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서울시립교향악단 강은경 대표이사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박선희 대표이사
KBS교향악단 박정옥 사장
사료를 찾아보면 일제강점기 때부터 오케스트라의 창단과 운영은 남성들의 몫이었다. 사회활동 자체가 남성들만의 전유물이던 과거에 그들은 학연, 지연, 혈연을 총동원하여 오케스트라라는 음악의 집을 짓고 파수꾼임을 자처했다. 원로음악가들의 구술사와 사료는 이 과정에서 일어난 영웅담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시대는 바뀌고 있다. 지휘자와 단원이 명령과 복종보다는 소통을 우선적 가치로 택하는 시대가 된 지금. 오케스트라 운영의 논리와 감각도 새로운 분위기를 모색하며 기존 색을 탈피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세 오케스트라의 연이은 여성 대표 취임은 음악계는 물론 사회 전반에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2018년 3월 서울시향 강은경 대표이사 취임과 2018년 9월 KBS교향악단 박정옥 사장 취임에 이어 2019년 1월 코리안심포니 박선희 대표이사가 임명되어 세 오케스트라 운영진의 퍼즐이 완성되자 여풍(女風)론이 거론되기도 했다.
이번호 특집은 세 여성 대표들의 이야기를 통해 음악사회에 부는 여풍과, 변화를 입고 있는 오케스트라 운영과 현실을 담아 보았다. 세 CEO로부터 받은 답변들을 재구성(PARTⅠ)하니 대표의 개성과 오케스트라의 특성이 보이고, 개별 질문과 대답에선 구현하고픈 미래(PARTⅡ)가 보인다. 원로평론가 이상만 선생이 CEO들과 독자들이 기억해야 할 세 오케스트라의 창단 초기를 회고(PARTⅢ)했다(인터뷰이 성명표기는 가나다순).
PARTⅠ. 3명의 CEO에게 묻고 듣다
오케스트라 대표의 하루 일과와 주요 업무는?
강은경 생각보다 광범위하고 다양한 성격의 일들이 혼재되어, 늘 숨 가쁘게 돌아간다. 강행군으로 해외출장을 다녀오곤 하는데 귀국 편 항공기에서 나의 동선을 기억했던 승무원들이 같은 일정임을 알고 놀란 적도 있었다. 윌슨 응 부지휘자의 실질적 한국데뷔였던 교향악축제(4월 12일)가 있던 날도 귀국 직후 시차적응도 하기 전에 공연장으로 직행하여 후원자·관객들과 만나야 했다. 나열하면 길어지겠지만 결국 내부구성원인 단원들과 사무국직원들은 물론 가까운 이해관계기관인 서울시정부와 의회, 이사회, 노동조합, 후원회, 시향을 아끼는 관객들, 언론 등과 하나의 방향을 위해 ‘소통’하고 ‘설득’하는 것이 이 업무의 핵심이 아닌가 한다.
박선희 1월 11일부터 임기를 시작했다. 교향악축제(4월 11일) 참가를 마친 지금 세어보니 14회의 공연을 지나왔다. 일찍 출근하여 수북이 쌓인 종이신문을 읽는다. 여기까지가 나만의 ‘아침 의식’이고, 그 뒤로는 나의 시간이 아니다. 직원들이 업무를 가져오고, 리허설을 마친 단원들이 사무실에 찾아오며 산발적인 회의와 미팅이 생긴다. 언제든지 들어오라고 대표실의 문도 늘 열어 놓는다. 직원들은 불편하겠지만, 같은 공간에서 그들과 함께 호흡하고 싶다는 못된 이기심(?)을 쉽게 포기 못 하겠다. 직원, 단원들과 함께 나누는 점심시간은 업무 파악의 지름길과도 같다. 아주 유익하다. 이외 매 연주회에 참석하여 연주의 컨디션을 체크하고, 예술감독, 지휘자, 단원, 관객들과 부지런히 만난다.
박정옥 오케스트라 경영에 대해 판단하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들의 연속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의견이 교차하는 지점에 늘 서 있다. 그것을 청취하고 논의하기 위한 내부 회의가 참으로 많다. 오케스트라 운영을 위한 재정을 가장 많이 고민해야 하는 이도 대표이다. 그래서 점심식사와 저녁식사 등 밤낮으로 끊임없이 외부 미팅과 약속을 이어나가고 있다. 저녁에 여러 음악회에 참석하는 것도 지금의 일과 중 중요한 하나가 되었다.
음악을 전공했냐는 질문을 많이 받을 텐데.
박선희 그만큼 음악계는 전문가들로 구성된 곳이다. 그저 남들이 배우는 만큼 평범하게 피아노를 배웠다. 중학교 때 진로를 놓고 살짝 고민도 했지만 이 길로 들어서진 않았다. 다만 대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에야 음악계를 둘러싼 여러 직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운명 같은 게 느껴졌다. 어떻게 하면 이 분야에서 일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만 하던 때였다.
박정옥 유치원 시절에 아버지께서 피아노를 사주셨다. 아버지의 꿈은 피아니스트셨다. 그 꿈을 딸로서 이루어 드리진 못했지만 아버지를 통해 음악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키울 수 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합창단을 지휘하기도 했고, 방송국에서 문화예술 담당 PD로 근무하며 자연스레 이 자리까지 흘러온 것 같다.
외부에서 보았을 때는 몰랐으나 대표가 되고 보니 ‘아! 이건 오케스트라 대표만이 할 수 있는(혹은 해야 하는) 업무구나!’라고 생각하는 게 있다면?
강은경 오케스트라라는 특수한 유기체 속에서 다양한 것을 발견하며 느끼는 경이로움의 순간들이 있다. 100명이 넘는 개성 강한 예술가들이 하나의 소리를 낼 수 있도록 조직관리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CEO로서 조직을 위한 결정의 순간은 긴장된다. 결국 ‘사람’ 관계에서 그때마다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관건이기에 지혜의 소중함을 매 순간 느끼고 있다. 그러고 보니 예술에 관한 이해 이상으로 법과 공공행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리라는 점은 미처 예상하지 못 했었다.
박선희 오케스트라의 ‘내일’과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단언컨대 코리안심포니는 근성이 남다른 오케스트라다. 1985년 창단 직후 국립오페라단·발레단·합창단, 예술의전당 등과 부지런히 협업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는 “부단한 연습과 좋은 연주만이 살 길”이라던 홍연택(1928~2001) 초대 음악감독 및 상임지휘자의 철학이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라고 본다. 내부적으로 우리의 개성과 강점을 더욱 살찌우는 방법을 모색해야하고, 외부적으로 이러한 특별함을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잡아야 한다. ‘뒤쳐지지 말자’가 아니라 ‘우리만의 분야를 더욱 공고히 하자’는 것이다. 또 다른 것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 질문을 통해 배경, 환경, 조직을 배우고 있다. 이는 앞으로의 변화를 위해서다. 아인슈타인의 말을 인용하면 내겐 ‘질문이 정답보다 중요하다.’
박정옥 오케스트라의 재정 충당을 위해 대표가 이렇게 많은 노력과 신경을 써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 한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 오케스트라 대표들에게 이것은 공통의 고민일 것이다. 나 역시 우리 교향악단이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재정을 확보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가장 큰 숙제다. 두 번째로 의견 조율이다. 100여명에 달하는 단원과 직원들이 각자의 의견을 내는데, 이를 조율하고 조정하는 업무 역시 많은 정신적 노동력이 들어가는 일이다.
오케스트라는 예술을 다루지만, 그 운영과 작동 원리는 일반 경제기업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이러한 기업 문화에서 CEO는 대부분 남성인 경우가 많고, 젠더 논리가 기업의 운영방식에 대입하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여성 CEO의 감각과 운영 방식도 남성보다 여성이 많은 음악계에선 오히려 특별한 시너지나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강은경 오케스트라는 영리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민간 기업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수익성보다는 공공성, 성과 일변도보다는 절차적 정당성 등이 주요한 가치가 되는 것이다. 또한 소프트파워를 대표하는 문화예술을 다루기 때문에 여성으로서의 섬세함과 부드러움, 유연함이 소통을 통해 구성원들의 상처나 필요를 살피고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특히 노사 관계에 있어 승패가 아니라 상생과 화합을 이루게 하는 조정자로서의 관점은 여성성이 가진 장점이 아닐까 싶다.
박선희 예술분야의 여성 CEO를 바라보는 시선과 인식은 다른 분야에 비해 부드러운 편인 것 같다. 하지만 다른 성별의 입장이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젠더 감수성은 더 발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코리안심포니의 단원 중 60퍼센트 이상이 여성이다. 여성이 많은 조직은 당연히 특정한 문화가 있지만 국내 오케스트라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제일 안타까운 것은 육아와 출산에 관한 어려움을 들을 때다. 출산과 육아가 오케스트라 활동과 양립하기 위해 어떤 여건을 마련해야 하고, 정부의 정책과는 어떻게 발맞춰나가야 하는지 대표로서 고민이 많다. 그 대안이 제도화되어 선순환 되기까진 시간이 걸릴 테고.
박정옥 지난 36년간 방송국 PD로 일했다. 방송국 PD는 한 프로그램을 맡으면 적게는 열댓 명, 많게는 수백 명의 스태프와 협업해 나가야하는 일종의 ‘단기 계약직 CEO’이다. 이들 모두를 이끌고 갈 리더십과 포용력이 필요한 자리다. 오케스트라 CEO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성별의 차이로 시너지가 나거나, 혹은 갈등의 경험은 없는 것 같다.
서울시향에는 티에리 피셔와 마르쿠스 슈텐츠 수석객원지휘자가, 코리안심포니에는 정치용 예술감독이, KBS교향악단에는 요엘 레비 음악감독이 재직 중이다. 대표로서 바라본 이들은 어떤 지휘자인가?
강은경 관객들에게 비쳐지는 피셔는 이지적인 현대음악에 강하고 지휘 동작이 정제되어 있는 한편 슈텐츠는 어떤 곡이든 불처럼 요리하는 이미지로 비쳐진다. 그러나 리허설, 의사결정방식 등에는 의외의 면이 있다. 피셔는 스위스 태생이지만 미국 오케스트라(유타 심포니 음악감독)를 이끌고 있어선지 신대륙형 지도자의 특성을 지녔다. 소통을 즐기고 경영적 현안에도 적극적이다. 한편 슈텐츠는 전형적인 지휘자형이다. 친화력이 대단하고 매순간 열정적이지만 음악에 있어선 타협이 없는 완벽주의자이다. 북미와 유럽의 스타일을 갖춘 두 지휘자가 한 몸이 되어 적절한 보완과 균형을 이루고 있다. 결론적으로 ‘냉정과 열정’이다.
박선희 코리안심포니의 정체성을 꿰뚫어 보는 신중하고도 합리적인 혜안의 소유자다. 예술 단체의 생명력은 무대와 예술에서 나온다. 음악적으로 단원들과 관객들에게 영양분이 되는 새로운 작품 연주와 소개에 있어서 그는 일종의 소명의식을 갖고 있다. 이러한 그의 매력이 코리안심포니를 둘러싼 음악적 환경을 다져준다. 코리안심포니 역시 이러한 시도와 신작에 대한 훈련이 잘 되어 있으니 최상의 만남이 아닐까.
박정옥 외부에서 보는 시각과 내부에서 보는 시각이 조금 다른 것 같다. 새로운 작품과 협연자를 선보이는 모습을 선보인다는 점에서 관객들에겐 ‘얼리어답터’의 이미지로 다가가는 경우가 많을 텐데, 내부적으로 볼 때 6년 동안 KBS교향악단을 이끈 그는 유능한 ‘선생’의 이미지가 강하다. 탁월한 암보능력과 티칭 능력을 지녔다. 한 단계 높은 단계로의 진입을 위해 노력하는 ‘도전자’의 면모도 갖췄다.
서울시향은 작년 11~12월에 유럽 5개 도시로, KBS교향악단은 지난 3월 한국·폴란드 수교 30주년을 기념하는 유럽 투어를 다녀왔다. 해외 관객들이 한국 오케스트라에 대한 관심과 자세를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이었을 텐데, 그들의 자세는 어떠했나?
강은경 12월 1일 파리 데뷔 공연(메드 드 라 라디오) 당시 투어로 인해 녹초가 된 우리를 맞아준 것은 이른바 ‘노란 조끼’ 시위대였다. 대통령의 유류세 인상에 반대하는 시위였는데, 공연 직전에 도로가 마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연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공연장 주변을 살펴보니 놀랍게도 파리 시민들이 보안검색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마움이 느껴져 20분을 연기하며 공연을 강행했고, 마지막 곡인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에서는 단원들이 필사적으로 힘을 모아 열과 성의를 다하는 것을 보며 피로가 사라졌다. 그 곡을 수백 번도 더 들었을 것 같던 파리 관객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기립박수를 보냈다. 엄청난 에너지의 교감이 느껴져 눈물이 핑 돌았다.
박정옥 유럽 현지인들이 보낸 찬사와 기립박수 속에서 우리 교향악단이 참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특히 폴란드 작곡가 펜데레츠키를 비롯하여 여러 직원들의 찬사를 잊을 수 없다. 그들은 훌륭한 연주였다며 2021년에 재초청하고 싶다는 제의를 현지에서 받을 정도로 무척이나 고무적이었다. 창단 이후 처음으로 클래식음악의 심장과도 같은 빈 무지크페어라인 무대에 오른 단원들이 감격하던 모습도 지금은 머릿속에 한 장의 사진처럼 남아있다. KBS교향악단 뿐 아니라 한국 교향악단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던 현지 관객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관심과 매너, 음악회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를 보며 문화를 아끼는 마음가짐과 부러움이 컸다.
여러 오케스트라의 운영 사례를 연구했을 텐데, ‘행정’적으로 가장 부러운 오케스트라가 있다면?
강은경 다양한 오케스트라들이 성장해 온 역사를 지속적으로 살펴보는 편이다. 단원들의 자율성이 반영되는 현상도 오케스트라마다 달라 매우 흥미롭다. 최근에는 LA 필하모닉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국가나 지자체가 아닌 민간과의 협력으로 자생적 모델을 만들어가는 미국 오케스트라의 운영 디테일에 놀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서울시향이 ‘특정인물’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유기체가 되도록 하기 위한 조사와 컨설팅을 수행하고 있다.
박선희 먼저 베를린 필하모닉의 ‘디지털 콘서트홀’이다. 이것은 행정조직이 먼저 아이디어를 개진한 게 아니라 단원들이 의견을 모아 시작한 것이라 들었다. 단원들의 의견으로부터 이 프로젝트가 현재 세계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시사점이 아주 크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NHK 심포니의 막강한 예약 시스템. 연 단위, 시즌(계절), 공연장 별로 타입을 구분하여 판매한다. 세 번째는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들이 시행하는 교육프로그램이다. 관객 개발은 물론 음악의 가치를 전파하기 위한 콘서트 기획에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 또한 부설 아카데미는 젊은 연주자들과 미래의 단원들을 양성하는 데에도 중요하다.
박정옥 행정의 기준으로 볼 때 빈 필하모닉이다. 가장 민주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구성원들이 지휘자를 선출하고, 또 그들이 대표를 선정한다. 이러한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대표가 선정되면 구성원들이 행정에 대한 신뢰와 지지가 자연적으로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닮고 싶은, 좋아하고 존경하는 여성 리더가 있다면?
강은경 뉴질랜드 저신다 아던 총리. 최근 국가적 어려움에 처했지만 조용하고 용기 있게 국민들을 위로하고 포용하는 외유내강의 리더십이 인상적이었다. 위기 상황에서 여성성의 리더십이 빛을 발한 사례가 아닌가 싶다. 조직의 실력은 개인의 역량보다 체계적인 시스템에 기반 한 ‘팀 플레이’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특히 예술가가 아닌 경영자로서, 누군가가 서울시향을 생각할 때 특정 리더가 떠오르기보다 조직의 시스템을 기억하게 하고 싶다. 훗날 좋은 시스템을 가꾼 역량 있는 리더로 기억되고 싶다.
박선희 바이올리니스트 미도리가 2007년부터 유엔 평화특사로 활동한다는 기사를 접한 적은 있는데, 그 이전부터 여러 개의 비영리재단을 창립해 이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이다. 음악의 가치를 인류애, 인도적 의미와 함께 추구하는 모습에 매료되었다. 나의 지인도 미도리가 이러한 재단 운영과 활동을 위해 절약하며 검소하게 생활하고 있어 이 좋은 뜻을 널리 알리면 좋겠다고 말한 적도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니 세계 최고의 음악가의 삶 전체가 내게 의미 있게 다가왔다.
PARTⅡ. CEO 3인 3색을 보다
강은경 서울시향의 전통을 이어갈 단원들과 시스템
공연을 위한 법학을 전공했는데 이론과 실천, 책상과 현장에는 늘 괴리와 차이가 있다. 그 사이에서 오는 힘겨움도 있지만, 그것을 메워보려는 의욕도 강해 보인다. 결론적으로 오케스트라 운영은 지식보다는 현장의 지혜를 더 필요로 하는 ‘실전’일텐데,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주전공인 문화예술법 연구에 동기부여를 한 것은 현장에서 나온 질문들이었다. 첫 저서 ‘계약에서 공연장까지’(2007)는 과거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에 재직하며 ‘월드오케스트라시리즈’의 문을 열었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당시 국내에는 오케스트라 오퍼레이션과 관련된 참고자료가 없던 때였다. 뉴욕·필라델피아·베를린·런던 등지를 출장 다니며 내한을 유치했던 경험, 당시 생소했던 오케스트라노동조합 단체협약에 의거한 계약 조건을 협상하면서 느낀 수많은 물음들을 이 책에 정리하여 일종의 매뉴얼처럼 만들었다. ‘공연계약의 이해’(2012)는 확장판으로, 위키피디아처럼 동료들이 집단지성을 쌓아갔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 이어서 다양한 예술이 펼쳐지는 뉴욕(벤저민 N.카도조 로스쿨)에서 지식재산법을 연구하며 예술의 본질과 가치에 대해 자문할 수 있었고, 귀국 후 문화예술과 공공정책에 대한 공부 덕분에 공공기관인 서울시향의 갈 길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고민하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경험들이 오케스트라 CEO로서 예술성과 공공성의 합리적 접점을 찾는 데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정명훈 전 예술감독 시절에 비해 차이점이 있을 것이다. 관객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당시에는 레퍼토리와 협연자보다 ‘마에스트로’만 보였던 반면, 현재는 다양한 지휘자-레퍼토리-협연진이 무대에 오르고 있다. 관객들이 열광한 마에스트로라는 ‘중심’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을 것이다.
정명훈 전 예술감독이 ‘서울시향 사운드’에 큰 기여를 한 것은 분명하다. 그것을 함께 만들던 단원들은 지금도 같은 자리에서 그 전통을 지켜나가고 있다. 이제 새로운 음악감독이 부임해 새 도약을 이루어 내겠지만,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단원들이 함께 할 것이다. 수많은 오케스트라 관계자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이 ‘오케스트라의 주인공은 단원들’이라는 것이다. 오케스트라는 ‘함께하는 예술’이며, 나 역시 구성원들이 만들어가는 경이롭고 드라마틱한 서울시향을 날마다 경험 중이다.
서울시향의 부지휘자는 한국의 젊은 지휘자들이 동경하고 선호하는 자리다. 윌슨 응의 취임을 놓고 한편에선 한국지휘자들에게 기회를 주지 못했다는 일견도 있다.
최수열 부지휘자가 부산시향에 부임하던 2017년 공모에 적격자가 없었다. 이후 공익공연에 일부 지휘자를 시범 기용하는 방식으로 기회를 제공해왔다. 지난해에 공모 범위를 해외로 확장했고 113명이 지원을 했다. 그중 한국인은 38명. 해외 지원자 중에 유수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출신도 있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 1차·2차 전형 및 인터뷰 등을 통해 단원들의 의견과 내·외부 선정위원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윌슨 응이 선정됐고, 단원·관객·평단 등 내·외부의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 부지휘자 정원은 2인으로, 선정된 수석 부지휘자(Associate Conductor) 이외 부지휘자(Assistant Conductor)를 연내 공모할 계획이다. 한국 젊은 지휘자들의 국제적인 경쟁력은 충분하다. 재능 있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많이 도전하기를 바란다.
박선희 코리안심포니를 위한 ‘신중한 서두름’
임명되었을 때 이른바 예술경영의 젊은 기수로 화제가 되었다. 주위에서 다양한 반응을 보였을 텐데.
기사를 접한 음악가들과 지인들로부터 많은 전화를 받았다. 많은 음악가가 코리안심포니의 강인한 정신과 도전의 역사에 관해 들려주었다. 이곳은 오늘날 존경 받는 음악가들이 젊은 시절과 소중한 청춘을 바쳤던 곳이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있자니 경이감마저 느껴졌다. 첫 출근 전부터 이미 정신 교육을 단단하게 받은 셈이다. 우리가 이러한 선배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지금 부지런히 자랑 중이다. 물론 그만큼 어깨도 무겁다.
17년 동안 근무한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은 보수적인 클래식음악계에 ‘참신’ ‘젊음’ ‘신선’을 표어로 내걸고 걸어왔다. 이에 비해 오케스트라 운영에선 ‘안전’ ‘안정’ ‘평화’가 미덕이다. ‘참신’한 기획자로서의 경험이 ‘안정’을 추구하는 대표의 경험에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을까?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의 미션은 음악인재 양성과 새로운 가치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다른 두 개지만, 의미는 동일하다고 본다. 중요한 건 두 가치관을 ‘끈기 있게’ 유지하며 진행해왔다는 것이다. 오케스트라 운영의 ‘안정’과 ‘평화’는 일순간 오지 않으니 ‘끈기’야 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지금은 ‘페스티나 렌테(Festina Lente)’라는 말을 되뇌고 있다. ‘신중한 서두름’이란 의미의 라틴어이다. 심사숙고하지 않은 결정은 위험하고, 그 폐해는 아이러니하게도 치유하는데 시간을 더 소비해야 한다. 우리 오케스트라에 어떤 참신한 색을 입힐지도 고민이다. 그런데 코리안심포니는 홍연택 단장 시절부터 놀랍게도 음악에 있어서 ‘해야 할 일’을 모두 다 했고, 고맙게도 이러한 역사가 참신함과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다.
코리안심포니 홈페이지(www.koreansymphony.com)에 수많은 공연 일정이 뜬다. 오히려 코리안심포니의 협업 일정을 통해 국립발레단·오페라단·합창단의 소식을 접하는 것 같았다. 코리안심포니의 런던 버전이라 할 수 있는 런던 필의 경우 월경(越境)의 담력이 다양한 작품을 보유하고 실험하는 유롭스키 예술감독의 감각과 잘 맞물려 하이브리드 오케스트라의 매력을 보여주고 있는데, 코리안심포니도 이처럼 ‘특별한 분주함’을 지녔다.
특히 예술의전당 상주오케스트라로서 국립예술단체와의 협업은 우리만의 특징 중 하나다. 수십 년 간 다져온 레퍼토리의 ‘폭’과 ‘넓이’는 교향곡만 다루는 여타 오케스트라에 없는 장점이다. 이를 통해 기른 한계 없는 유연성, 강한 집중력, 빠른 적응력은 ‘코심 사운드’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것도 사실이고. 코리안심포니의 포디엄을 거친 수많은 지휘자들도 이 점에 대해 십분 인정하고 칭찬한다. 이러한 ‘특별한 분주함’을 더 정교하게 세공하여 ‘코리안심포니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싶다. 단원들에겐 음악적 역량을 확대하는 기회가 될 것이고, 지금보다도 더 다양한 관객층과도 만나는 기회도 될 것이다.
박정옥 KBS교향악단을 둘러싼 메세나 활성화를 기대
클래식음악계는 보수적이고, 장외(場外)의 인물에 대해 점수나 기대가 높지 않은 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방송국 PD 출신이라는 이력이 주는 난점도 있을 것 같은데.
방송국 PD출신이라고 받았던 눈총이나 이러한 이력이 주는 단점은 아직까진 없다. 혹시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바삐 돌아가는 오케스트라 운영 속에서 그러한 것들을 감정적으로 느낄 만큼 나 자신이 여유롭진 않다. 그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최선을 다해 일하고 있을 뿐이다.
음악감독, 악장, 단원들과 선곡, 협연자, 지휘자 등을 놓고 어떤 의견을 주고받는가?
의견은 나누되 일체의 개입은 하지 않는다. 이 점에 능통한 음악감독과 유능한 직원들에게 믿고 맡긴다.
KBS교향악단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첫 발을 내딛은 한국 클래식음악계를 들여다보는 입장일 텐데, 음악계의 변화나 태세 전환이 필요한 지점과 이유를 듣고 싶다. 예를 들어 대중화, 고급화 등등의 슬로건은 몇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클래식음악계에 유효한 고민이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이루지 못한 현실이기도 하다.
대중매체에서 일한 경험을 대입해보았을 때, 클래식음악과 공연이 대중성이 낮아 보이는 건 맞다. 또한 음악회장에서 매번 마주치는 관객들의 얼굴이 비슷한 경우가 많은 걸 보면 저변이 얇은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지금보다 음악회장을 찾는 관객 수가 지금보다 2~3배가 되기를 희망해본다. 이렇게 되기 위해선 좋은 음악회가 이뤄질 수 있도록 기업의 후원이나 메세나 활동도 좀 더 활발하게 일어나야 한다. 현재 예술에 대한 후원과 메세나 활동에 관심이 낮은 우리나라 상황으로 인해 개인적으로 마음이 아플 때가 많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사진 강태욱(Workroom K), 서울시향·코리안심포니·KBS 교향악단
강은경 서울시향 대표이사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대원문화재단,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강의전담교수 역임
대표가 추천하는 공연 3
유카페카 사라스테의 라벨(5월 23·24일, 롯데콘서트홀) 마르쿠스 슈텐츠의 베토벤 교향곡 ‘영웅’(9월 27·2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장이브 티보데의 생상스(10월 18·19일, 롯데콘서트홀)
박선희 코리안심포니 대표이사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음악사업팀 부장 역임
대표가 추천하는 공연 3
국립오페라단 ‘마하고니 도시의 번영과 몰락’(7월 11~14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214회 정기연주회 스크랴빈 교향곡 3번 외(7월 19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216회 정기연주회 말러 교향곡 2번(12월 1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박정옥 KBS교향악단 사장
‘세계의 문화 도시’ ‘TV미술관’ 등 KBS PD 역임
대표가 추천하는 공연 3
744회 정기연주회 쇤베르크 ‘구레의 노래’(7월 2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펜데레츠키 ‘레퀴엠’(10월 2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콘서트 오페라 ‘라보엠’(11월 22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PARTⅢ. 원로 평론가 이상만 특별기고
서울시향 · 코리안심포니 · KBS교향악단
세 오케스트라의 뿌리를 찾아서
우리나라 최초의 관현악운동은 홍난파를 중심으로 1926년에 설립된 중앙악우회가 처음이다. 당시 세브란스 의과대학 의사의 부인이던 부츠 부인이 설립을 주도했고 지휘를 맡았다. 그래서 최초의 관현악단 지휘자가 여성이라 할 수 있겠다. 아무튼 이러한 관현악운동은 식민지시기 외국문화를 수용하는 가운데 수난과 역경을 거쳐 자생적으로 이루어진 열정과 땀의 소산이었다. 관현악운동은 1945년 해방 이후 여러 악단과 교향악단이 만들어지는 역사로 이어졌다.
서울교향악단과 서울시립교향악단
오늘날 서울시립교향악단은 그 역사를 김생려(1912~1995)와 그가 창단한 서울교향악단으로 잡는다. 해방 후인 1947년 10월, 고려교향악단의 이탈 멤버를 흡수하여 40명의 단원을 확보할 수 있게 되자 1948년 1월 김생려를 재정적 책임자로 서울교향악단이 발족되었다. 이듬해 11월에 김생려는 서울교향악단의 지휘자 겸 단장이 되었고 문교부로부터 정식으로 연간 1000만원의 지원비를 받았다. 이는 2개월분 운영액수에 불과한 금액이었으나, 김생려는 조병옥 미군청정 경무부장, 이범석 국무총리의 각별한 지원을 받는다. 서울교향악단이 성장함에 따라 당시 라이벌이던 고려교향악단과의 알력은 표면화되었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많은 단원들이 죽거나 북한으로 끌려갔다. 그러던 중 9·28서울수복 이후 해군의 도움으로 서울교향악단은 해군정훈음악대가 되었다. 이것이 1954년 해군교향악단이 된다. 당시 대장이었던 김생려는 전쟁의 기운이 가라앉자 단원 전원을 이끌고 서울시에 들어와 1957년에 서울시립교향악단을 발족시켰다. 서울시향의 역사를 김생려를 놓고 볼 때 서울교향악단을 현 서울시향의 전사(前史)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지휘자 중심의 논리라면 KBS교향악단도 임원식(1919~2002)을 놓고 볼 수 있고, 그가 초대 지휘자로 활약한 고려교향악단도 KBS교향악단의 전사(前史)로 볼 수 있다.
KBS교향악단의 우여곡절
임원식은 1946년에 고려교향악단 초대 지휘자로 부임했다. 앞서 말했다시피 고려교향악단과 서울교향단은 경쟁구도였다. 이때 고려교향악단의 이사장직을 맡고 있었고 실제 창설자였던 현제명(성악·작곡)이 도미하여 그 직을 일시적으로 독고선(피아노)에게 넘겼다. 당시 그는 미군청정 산하 문교부의 협정 아래 사단법인으로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수포로 돌아가 현제명이 귀국할 무렵에는 사태는 걷잡을 수 없었다. 후에 채연근이 이사로 활약했고 이영세도 이 수습에 참여했다. 애쓴 보람 없이 당시 연습 중이던 경기여고(미군 주둔)에서 많은 악보가 분실되고 지휘자 임원식마저 도미하여 단원들의 정성과 열의도 아무 효과 없이 26회의 정기공연으로 1948년 막을 내리게 되었다.
KBS교향악단은 1956년 당시 KBS의 음악계장이던 김창구와 그의 서울대 음대 동문이었던 이성재, 이남수, 최영우의 발의로 시작되었다. 당시 육군교향악단 단원이던 이재선, 양재표, 봉두완 등은 앙상블을 만들어 KBS에 출연하곤 했는데, 이를 모체로 관현악단에서 교향악단으로 발전시키고, 이화여대 교수인 임원식을 초대 지휘자로 영입하며 탄생했다.
당시 KBS 방송국은 정부 직속 공보실 산하에 있었다. 음악 애호가였던 공보실장 오재경이 없었던들 이 악단의 탄생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정부는 가난해서 단원의 봉급은 쥐꼬리만 했다. 그런데 1960년 4·19혁명으로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자 하루아침에 KBS교향악단을 없애버렸다. 그래서 KBS교향악단은 1년간 한국교향악단이라는 이름의 민간교향악단으로 활동하다가 5·16 이후 오재경이 공보부 장관이 되어 KBS에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
서울시향과 KBS교향악단의 초대 지휘자인 김생려와 임원식은 단원들 간의 갈등으로 도중하차했다. 1970년 KBS교향악단이 국립교향악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1972년 남산에 국립극장이 건립되면서 교향악단의 운영 주체가 바뀌기도 했다. 홍연택(1928~2001)은 국립교향악단 초대상임지휘자 및 단장으로 활약했다. 악단에 대단히 헌신적이었던 그의 별명은 ‘홍핏대’였다. 열과 성의를 다하여 레퍼토리도 브루크너, 말러 등의 대형 교향곡을 국립교향악단의 중요한 연주곡목으로 정착시켰다.
코리안심포니로 생명줄을 이은 음악가들
그런데 1982년 한국방송공사가 국립교향악단을 재흡수하는 바람에 KBS교향악단이 재창단되었다. 이 과정에서 단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40여 명이 자리를 떠나는 불상사가 생겼다. 1985년에 설립된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는 당시 KBS교향악단에서 강제 이탈당한 40여 명의 단원들이 생명줄을 잇기 위해 극한 상황에서 출범시킨 교향악단이다. 이들을 위해 초대 지휘자 홍연택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초기에 쌍용그룹의 지원으로 어렵게 출범한 코리안심포니는 자생력을 키워야만 했다. 그래서 많은 연주를 하고, 또 남다른 기획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 악단을 이끌어 가야했다. 중간에 쌍용그룹의 지원이 줄어들면서 더 어려운 경영을 하게 되었다. 교향악단의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동구권에서 많은 연주자를 영입해 저비용으로 높은 수준의 연주역량을 높일 수 있었다.
오늘날 코리안심포니는 예술의전당 상주단체로서 국고의 적은 지원을 받는 공적 성격의 교향악단으로 발돋움했다. 국립교향악단이 없는 상황에서 예술의전당과 인연을 맺고 있는 국립오페라단, 국립발레단과 협력하면서 활동하고 있는 코리안심포니는 설립자인 홍연택의 창립정신을 이어받았다.
교향악단은 강한 개성을 지닌 예술가들이 결집되어 있는 특수한 전문 집단이다. 그래서 예부터 이를 다루는 데는 각별한 배려가 필요했다. 독일에서 이런 교향악단을 잘 다스리던 프리드리히 대제는 “관현악단(교향악단) 하나를 운영하는 것이 군대 2개 사단을 거느리는 것보다 힘들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이처럼 힘겨운 단체, 그것도 한국의 대표하는 단체들의 현재 지도자가 모두 여성이라는 점은 역사적으로 보면 큰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겠다. 서양에서 오케스트라의 역사는 남성 위주였다. 오랜 전통의 오케스트라들이 여성을 수용한 것은 여성 인권과 저항의 방편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흐름이 생겨 여성이 주류를 차지하는 것이 시대적 흐름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새로운 역사 앞에 서 있다.
다만 걱정 되는 게 있다. 외국의 교향악단은 예술지도자와 경영지도자로 분리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경영감독이 대표나 사장이라는 이름으로 잘못 자리매김했다. 대단히 잘못 된 일이라고 본다. 예술감독과 경영감독으로의 명확한 구분은 결국 경영진의 군림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대표와 사장이라는 이름값에 도취되지 않는 그런 운영을 기대해본다.
글 이상만(음악평론가)
1935년 태생. 서울중앙방송국·동아방송 PD, KBS음악계장, 서울올림픽 조직위 계폐회식 전문위원, 객석 기획관리실장·편집인·상무이사를 역임했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대제는 ‘관현악단 하나를 운영하는 것이 군대 두 개 사단을 거느리는 것보다 힘들다’라고 술회한 바 있다. 예부터 오케스트라는 각별한 배려를 필요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