 올렸다. 오랜 시간 대중에게 잊혔던 그가 다시 무대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데에는 모차르트의 역할이 컸다. 2012~2013년에 영국 위그모어홀에서 선보인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 시리즈가 호평받으며 네 장의 실황 음반으로 발매되었고, 이 중 네 번째 음반은 2015년 ‘뉴욕타임스’지가 뽑은 ‘올해의 베스트 클래식 음반’과 ‘그라모폰’지가 선정한 ‘위대한 모차르트 음반 50선’에 이름을 올렸다. 최근 도쿄·상하이·베이징에서 모차르트 전곡 연주를 선보인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백야 축제와 슈베칭엔 페스티벌에서 리사이틀을 가졌으며, 지난해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처음으로 초청되어 연주했다. 2013년 설립된 헬렌스뮤직 페스티벌의 공동 예술감독인 그는 2018/2019시즌 위그모어홀 상주 음악가로도 활동 중이다.
크리스천 블랙쇼는 이번 내한 무대에 모차르트와 슈만, 슈베르트로 찾아온다. 오랜 침묵을 깨고, 웅크려있던 시간만큼이나 더욱 활짝 피어나고 있는 그의 음악이 이제 우리 앞에 펼쳐질 차례다.
한국에서 만나게 되어 기쁘다. 이번 내한공연에서 모차르트 소나타 K457과 슈만 환상곡 Op.17,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D960을 선보일 예정인데, 연주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가? 이 세 명의 천재 작곡가들의 피아노 레퍼토리 중에서 가장 도전적인 세 작품을 선택했다. 각각의 작품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 상황에 대한 열정적이고 열렬한 반응이다. 모차르트와 테레제(Therese von Trattnern),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추측은 멈추지 않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소나타 K457은 같은 시기에 작곡된 환상곡 K475과 함께 그녀에게 헌정되었다. 혼란과 드라마, 미스터리와 환상, 그리고 빛이 모두 이 안에 담겨 있으며, 찬란함과 평온함 또한 작품 전체에 퍼져있다.
슈만 환상곡 Op.17은 19세기 피아니즘의 정점에 있는 작품 중 하나다. 그의 다른 여러 작품처럼 이 또한 그의 연인인 클라라를 위해 작곡되었으나, 이후 리스트에게 헌정되었다. 앞의 두 악장이 주는 정서적 감동은 우리에게 깊은 감명을 준다. 마지막 악장이 지닌 고요함과 힘은 엄청난 사랑의 표현이자 헌신이며, 이는 커다란 은하수를 가로지르는 연인의 어마어마한 사랑으로 표현될 수 있다.
슈베르트의 D960은 1828년, 그가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숨지기 몇 주 전에 작곡된 마지막 소나타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을 감히 대중 앞에 내놓기까지 20여 년의 시간을 조용히 공부했다. 소나타 형식으로 된 모든 작품 가운데 최고의 곡 중 하나이며, 건반을 통해 이 사랑스러운 작품을 관객과 공유하는 것은 내 인생의 특권이라 생각한다. 희망과 절망, 상실과 슬픔, 그리고 영원과 역경을 이긴 승리를 풀어낸 이 음악은 기적과 같다.
아내와 사별 후, 아이들을 위해 무대를 떠났다. 이후 20년이라는 긴 시간 만에 다시 돌아왔는데, 무대에 다시 오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 기간에도 피아노는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왔다. 어떤 친구들은 나를 기억해주었지만, 여러 단체에 잊히며 삶 또한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매니지먼트의 도움 없이 일하는 것에도 굉장한 어려움이 있었다. 상업적으로 만든 음반도 없었을뿐더러, 개인적인 이유로 유명 회사의 매력적인 제안도 거절해야 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나를 다시 무대에 설 수 있도록 도와준 것 같다.
세인트 조지 브리스톨에서 첫 모차르트 시리즈 무대를 선보였다.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로 다시 무대를 시작하고 싶었던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수많은 유명 작가들이 이미 여러 문헌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모차르트는 어린 시절부터 즉흥연주에 뛰어난 경이로운 실력의 건반 연주자였다. 그의 비르투오시티에 대한 일화는 셀 수 없이 많다. 끊임없는 창조를 이룬 한 남자의 작품 전체를 연주하는 것보다 더 영감을 줄 수 있는 일이 있을까? 피아노는 사람의 목소리와 오케스트라, 비극과 희극의 교차, 한 연주자를 위한 아리아로 묘사된다. 최고의 보컬 마스터가 쓴 모든 것이 나를 매료시켰으며, 끊임없는 기쁨의 원천이 되었다.
다시 돌아와 선보인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시리즈와 실황 음반은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굉장한 호응을 얻었다. 특히 음반은 “매혹적이고” “마법 같으며” “거장답다”는 수식을 얻었다. 당신의 연주가 이처럼 많은 사람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영국 런던 위그모어 홀에서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연주하고, 또 실황 음반으로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내게 기적 같은 일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작품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체임버홀 중 한 곳에서 연주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 것도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이었는데, 이 연주를 녹음하도록 권유받은 것은 더 큰 의미로 다가왔다. 내 연주와 음반이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저 음악이 지닌 영혼에 가까워지고, 청중이 내 노력을 알아주고, 또 모차르트를 내가 바라는 대로 표현할 수 있다면 충분히 만족한다.
진실함을 담아
새로운 작품을 마주할 때 무엇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가? 많은 피아니스트가 비슷할 것이라 생각한다. 작품의 장엄함 속에 싸여있는 것이 충분히 감정적으로 전달할 만한지 충분히 영감을 받은 후에야 작품이 지닌 여러 복잡한 것들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모든 테크닉적인 문제는 음악의 본질을 기본으로 해야 하며, 내 마음에 표현할 수 있는 자유는 필수적인 부분이다.
음악가로서 당신에게 가장 중요했던 순간을 꼽는다면. 음악과의 첫 만남은 네 살 때였다. 당시 들었던 멘델스존 ‘핑갈의 동굴’ 서곡에 넋을 잃었던 기억이 난다. 그 순간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음악가로서 중요한 순간들은 어느 한 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것 같다. 사람들은 항상 새로운 것을 배우지 않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만큼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지도.
연주자로서 가졌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인가. 작곡가들에 대해 깊은 책임감을 느낀다. 개인적으로는 그들의 음악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실패할까 걱정스럽고 불안하기도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관객들이 우리가 진정성을 가지고 연주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어 마음의 부담을 내려놓게 된다.
음악가들이 소중히 여겨야 할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진실함’이라고 생각한다. 진실함과 존엄성, 우아함, 유머, 감정적 깊이, 소통을 비롯해 계속 연주되어 온 작품에 대한 표현의 자유를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한 시간, 한 주, 한 달, 한해, 그리고 평생이 지나도 그것에서 느꼈던 감동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메조소프라노 엘리스 쿠테와 ‘사랑’을 주제로 한 공연을 몇 차례 선보였다. 당신의 삶에 있어서 ‘사랑’과 같은 가장 중요한 가치를 찾는다면. 그녀와 함께한 슈만 음반은 ‘여인의 사랑과 생애’ ‘시인의 사랑’을 중심으로 했으나, 그 가사와 음악은 인간의 모든 측면을 묘사한다. 삶에 있어 단 하나의 가치만 갖는다는 것은 굉장히 제한적으로 다가온다. 진실함과 진정성을 유머와 결합한다면 좋은 기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한 인터뷰에서 “느리고 차분한 감정 표출(Slow, calm release)”이 당신 연주에 있어서 궁극적인 목표라 말했다. 삶에서는 어떠한가? 보통 비루투오소적인 피아노 작품에서 느리고 차분하게 감정을 쏟아내는 것은 적용할 수 없다. 내가 의미했던 바는 작품과 나와의 감정적 깊이와 영적 연결, 그리고 주요 프레이즈의 핵심과 연결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연주할 때 표현의 자유와 진실성, 진정성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사실을 마음에 계속 되뇐다. 언젠가 내 스승이 해주신 말씀이 있다. “연습에서는 완벽주의자가 되고, 공연에서는 현실주의자가 돼라.”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말씀이다.
글 이미라 기자 사진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크리스천 블랙쇼 피아노 독주회
4월 4일 오후 8시 금호아트홀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K457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