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6월 12~14일 |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초연된 지 20년이 지난 작품은 어떻게 감상해야 할까? 고전이라기엔 아직 섣부르고 신작에 비해선 김이 살짝 빠진 작품.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의 ‘신데렐라’(1999)가 그렇다. 이번 내한공연을 감상하려면 조금 특별한 시선이 필요했다.
이번 내한에선 입단 3년 만에 수석무용수가 된 안재용에게 이목이 쏠렸다. 그런데 ‘신데렐라 아버지’ 역할을 맡았다며? 그게 신데렐라만큼이나 주요 배역이라며? 수군거림이 들렸다. 배역의 의외성은 마이요의 안무 스타일로 관심을 돌렸다.
마이요는 고전을 재해석하는 게 주특기다. ‘신데렐라’ ‘잠자는 미녀’ ‘백조의 호수’ 등 원형을 재해석한 작품이 많다. 낡은 이야기에 새로움을 불어넣기 위해 그는 신데렐라 아버지와 생모의 사랑을 부각하고 생모와 요정을 동일 인물로 만들었다. 따라서 신데렐라와 왕자라는 기존 주인공 외에 계모·새언니·신데렐라 아버지·요정-생모가 지분을 고루 나누게 되었다. 감상의 초점은 어떤 무용수가 이를 제 것으로 차지했느냐이다.
14일 공연에서 작품의 내러티브를 장악한 사람은 요정(카트린 슈레더)과 왕자(프란체스코 마리오티니)였다. 살색 레오타드에 가까운 의상을 매끈하게 소화한 슈레더는 허황한 설정들을 엮어가는 요정의 마법을 설득시켰다. 요정은 직립보행 하지 않는다. 곤충처럼 손목을 꺾어 눈 비비는 요정은 춤을 추는 게 아니라 그냥 살아있었다. 마리오티니의 왕자는 흠결 많은, 그러나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왕자를 따라다니며 아첨하는 친구들을 보고 있자면 왕자가 그만큼이나마 성장한 것도 대견하다. 눈앞의 즐거움만 좇던 그가 신데렐라를 통해 진솔하고 예를 갖출 줄 아는 인물로 거듭나는 성장 서사가 펼쳐진다. 안재용의 ‘아버지’는 회한을 지닌 인물이라기엔 너무 젊고 풋풋했다. 사랑에 충실했고 모두에게 젠틀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잘 알지 못하고 계모에게 휘둘리는 인물. 길쭉한 사지를 시원스럽게 뻗고 스피디하게 도약하는 안재용은 서정적이고 기품있었다. 캐릭터를 덧입으면서 변모할 미래가 기대된다. 신데렐라(알레산드라 토뇰로니)는 상대적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 요정-왕자-계모가 주도적으로 이끌다 보니 수동적인 신데렐라는 제 이야기를 들려줄 기회가 적었다. 디즈니의 실사 영화(2015)도 신데렐라를 자기 인생을 찾아가는 인물로 그리는데 말이다. 계모(미모자 코이케)는 국립발레단의 윤혜진이 보여줬던 카리스마와 에너지, 믿을 수 없는 기럭지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실망스러웠다.
동화책 낱장이 날리는 듯 미끄러지며 무용수를 등퇴장시키는 무대장치, 코르셋과 가터벨트, 드레스를 부풀리는 파딩게일 등을 사용한 강렬한 의상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쾌감을 준다. 오히려 낡은 것은 작품 전반에 스며있는 여성 혐오와 오리엔탈리즘이다. 계모와 새언니는 ‘천박한 여성’을 상징하고, 왕자가 궁정과 이국에서 만나는 여성들 역시 별다른 바 없다. 얼굴 전체를 가린 붕대, 붕대로 둘둘 말았다가 썩은 발로 상징되는 성형수술의 모티브, 노골적으로 가슴을 만지게 하여 성을 무기화하는 것, 왕자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계모와 궁정 여인들 모두 병적이다. 게다가 왕자가 이국을 탐험하며 만난 중국풍의 노란 여성과 아프리카풍의 붉은 여성들은 어떠한가. 서양 백인 남성의 성장 서사에 여성과 동양을 소비하는 장치를 21세기의 작품에 굳이 넣는 이유를 모르겠다. ‘고전의 재해석’도 고전만큼이나 낡을 수 있다.
글 정옥희(무용 칼럼니스트) 사진 마스트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