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부츠 현대무용단 ‘피난처’

라미 비에르의 낙관적 피난처

우수 컨텐츠 잡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6월 3일 9:00 오전

REVIEW

5월 16·17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Eyal H

63세의 노년의 안무가 라미 비에르는 이스라엘 북부 가톤(Ga’aton) 키부츠 출신이다. 현재 키부츠 현대무용단의 예술감독이기도 한 그는 이 무용단의 설립자인 에후딧 아르논의 제자로 성장했는데, 에후딧은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였다. 단지 그의 주변에 에후딧 만이었겠는가. 그에게 홀로코스트의 짙은 아픔은 그의 어린 시절 나이테에 깊게 베인 상처로 남았음은 다른 유대인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2018년 4월 예루살렘에서 처음 무대에 올리고 제38회 국제현대무용제(모다페) 개막작으로 초청된 ‘피난처(Asylum)’는 동시대적인 이슈인 난민 문제에 대한 그의 예술적 반응이기도 하지만, 그는 이 문제를 꺼내기 쉽지 않았을 자신의 역사와 현재에서 끌어오는 방식을 택했다. 1시간에 육박하는 대작인 ‘피난처’는 홀로코스트의 집단생활을 암시하는 장면들과 유대인의 깊은 정서를 담아 뜨겁긴 하지만 정제되어 있고, 절망적이긴 하지만 곳곳에 희망과 여유가 보인다.

어느 수용소의 막사에나 등장할 것 같은 커다란 등 하나가 바통에 매달려 삭막한 풍경을 만든다. 후에 그 밑으로 대민방송용 스피커가 매달려 보이지 않아도 다수의 피난민에게 통제자가 있음을 암시한다. 첫 장면의 메가폰을 어깨에 멘 남자는 시끄럽게 지시하거나 계속해서 번호로 호명한다. 군무는 이런 상황에서 난민으로 분하기도 하고 추상적인 표현을 위해 에너지의 수위를 올려가며 춤을 춘다. 이 무용단의 강점은 모두 같은 동작(unison)을 하는 군무가 강력한 주축을 이루며 그로부터 만들어진 에너지를 듀엣이나 소그룹의 춤으로 분리해 힘 있는 전개를 하는 것인데, 이 작품에서의 군무 역시 그런 전개를 바탕으로 하되 심각함과 극한의 비극성을 비껴가는 동작에서의 여유를 보여준다. 중심 시퀀스는 힙을 빼고 무릎은 굽혀 무대의 상수와 하수를 오가는 스텝을 하면서, 얼굴은 관객을 응시한 채 표정과 손은 여러 가지 수인(mudra)으로 한시도 머물지 않는데, 이는 살아있음의 징조를 낙관적으로 보여주었다.

무려 18명의 음악가 작품은 이 작품에 다양성을 주는 동시에 산만함의 이유가 된다. 라미가 음악가 출신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는 질 다른 다양한 음악을 쉼 없이 병렬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사이사이 목소리와 웃음소리, 에코를 동반한 여러 사운드로 전환의 순간을 만들거나 상상력을 자극한다.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우가, 우가’라는 히브리어로 된 동요는 육성과 피아노 반주로 편곡되어 깊은 기억으로 끌고 들어가는 장치가 되고 다른 축에는 비트가 강한 군무용 음악이 빠른 전개와 활력을 생산하며 대비된다.

18명의 무용수는 이 무용단의 보석이다. 군무 앙상블은 매우 신체적이고 빠르며 동작이 많다. 그중에 김수정·석진환·정정운 3명의 우리나라 무용수가 활약 하고 있는 것 또한 군무를 보는 새로운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이 무용단이 요구하는 쉴 새 없는 동작의 파노라마를 유려하게 해내는 이들의 훌륭한 기량은 이 부분에 대한 갈증으로 목말랐을 관객들에게 시원한 해소가 되었다.

설득력 있는 자기 역사로부터의 차용과 군무로부터 생성된 집단적 에너지로 현실적인 피난처를 그리는 동시에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자기의 공간을 찾지 못하는 실존적 불안과 고독을 잘 그렸지만, 약간은 지루한 반복적인 군무 시퀀스는 음악과 더불어 산만함의 진원지가 되었다.

이지현(춤 비평가) 사진 모다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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