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설치극장 정미소의 폐관작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공연하는 마음
극장의 모든 조명이 꺼지는 순간, 관객은 관음의 순간을 맞이한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롯이 나만의 세계를 즐길 수 시간이다. 철학자 미셸 푸코가 제시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 즉 현실화한 유토피아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일 테다. 현실에 존재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모든 장소의 바깥에 있는 곳, 그곳이 바로 극장이다.
관객에게 완벽한 관음의 경험을 선사하려면, 배우는 그 역할에 완전히 빠져들어야 한다. 배우로서의 ‘나’는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배우 윤석화는 연극 인생 40년이 넘도록 이러한 신념을 굳게 지켜왔다. 아직도 무대 위에서 실수할 때면, 극장에서 벨소리가 울릴 때면, 조명이 하나라도 켜지지 않을 때면, 극 중 인물이 아니라 배우 윤석화로 돌아오게 되고, 그날은 극한의 자괴감에 시달린다고 말한다.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 관객과의 약속이 지켜질 때, 그 작품의 메시지가 오롯이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
6월, 윤석화는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모노드라마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공연한다. 영국 현대 극작가 아놀드 웨스커의 극작을 원작으로 하며, 1992년 임영웅 연출·윤석화 출연으로 극단 산울림에서 세계초연 했던 작품이다. 미혼모이자 가수인 45살의 멜라니가 12살 사춘기에 접어든 딸에게 보내는 편지 형태의 작품으로, 서툴지만 진심을 담아 전하는 멜라니의 목소리는 딸, 가족, 나아가 우리 모두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한다.
27년 만에 돌아온 이 작품은 2020년 런던 공연의 오픈 리허설 형태이자 설치극장 정미소의 폐관작으로 선보인다. 연극 ‘대학살의 신’ ‘레드’, 뮤지컬 ‘시카고’ ‘빌리 엘리어트’ 등의 연출가 김태훈이 연출을 맡는다.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작품인 만큼, 두 사람과의 대화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어졌다.
관객에게 전하는 마지막 인사
배우 윤석화와 연출가 김태훈이 함께하는 작업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가 연출한 연극 ‘대학살의 신’과 ‘레드’를 눈여겨봤던 윤석화는 김태훈이 프리랜서를 선언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바로 작품을 함께 해보자고 제안했다.
윤석화 함께 작업하고 싶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젊은 연출가라는 점이다. 이들이 나보다 어쩌면 미숙할지 모르지만 내가 꿈꿀 수 없는, 젊음만이 가질 수 있는 예술 세계가 분명히 있다. 그런 젊고 잘하는 연출가의 도움을 한껏 받고 싶었다.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연출가가 처음 프리랜서로 나와서 작업할 때 많이 외롭고 두려울 것인데, 그런 후배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다. 그 기운이 후배에게 잘 전달돼서 앞으로 거친 세상을 살아갈 때 이 순간을 기억하도록 해주고 싶었다.
김태훈 제안을 받고 깜짝 놀랐다. 특히 임영웅 선생님이 초연한 작품의 연출을 맡게 됐다는 점에서 부담이 컸다. 그러나 윤석화 선생님께서 작품에 대해 깊숙이 알고 계셔서 함께 이야기하는 과정을 거치며 작품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초연과 다른 점은 작곡가 최재광의 곡이 사용된다는 점과, 초연 때는 등장하지 않았던 멜라니의 남편이 목소리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아놀드 웨스커가 대본을 여러 번 수정하는 과정에서 구성상 필요하다고 생각한 부분인 것 같다.
1992년 초연 당시에는 웨스커의 작사가 완료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윤석화를 비롯한 작곡가 조동진·박인영 등이 공동작업으로 가사를 쓰고 멜로디를 만들어 공연에서 5곡을 노래했다. 이번 공연에는 웨스커의 가사에 작곡가 최재광의 멜로디가 더해졌다. 2013년 런던 공연을 하기로 준비하면서부터 웨스커는 대대적인 대본 수정을 거쳤고, 이 때 서정적인 가사의 노랫말을 붙였다. 여러 영국 작곡가가 음악 작업에 참여했지만, 최종적으로 웨스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윤석화가 추천한 작곡가 최재광이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2013년에는 공연되지 못했지만, 2020년 9월 영국 내셔널시어터 피터홀 조연출 출신이자 프로듀서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리 멘지스와의 협업으로 공연될 예정이다.
윤석화 한국 공연이 끝나자마자 영국 공연을 위해 런던으로 떠난다. 한국에서 공연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문득 1992년 초연 당시 공연을 좋아해 줬던 ‘딸’들이 이제는 ‘엄마’가 되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들께는 인사를 하고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함께 가는 젊은 한국 스태프들에게 길과 꿈이 되어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컸다. 런던 공연은 극장은 확정된 상황이지만, 영국 여배우와 더블 캐스팅으로 진행될 것인지, 오픈런으로 진행될 것인지 등에 대해 여러 변수가 남아있다. 리 멘지스는 팀 라이스가 총애하는 프로듀서로, 팀 라이스와 함께 ‘지상에서 영원으로(From Here to Eternity)’를 작업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가족이라는 개념이 모호해지는 오늘날, ‘엄마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극 중 콘셉트를 해석하는 배우와 연출가의 의견은 많은 부분 일치했다.
윤석화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들을 너무 많이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언제부터인가 가족이란 것이 너무 차가워졌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육하고 있다. 사육당한 아이가 어떻게 부모를 사랑하고 존경할 수 있겠나. 극 중 미혼모인 멜라니는 스스로 괜찮은 엄마가 아니고 나의 삶은 엉터리라고 고백하지만, 가슴만큼은 뜨겁고 순수하다. 이런 순수함과 뜨거움을 한국 관객들이 회복했으면 좋겠다.
김태훈 가족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멜라니도 딸에게 편지를 쓰는 과정에서 성장하고 변화한다. 그전까지 확고하게 확립되지 못했던 것들이 편지를 쓰는 과정에서 확실해지면서 긍정적인 에너지가 생겨난다. 이 작품의 메시지는 가족에 한정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상대를 끌고 온다기보다는, 상대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 전제가 돼야 되는 것은 내 모습을 더욱 솔직히 이야기하는 것이다.
“It was our time(이건 우리들의 시간이었어)’은 공연에 등장하는 5곡의 노래 중 하나다. 인터뷰 도중 이 곡을 조금 들려주던 윤석화는 이내 울컥한 듯, 약간의 눈물을 내비쳤다.
윤석화 가끔 연극을 해 온 40년이 넘는 시간을 돌아본다. 관객들의 사랑 덕분에 여기까지 왔고, 이 모든 것들이 합해져서 오늘도 배우라는 길 위에 있다. 내 무대를 기억하는 사람도 있고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또 그들의 수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모두 나의 친구다. 지난 세월을 함께 공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작품에선 ‘우리들의 시간’이 딸과 엄마의 시간이지만, 돌이켜보면 관객과 배우 윤석화가 함께 보낸 삶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지막 공연에서 이 노래를 부를 땐 눈물이 터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부터 울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
배우 윤석화의 혼이 담긴 설치극장 정미소
지금의 설치극장 정미소는 원래 목욕탕이었고, 이후 불타버린 은행 자리였다. 분장실 쪽 벽에 보면 아직도 그을린 자국이 남아있는데, 윤석화는 그냥 내버려 두라고 했다. 2002년, 윤석화와 건축가 장윤규가 의기투합해 건물을 개·보수하고 극장으로 만들었다. ‘쌀을 찧어내듯 예술의 향기를 피워내자’는 의미를 담아 ‘정미소’로 이름 지었다. 윤석화가 16년동안 발행인이었던 ‘객석’ 사무실은 이 건물 4층에 있었다. 192석 규모의 작은 극장이지만 천장의 높이가 6m 이상이나 된다는 점을 십 분 살려 실험적이고 개성 있는 작품이 많이 올랐다. 인간 복제 문제를 제기한 연극 ‘넘버’(2006)를 비롯해 안톤 체호프가 쓴 단막극 10개를 묶은 ‘14人(in)체홉’(2017), 고통스러운 기억을 가진 중년 부부 이야기를 담은 ‘타클라마칸’(2018) 등이 공연됐다.
“원래 이 자리에 지하 8층 지상 7층, 중극장·소극장으로 변형이 가능한 극장을 지으려고 했다. 일본의 7개 극장을 답사했을 만큼 열의가 넘쳤고, 도면까지 다 그려놓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여러 사정으로 건물을 짓지 못하게 됐고, 꿈을 내려놓은 채 이곳을 허허벌판으로 두고 있었다. ‘객석’ 사무실이었던 4층으로 올라갈 때면 이 폐허를 볼 수밖에 없었는데, 볼 때마다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스스로 이곳을 떠나지 않고 붙잡아두기 위해서 정미소를 만들었다. 폐허를 꽃밭으로 만들자, 절망을 희망이라고 우기자. 그러면서 만들어졌던 공간이다.”
당시 개관작은 드라마 콘서트 ‘꽃밭에서’(2002)였다. 이 작품에서부터 작곡가 최재광과의 인연이 이어졌다.
“개관을 준비할 당시 청계천에 나가서 공업용 비닐을 사 왔다. 다섯 겹 정도 해서 건물 외관을 다 막아놓고 거기다 그림을 그려 놨다.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이 하나씩 자신의 소감을 적을 수 있도록 해놓고서, 이를 설치미술이라고 우겼다. 이런 모습들을 다 찍어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비닐이 없어질 때 너무 아쉬웠다. 내게는 피카소의 작품보다 귀중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건물의 조족을 쌓는 데만 3천만원이 든다고 했다. 이 작은 공간을 만드는데도 2억 정도가 들었다. 일단 돈이 없으니 공연을 끝내고서 갚겠다고 했다. 조명도, 음향도 모두 이런 식으로 작업했다. 그러다 보니 가장 돈이 안 들면서도 2억의 이익을 낼 수 있는 공연을 해야만 했다. 이러한 극장 상황이 관객에게는 변명거리가 될 수 없으니, 관객들이 이 시간 이 공연을 보길 잘했다고 느낄 수 있도록 ‘드라마 콘서트’라는 장르를 만들었다. 지금은 흔한 형태지만 그때만 해도 익숙하지 않은 장르였다. 텍스트와 노래가 어우러진 1인극으로, 내 삶의 이야기와 노래들을 엮어서 ‘꽃밭에서’를 올렸다. 이 공연에 들어간 제작비가 200만원이었고, 200만원 들인 공연에서 2억의 이익을 창출했다. ‘꽃밭에서’로 정미소가 완성된 것이다.”
개관 이후 17년간 극장을 운영해오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을 묻는 질문에 윤석화는 잠시 답변을 망설였다.
“젊은 예술인을 후원한 정미소 프로젝트가 기억에 남는다. 그냥 공간이라도 내어주면, 약간의 제작비라도 주면 작품에 진심을 담아내는 이들이다. 특히 극단 여행자의 작품이 영국 글로벌시어터에 초청받아 왔을 때, 너무 보람 있었다. 사실 대학로에 정미소만 한 극장도 잘 없다. 지하로 내려가고 어두침침한 곳이 대부분이다. 정미소의 폐관이 마음 아프지만, 이것이 우리 연극계 전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연극 하나를 붙들고 있었는데도, 그런 윤석화도 이제는 안 되는구나 하는 자괴감은 있다. 그러나 그 또한, 이것이 한계라면 인정해야 한다. 이제는 배우, 자연인이거나 엄마, 이렇게 살고 싶다.”
좋은 공연장은 좋은 작품을 담아내는 곳이다. ‘저 극장에 가면 작품이 항상 괜찮다’는 신뢰를 얻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윤석화는 “극장은 아무리 작고 초라해도 상관없다. 정신과 가치에 맞게 담아낸 퍼포먼스가 중요하다”고 말했고, 그런 의미에서 설치극장 정미소는 누가 뭐래도 좋은 공연장이었다.
“내가 떠나고 누가 사게 되더라도, 이 공간만큼은 계속 정미소가 되길 바라서 그렇게 계획했던 적도 있었는데 세상은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 이후 이곳이 어떻게 활용될지는 나도 알지 못한다. 2년 전부터 매각을 해야 하는 절박한 순간이었다. 오는 9월까지는 모든 것을 빼겠다고 말했다. 건물이 팔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나이가 들면서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때가 왔다며, 자신은 ‘페이드아웃(Fadeout)’해야 하는 시기라고 말했다. 그러나 기억은 영원할 수 있다. ‘It Was Our Time’을 열창하는 그는 결코 관객의 기억에서 페이드아웃 되지 않을 것이다. 설치극장 정미소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이제는 이러한 공간이 있었다며 사람들에게 직접 보여주지 못하고 말로 전해줄 수밖에 없지만, 쌀을 찧어내듯 예술의 향기를 피워내며 많은 연극인에게 희망을 심어줬던 이곳은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아듀, 정미소! 그리고 이곳이 지향했던 ‘연극’ 정신이 영원히 살아 숨쉬길 바란다.
글 권하영 기자 사진 박진호(studio B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