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는 여운
이안 보스트리지 & 줄리어스 드레이크 슈베르트 리사이틀
5월 10·12·14일 |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슈베르트 음악은 유난히 조 바뀜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연주자에게는 갑작스러운 이 변화가 당황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슈베르트 음악을 사랑하는 음악가들은 이 것이 슈베르트 음악의 묘미라고들 말한다.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인생의 모습 처럼, 마치 계절이 자연스럽게 바뀌듯 그의 음악적 흐름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2019 서울국제음악제 봄 콘서트로 슈베르트 가곡의 권위자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의 슈베르트 3대 연가곡 무대가 3일 동안 이어졌다. 옥스퍼드와 캠브리지에서 연구 활동을 해 온 인문학자로서, 섬세한 감성과 해석으로 정평이 높은 그는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담아낸 책 ‘슈베르트 겨울나그네’를 통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슈베르트 음악의 아름다움을 전해 왔다.
5월 10일, 12일, 14일에 거쳐 펼쳐진 무대는 ‘겨울나그네’ ‘아름다운 문방앗간 아가씨’ ‘백조의 노래’로 아름다움 오월에 펼쳐진 자연의 순수한 시정을 담아낸 것이었다.
특히 섬세한 가곡 반주의 지형을 넓혀온 피아니스트 줄리어스 드레이크와의 앙상블은 젊은 슈베르트가 품고 있던 아름다운 세상, 그러나 때로는 절망적인 현실을 따스하고 부드럽게 담아내며 깊은 울림을 주었다.
고독한 방랑자의 처절한 심경을 노래한 가곡 ‘겨울나그네’는 독일의 시인 빌헬름 뮐러의 시에 작곡한 연가곡집으로 슈베르트가 사망하기 1년 전에 작곡했다. 총 24곡으로 사랑에 실패한 젊은이의 고통을 드러내고 있다. 슈베르트의 슬픔과 체념, 쓸쓸하고 비극적인 정서가 이안 보스트리지의 미성에 실려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는 결말은 죽음이라는 비극이지만 싱그럽고 풋풋한 청춘을 노래하며 사랑으로 인해 조바심 내고, 설레고, 달아오르는 사랑에 그리워하고 상처받는 청춘의 아름다운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1823년 작곡된 이 작품 역시 시인 빌헬름 뮐러의 시에 작곡한 연가곡집으로 총 20곡으로 구성되었다. 이안 보스트리지의 맑은 음성과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흐르지 않는 절제미, 슈베르트 특유의 서정이 잔잔하게 흘러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었다. 특히 8번째 곡인 ‘아침인사’에서의 상쾌하고 수줍은 듯한 번민과 9번째 곡 ‘물레방앗간의 꽃’에서의 청초한 눈물의 선율, 14번째 곡 ‘사냥꾼’과 15번째 곡 ‘질투와 자랑’에서의 새로운 변화에 대한 어둡고 불안정한 마음, 19번째 곡 ‘물레방앗간과 시냇물’에서의 슬프고 우아한 서정, 20번째 곡 ‘시냇물의 자장가’에서의 평안하고 담담한 마지막 여운까지 이안 보스트리지는 각 곡마다에 담긴 생생한 스토리를 다양한 선율에 담아 피아니스트 줄리어스 드레이크와의 자연스러운 호흡으로 이어 나갔다.
슈베르트의 3대 연가곡 중 마지막 유품으로 마지막날 연주된 ‘백조의 노래’까지 그가 남긴 아름다운 5월의 세레나데는 많은 청중의 눈가를 촉촉하게 적셨다. 슈베르트의 낭만과 고독과 절망은 그렇게 우리 곁을 지나 또 다른 저 너머의 세계를 향하고 있었다.
‘편히 쉬어라, 편히 쉬어라! 눈을 감아라, 피곤한 너, 방랑자여, 이제 집에 왔네. 이 곳엔 진실 있으니 너 내곁에 누워야 하니. 바다가 모든 시냇물을 마실 때까지.’
노래가 끝나고 피아노의 선율이 사라질 때 까지 고요함을 음미하고 기다리던 청중 역시 이번 음악회를 최고의 무대로 완성시킨 주인공이었다. 국지연
꿈도 삶의 일부다
가무극 ‘나빌레라’
5월 1~12일|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들의 경우, 탄탄한 스토리를 바탕으로 예술성과 대중성을 모두 획득하는 경우가 많다. 서울예술단 역시 이미 ‘신과함께_저승편’을 통해 성공을 맛보았다. 전작이 판타지로 대중성을 획득했다면, 이번 ‘나빌레라’에서는 조금 다른 방식을 택했다. 노인과 발레라는 다소 생소한 소재를 택했지만, 영화 ‘극한직업’ ‘범죄도시’ 등으로 흥행에 성공한 배우 진선규를 캐스팅함으로써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이다.
뛰어난 연기력의 진선규만큼이나 서울예술단 단원들 역시 ‘나빌레라’를 잘 소화했다. 무용 단원들이 극 중 발레 단원 역할을 소화할 때, 이들의 몸동작은 진가를 발휘했다. 특히 눈에 띄었던 것은 진선규와 함께 노인 덕출 역을 맡았던 서울예술단 단원 최정수다. 무용 단원이지만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이며 연극 ‘생쥐’ ‘오이디푸스’ 등에도 출연한 바 있는 그는 이번 작품에서 역시 꿈꾸는 노인을 진부하지 않게 표현했다. 춤을 잘 추지 못하는 역할임에도 중간중간 드러나는 그의 몸짓은 유려했고, 마지막 공연 장면에서 높이 날아오르려는 몸짓은 아름다웠다. 방황하는 청춘의 발레리노 채록 역할을 맡은 배우 강상준 역시 무던한 연기력과 무용수와 유사한 신체 조건으로 극의 사실감을 더했다.
일흔이 넘은 나이지만 어린 시절 타지에서 외로웠던 자신의 곁에 다가와 줬던 발레를 떠올리며 평생의 꿈을 실현해보려는 덕출, 발레 유망주로 꼽히지만 주변 환경으로 인해 좌절감에 사로잡혀 있는 채록. 이들이 말하는 ‘꿈’에 대한 이야기는 다큐멘터리에 가깝고, 진부할 수 있다. 그러나 진부해서, 사실적이어서 더욱 와 닿았다. 자극적인 스토리가 난무하고, 뛰어난 볼거리가 등장해야만 볼 만 하다고 생각하는 오늘날, 잔잔한 이들의 이야기는 되돌아볼수록 곱씹을 거리를 제공한다. 모노톤의 단조로운 무대와 배경은 다소 심심한 듯 했지만, 스토리와 잘 어우러진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갖는다.
꿈에 대한 이야기보다 더욱 와 닿았던 것은 삶과 죽음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첫 장면에서부터 ‘난 그저 늙은 것뿐인데’라고 읊조리는 덕출은 늙었다는 사실, 그리고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에 어떻게든 저항해보려고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긍정적인 분위기를 커다란 줄기로 가져가는 극이기에 극한의 대립이 등장하지는 않으나, 발레를 배우려는 덕출과 그의 가족을 둘러싼 갈등이 전개되는 장면에서는 치매 노인을 부양하는 가족들이 겪는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덕출은 많은 것을 잊게 되고, 채록과 함께했던 마지막 공연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유한하고도 짧은 인생,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지나치게 교훈적이라는 비판에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 가족 간의 대립이나 어린 덕출이 겪었던 아픔 등을 선명하게 드러냈다면 더욱 사실적으로 와 닿았을 것이다. 발레를 이야기의 소재 정도로만 사용했다고 할지라도, 좀 더 화려한 볼거리들이 나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안타까움도 남는다. 서사와 잘 어우러지기는 하나, 극장을 나서는 순간 기억에 남는 넘버가 없다는 점 역시 아쉽다.
그러나 덕출의 천진난만한 미소를 떠올리자면, 그러한 고뇌와 번민들은 모두 사라진다. 덕출역을 맡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과 탄탄한 시나리오가 큰 역할을 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발레를 할 때의 덕출처럼 활짝 웃을 수 있는 일을 찾는다면 ‘잘’ 살아온 삶이 아닐까. ‘나비일 레라.’ 우리 모두 나비처럼 날아오르기를, 그리고 날아오름의 끝이 낙하가 아니라 유영(遊泳)이기를 바라본다. 권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