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바이올린 협주곡’ vs ‘더 피아노 협주곡’

영화음악에서 피어난 두 협주곡

우수 컨텐츠 잡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7월 31일 11:50 오후

THEME RECORD

재구성과 재작곡으로 재탄생한 음악

 

영화음악, 음악의 예술적 상상력이 시각에 의존한다는 굴욕적인 탄생 비화 탓에 여전히 다른 음악 장르와 동일한 선상에 두는 것이 망설여지곤 한다. 하지만 시각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청각에 집중하는 OST나, 여기서 더 나아가 재구성된 모음곡의 당당한 어필은 영화음악에 내재한 예술적 가치를 재확인하게 한다. 과거에 오페라와 같은 무대 음악을 콘서트용으로 재작곡하는 것이 흔했듯이 영화음악도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을 수 있다는 존 코릴리아노의 말 역시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OST를 다듬은 연주회용 모음곡은 비교적 흔한 반면, 새로운 작품으로 거듭나는 경우는 드물다. 특별히 협주곡으로 재탄생한 코릴리아노의 ‘레드 바이올린 협주곡’과 나이먼의 ‘더 피아노 협주곡’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조슈아 벨이 재구성한 ‘레드 바이올린 협주곡’

17세기 바이올린 제작의 거장인 니콜로 부소티는 곧 태어날 아이를 위해 생애 최고의 작품을 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인인 안나 루돌피는 자신과 아이의 미래가 궁금한 나머지 점을 보게 되고, 자신이 엄청난 고통을 겪고서 다시 태어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결국 산고로 아내와 아이가 모두 숨을 거두고, 부소티는 깊은 슬픔을 안고 묵묵히 죽은 아내의 피를 칠하여 바이올린을 완성한다. 이 붉은 바이올린은 18세기 알프스 수도원의 소년 카스파르 바이스와 19세기 영국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프레더릭 포프, 20세기 중국의 소녀 샹 페이를 거쳐, 문화혁명을 피해 음악선생 저우 위엔에게 맡겨진다. 그가 죽자 이 악기는 1999년 캐나다 경매시장에 등장하고, 그 섬뜩한 비밀이 밝혀진다. 가는 곳마다 희망과 고통, 그리고 죽음이 따랐던 이 붉은 바이올린의 여정을 그린 프랑수아 지라르 감독의 영화 ‘레드 바이올린’(1988)은 영화만큼이나 영화음악도 명성을 얻었다. 그 작곡가는 미국에서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는 존 코릴리아노(John Corigliano, 1938~)다.

코릴리아노가 국내에 알려진 것은 에이즈 사망자를 추모하는 교향곡 1번 (1988)이 1991년에 그로마이어상과 그래미상을 휩쓸면서였다. 그리고 교향곡 2번(2000)이 2001년에 퓰리처상을 받으면서, 작곡가로서 코릴리아노의 명성은 확고해졌다. 그런데 이 곡들은 진지하면서도 현대적인 표현 요소를 많이 가진 탓에 국내에서 코릴리아노는 어려운 현대음악 작곡가의 범주로 이해됐다. 하지만 그의 많은 음악은 아름다운 멜로디와 우수 짙은 서정성으로 신낭만주의의 기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유럽의 고전적인 표현 양식과 현대적인 감각을 고루 갖추어 폭넓은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코릴리아노의 세 번째 영화음악 ‘레드 바이올린’(1998)도 예외가 아니다. 이 작품은 영화가 포괄하는 폭넓은 시간과 여러 장소만큼이나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으로 구성돼 있다(그는 이 영화음악으로 1999년 아카데미상을 받았지만, 이후 지금까지도 더 이상 영화음악을 작곡하지 않고 있다). 코릴리아노는 4년 후에 이를 바탕으로 무반주 바이올린곡 ‘레드 바이올린 광시곡’(2002)을 작곡했으며, 이듬해에는 4악장 규모의 ‘레드 바이올린 협주곡’(2003)을 내놓았다. 바이올린의 미스터리를 부각하며 전체적으로 신비로 가득 찬 곡이다.

이 협주곡을 최초로 녹음한 것은 2006년 조슈아 벨이었다. 벨은 코릴리아노가 “신처럼 연주했다”고 극찬한 바 있는 OST 연주의 주인공이었다. 이러한 작품들을 연주할 때 연주자는 영화음악적인 극적 표현과 고전미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는데, 벨은 후자에 좀 더 무게를 두었다. 물론 극적 표현을 소홀히 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의 두텁고 부드러운 사운드가 전달하는 감성은 분명 19세기적인 숙명적 고독에 가깝다. 마린 알솝이 지휘하는 볼티모어 심포니의 연주도 독주자가 홀로 빛나도록 돕는다.

2년 후 같은 곡을 녹음한 마이클 러드윅은 마치 영화의 장면들을 세밀하게 그리려는 것처럼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운 음향으로 드라마틱하게 표현하며, 중국 스타일의 선율이나 부서지는 음정의 분산 등 성격적인 패시지들을 강조하여 음악적 효과를 놓치지 않는다. 조안 팔레타가 지휘하는 버팔로 필하모닉은 독주자에 기민하게 대응하며 극적인 효과를 끌어올리면서도 현대적인 음향을 표현해낸다.

 

고전미를 더한 ‘더 피아노 협주곡’

19세기 뉴질랜드의 한 해변 마을에 스코틀랜드 출신의 에이다가 어린 딸과 함께 현지 정착민에게 팔려 온다. 그런데 그녀가 가지고 온 피아노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웃집에 팔린다. 피아노는 6세 이후 말을 하지 않는 그녀에게 유일한 표현 수단이었다. 에이다는 피아노를 돌려받기 위해 이웃집 남성과 성관계를 갖고, 결국 사랑에 빠진다. 이 긴장된 상황은 피아노가 파도에 휩쓸려간 후 에이다가 떠나면서 마무리된다.

바닷가에 덩그러니 놓인 고풍스러운 그랜드 피아노 한 대와 두 모녀. 제인 캠피온 감독의 영화 ‘더 피아노’(1993)는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에게도 이 포스터 한 컷으로 뇌리에 각인돼 있다. 이 영화의 음악을 만든 작곡가는 영국 출신인 마이클 나이먼(Michael Nyman, 1944~)으로, 그는 특이하게도 작곡가로 활동하기 이전부터 이미 유명 인사였다. 20세기 후반, 장르를 불문하고 전 세계를 매혹한 ‘미니멀리즘 음악’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사람이 바로 그였다. 음악학자와 평론가로 커리어를 시작한 그는, 24세였던 1968년 ‘더 스펙테이터(The Spectator)’지에 기고한 코넬리우스 카듀와 백남준에 대한 리뷰에서 이 용어를 언급했다. 그런데 1977년 18세기 음악의 편곡을 맡으면서 작곡에 대한 열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곧 자신이 유럽 미니멀리즘 음악의 선구자가 됐다.

나이먼이 ‘더 피아노’의 음악을 작업하기 시작한 때는 1991년 가을로, 주연을 맡은 홀리 헌터를 위한 피아노 독주곡을 먼저 완성했다. 주인공인 에이다가 스코틀랜드 출신이기에, 18세기에서 19세기에 유행했던 스코틀랜드 민요가 주제로 사용됐다. 이듬해 여름에는 영화의 배경으로 사용될 현악과 색소폰 편성의 관현악을 완성했다. 그런데 때마침 릴 음악제로부터 작품을 위촉받자, 나이먼은 1993년 봄에 피아노 선율을 주요 주제로 두고 관현악을 2관 편성으로 보강하여 ‘더 피아노 협주곡’을 완성했다. 나이먼은 이 작업에 세 가지 목표를 두었다. 짧게 작곡된 여러 곡을 통일성 있는 구조로 구성할 것, 콘서트 작품에 걸맞은 편성과 극적 효과를 배가할 것, 그리고 협주곡에 맞게 독주 파트의 난이도를 향상시킬 것.

전체는 쉼 없이 이어지지만, 곡은 고전적인 협주곡이 연상되는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 부분 ‘해변’은 스코틀랜드 민요 ‘어여쁜 겨울이 지금 지나간다(Bonny winter’s noo awa)’가 곡 전체를 이끌어간다. 두 번째 부분 ‘숲’은 느린 악장의 역할을 한다. 나이먼의 선율은 반음계적으로 진행되며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중간에 1악장의 주제를 응용한 선율이 잠시나마 긴장을 해소해 주기도 한다. 세 번째 부분 ‘오두막’은 ‘숲속의 꽃’이 빠르고 소란스럽게 연주된 후, ‘보니 진’이 첼로와 트럼펫으로 중후하고 느리게 연주된다. 그리고 나이먼이 작곡한 선율도 등장한다. 넷째 부분 ‘해방’은 ‘숲속의 꽃’ 선율에 리듬을 조금 끌어당겨 속도감을 주며 시작하지만, 아직은 긴장감이 덜 풀린 다양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리고 ‘겨울은 지금 떠나간다’로 분위기를 한껏 밀어 올리며 마무리한다.

이 협주곡은 초연자인 캐스린 스콧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작곡자인 나이먼이 지휘하는 로열 리버풀 오케스트라의 1994년 녹음이 레퍼런스의 위치에 있다. 이 연주는 피아노 독주자의 활약을 바탕으로 민속적 특징이 강하게 드러나 ‘스코틀랜드 협주곡’이라고 불러도 될 듯싶다. 심지어 우리나라 민요 선율과 리듬이 연상되기도 하는데, 멀리 떨어진 두 나라의 민요가 음악적으로 적지 않은 유사성이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란다. 관현악에서는 각 악기가 선명하게 부각돼 투명하게 들리며, 금관의 뚜렷한 사운드가 청명한 느낌을 준다. 반면 현악은 분위기를 받쳐주는 역할에 그친다.

3년 후 이루어진 존 레너한의 피아노와 유아사 다쿠오/얼스터 오케스트라의 녹음에서는 독주자가 후방에 위치한다. 피아노보다는 현악이 주도하는 관현악이 앞서있는데, 그래서 전자의 연주에 비하면 분위기를 만드는 데 집중하고 민속적인 특징은 내재된다. 이러한 특징은 작곡가의 의도와는 거리가 있을 수도 있지만, 영화의 영상미나 비극적 이미지와 더욱 효과적으로 연결됨으로써 스코틀랜드가 아닌 나이먼의 음악적 상상력을 보다 부각한다.

앞에서 소개한 두 영화음악이 협주곡으로 재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특정 악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영화 스토리의 덕이 크다. 반면 영화 ‘와호장룡’은 악기가 중심에 있지 않지만, 탄둔(Tan Dun, 1957~)은 이 영화음악에 많이 사용된 첼로를 독주 악기로 내세워 ‘와호 협주곡’(2000)을 만들었다. 한국 영화가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수상하고 있는 요즘, 국내에서도 여전히 높은 장르 간의 벽을 깨고 영화음악이 클래식 음악으로 재탄생하기를 기대해본다.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기고와 해설, 강의 등 다양한 접점으로 우리시대 음악으로서의 클래식을 나누고 있다. 서울시향 ‘콘미공’ 진행자, 화음쳄버오케스트라 자문위원, 현대음악앙상블 소리 프로그래머, 드림싱어즈 음악감독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달의 추천 영상물

코릴리아노 ‘레드 바이올린 협주곡’

조슈아 벨(바이올린)/마린 알솝(지휘)/볼티모어 심포니 오케스트라

SONY 82876 88060 2

나이먼 ‘더 피아노 협주곡’

캐스린 스콧(피아노)/마이클 나이먼(지휘)/로열 리버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Argo 443 382-2

Leave a reply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