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3월 29일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 3월 29일 통영국제음악당 블랙박스
루체른심포니오케스트라Ⅰ
‘운명에 굴하지 않는 우아함으로’
올해 통영국제음악제는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맞아 그의 교향곡 제5번 c단조 Op.67 ‘운명’으로 문을 열었다.
미하엘 잔덜링과 루체른심포니의 ‘운명’은 심각함을 벗어던진 대신, 보다 체계적이고 균형감 있는 베토벤을 들려주었다. 이 곡을 작곡할 당시 귓병이 더 심각해진 베토벤의 시련보다는, 이를 극복한 인간의 위대한 승리에 집중하여 빚어낸 밝은 사운드였다. 이어서 하인츠 홀리거의 ‘장송 오스티나토’가 연주됐다.
존 케이지의 영향이 엿보이는 이 작품에서는 종이를 찢는 소리, 물 따르는 소리 등으로 흥미를 끈 한편, 동형 프레이즈의 반복과 정체가 계속되는 진행이 죽음의 속성을 연상케 했다. 2부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3번 d단조 Op.30에서 첫 프레이즈를 담백하게 노래한 베조드 압두라이모프는 점차 확신에 찬 음악으로 무대를 장악해갔다. 잔덜링과 루체른심포니 역시 탄탄한 호흡으로 뒷받침했고, 풍부하고 낭만적인 색채를 세련되게 표현했다. 피아니스트의 한계를 시험하는 테크닉으로 유명한 이 곡에서 압두라이모프는 고도로 안정된 기교를 선보였다. 빈틈없는 연주로 폭풍 같은 에너지를 순발력 있게 표현한 그는 그칠 줄 모르는 박수에 리스트 ‘라 캄파넬라‘로 화답했다. 이 역시 고른 테크닉과 섬세함이 돋보였다.
도시오 호소카와 오페라: 바다에서 온 여인 ‘서늘하고 매혹적인 바다의 노래’
오페라에 앞서 성시연이 지휘하는 TIMF앙상블의 연주로 도시오 호소카와의 ‘여정 Ⅴ’가 연주되었다. 플루티스트 김유빈이 협연자로 나와 피콜로, 알토와 베이스 플루트까지 자유자재로 다루며 호연을 펼쳤다. 바람소리를 두드러지게 연주하는 기법과 비브라토의 적절한 강조로 동양적인 색채가 묻어났다. 이어서 단막 오페라 ‘바다에서 온 여인’이 시작됐다. 일본 가무극 ‘노’ 전승자 료코 아오키가 노래한 시즈카는 연인과 그 형제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자신의 아이가 눈앞에서 수장되는 처참한 일을 겪은 여인의 혼령이다. 소프라노 사라 베게너가 연기한 헬렌은 중동의 난민으로, 바다를 떠돌다 남동생을 잃었다. 두 사람 다 힘 있는 자들이 일으킨 폭력적 상황에 휘말린 약자를 대변한다.
일본어와 영어가 뒤섞인 리브레토, 노와 오페라 창법이 번갈아 연주되는 전개는 전통음악과 서양 아방가르드가 녹아든 호소카와의 작품 성향을 드러냈고, 두 여성이 서로의 슬픔에 공감하고 치유되는 데 더욱 극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호소카와는 이 작품으로 인간이라면 보편적으로 공감할 슬픔을 말하며, 시즈카와 헬렌이 겪은 비극이 현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헬렌이 반복적으로 토해내는 질문 ‘나는 어디로 가는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는 1955년 히로시마 태생인 호소카와가 종전 후 세대로서, 분단 독일에서 유학하며 이방인으로 살았던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시즈카와 헬렌은 결국 서로를 향한 위로와 축복으로 그 폭력적인 세계를 딛고 일어선다. 어떤 영웅이 나타나 그들을 구원해주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의 고결한 인간성에서 건져 올린 작지만 견고한 희망을 남긴 채 오페라는 막을 내렸다.
글 배인혜(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통영국제음악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