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최나경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미소 띤 얼굴이 생각난다. 늘 웃는 얼굴로 주위에는 언제나 긍정 에너지가 가득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왠지 모를 확신이 들었다. 저 밝은 빛 뒤에는 그만큼의 그림자가 존재하지 않을까. 세상 모든 존재가 그러하듯이
글 이미라 기자 사진 김용호
최나경의 발자국
음악과 만난 순간부터 음악가로서 지금의 삶을 이루기까지 그녀는 어떤 길을 걸었을까. 1983년 대전 태생의 최나경은 예원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예고 1학년 재학 중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유학에 대한 그녀의 결심을 두고 많은 선생님의 만류도 있었다. 워낙 똑똑하고 모범적인 학생이었던 그녀는 학과 성적도 탑, 실기 성적도 탑이었기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최나경은 “내가 어느 위치에 꼭 올라가지 않더라도 사람들에게 위로와 사랑을 줄 수 있는 음악을 할 수 있다면 다른 건 다 괜찮다”며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유학길에 올랐다. 스스로 ‘재스민’이란 영어 이름도 지었다. 자신이 동경하는 플루티스트들의 이름에 J가 들어간다며 J로 시작하는 이름을 지으면 그들처럼 될까 싶었단다. 굳은 결심으로 시작한 유학 생활도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1999년 12월. 모두가 밀레니엄을 앞두고 파티를 하던 그때, “나는 연습할 거야”라며 방에 틀어박혀 밤새 연습을 했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였다. 19살에는 부상도 겪었다. 연주자로서 한창 피어날 시기에 손가락 마비 증상이 온 것. 6개월간 악기를 잡지 못했지만, 그때의 경험은 오히려 지금의 삶에 더 큰 플러스가 되었다. 손이 아팠던 것보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상황을 이해해주지 못했던 것이 더 큰 아픔으로 다가왔다 회상하는 그녀는 지금은 자신이 겪은 부상으로 인해 누군가를 더 이해하고 공감해줄 수 있는 마음이 생긴 것 같아 감사하다 말한다. 커티스 음대와 줄리아드 음대 석사과정을 마치고, 플루티스트로 본격적인 커리어가 시작된 곳은 신시내티였다. 신시내티 심포니 부수석(2006~2012)으로 6년을, 이후 빈 심포니 수석(2012~2013)으로 1년을 보낸 최나경에게 세상의 시선이 쏠렸다. 하지만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자리에 오를수록 마음은 더 공허해져만 갔다. 무대를 뒤로하고 빈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항상 무거웠다. 화려함 뒤에 숨은 그림자랄까. 친구에게 문자 보낼 그 짧은 시간조차 나지 않는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는 듯한 생활, 수석 자리에 앉은 동양인 여성 플루티스트에게 쏟아지는 곱지 않은 시선과 질투에 상처는 더 깊어져 갔다.
모든 것에 지쳐있던 그때, 한 남자와의 우연한 만남은 삶을 바라보는 그녀의 가치관에 변화를 가져다준다. 평생의 동반자가 된 남편과의 만남이었다. 호수에 뜬 선상 위의 로맨틱한 만남은 연애와 결혼으로 이어졌고, 최나경은 빈을 떠나 브레겐츠라는 작은 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아름다운 풍경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오케스트라 생활을 하며 힘든 시기를 겪고 난 그녀는 더 단단해졌다. 세상의 시선보다 나의 목소리에 더 집중하게 되었고,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선택할 용기가 생겼다. 빈 심포니를 나온 후 여러 오케스트라의 좋은 제안들을 다 마다한 것도 이런 용기에서 나왔다. 그렇게 그녀는 솔리스트로서의 삶을 선택했다.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삶을 바라보게 되어서일까, 그녀의 눈빛과 미소는 이전보다 더 사랑스럽고 편안해 보인다.
Prologue 대화를 시작하며
직접 만나지 못해 아쉬워요.
그러게요. 지난번에 만난 인사동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어도 참 좋았을 텐데! 이제 곧 미국 텍사스로 투어를 떠나요. 일주일 정도 있다가 오스트리아 집으로 돌아오는데요, 이틀간 머물고 바로 한국에 갈 예정이에요.
체력적으로 힘들진 않나요?
이상하게 그건 또 아니에요. 타고났나 봐요.(웃음) 오케스트라 스케줄과 병행해서 활동할 때 워낙 힘들었어서 지금은 오히려 여유로운 느낌이에요.
얼마 전에 팟캐스트에도 출연하셨던데, 저희에게 들려주실 이야기는 아직 남아있겠죠?
그럼요! 그때는 얼마나 이야기해야 할 지 몰라 더 긴장했었거든요. 이번에는 더 길게, 마음껏 이야기해볼게요!
Take 1 플루트, 그 만남과 시작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플루트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플루트 하기 전에는 주로 남자아이들과 밖에서 뛰어놀았어요. 굉장히 활동적인 아이였죠. 당시에는 재미로 악기를 배우는 게 추세였는데요, 저도 그렇게 시작했어요. 제가 다녔던 초등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악기 하나씩을 꼭 배우도록 했고요.
굉장히 자연스러운 만남이었네요.
처음에는 플루트가 굉장히 쉽고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누구도 이야기해주지 않았던 사실이 있었죠. 시작하기는 쉽지만, 발전 속도는 너무나도 느린 악기라는 것을!
전공을 꿈꿨던 것은 언제부터였나요?
3학년 때 시작해서 처음으로 나갔던 지역 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았고, 4학년 때 나간 전국 콩쿠르에서는 고학년부를 통틀어 은상을 받았어요. 그렇게 재미를 붙여갔죠. 6학년 때 알게 된 예원학교에 너무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컸어요. 그곳에 가면 너무 어린 나이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야 하니까요. 결국 오디션만 보기로 약속했죠.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죠?
학교에서 연락이 왔는데, 수석합격이라는 거예요! 더 가고 싶었죠. 결국 부모님을 조르고 졸라 예원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어요.
긴 타지 생활의 시작이었네요.
마치 지구 반대편에 온 느낌이었어요. 처음에는 집에 돌아와도 부모님이 계시지 않다는 사실이 서운하고 서러웠죠. 그 나이에는 엄마 아빠가 전부였으니까요. ‘삶이 이렇게 힘들 수 있구나’를 처음 깨달았죠. 가족을 떠나서 힘들게 살 정도로 내가 음악을 좋아하는가에 대한 고민도 했고요.
부모님의 걱정도 크셨을 것 같아요.
부모님께서는 힘들면 당장에라도 대전으로 오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제게 위로가 되는 말은 아니었어요. 오히려 다른 부모님들처럼 ‘네가 원해서 갔으니 열심히 해야지! 할 수 있어’라는 말을 듣길 바랐나 봐요. 부모님이 마음 아파 하시는 게 싫어서 어느 순간부터는 괜찮은 척을 하기 시작했어요.
쉽지 않은 시간을 잘 버텨냈네요.
언젠가 남들도 겪을 일을 내가 10년 먼저 겪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때부터는 연습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뒤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달렸던 것 같아요.
성숙한 사고였네요.
어린 나이에 홀로서기를 하며 ‘나는 왜 음악을 하는가?’ 그 ‘왜’에 대해 많이 생각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부모님 때문에, 대학을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음악을 정말로 좋아하기 때문이었어요.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질 정도로. 이 열정이 10년, 2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기를 바랐죠.
학창시절 공부와 실기를 모두 잘했다고 들었어요.
책을 많이 읽은 게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어렸을 때 책벌레였거든요. 운동 아니면 책이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없지만, 당시에는 공부가 좋았어요. 성취욕이 대단한 학생이었군요!배우는 걸 좋아했던 것 같아요. 되고 싶은 것도 많았고요. 운동선수, 의사, 과학자, 소설가를 꿈꾼 적도 있어요. 플루트를 만나고는 여기에 푹 빠져버렸지만요.
가치관에 영향을 주었던 ‘인생 책’이 있나요?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세상적으로 성공한 삶을 살아가던 사람에게 어느 날 갑자기 병이 찾아와요. 그리고 죽음을 앞둔 그의 곁에 아무도 남지 않죠.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준 책이에요.
이 책이 가슴에 와 닿았던 이유는요?
신시내티 심포니에서 빈 심포니로 옮겨갈 때가 생각나요. 신시내티에서나 빈에서나 저는 똑같은 사람이고 같은 실력의 연주자였는데, 빈 심포니로 간다고 하니 온 세상이 제게 친구 하자며 달려들었어요. 그러다 그곳에서 나온다고 하니 그 많던 사람들이 썰물 빠지듯 다 없어지더군요. 저는 여전히 똑같은 사람인데 말이죠. 그때 책을 읽으며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던 것 같아요. 책 속의 주인공처럼 사회적 지위가 사라졌을 때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는 것을 보며 변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소속된 단체를 보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제 연주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죠. 하지만 지금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은 저를 플루티스트가 아닌 인간 최나경, 재스민으로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에요.
Take 2 사람을 향한 시선의 변화
주변 사람에 대한 생각과 가치관이 달라졌네요.
가치에 따라서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변했죠. 요새는 제가 인간적으로 존경할 수 있는 분들이 더 마음에 와닿아요. 꼭 음악을 하지 않더라도요.
‘지금의 나를 이루게 한 사람들’을 묻는다면 누가 떠오르세요?
지난 몇 년간을 되돌아본다면 가장 먼저 제 남편이 떠올라요. 삶을 있는 그대로 보고, 무언가를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친구도 정말 잘 챙기고요. 이제까지 제가 알고 있던 ‘우정’의 개념을 넘어서더라고요. 여기(브레겐츠)에 있는 사람들이 다 그래요. 자신의 직업이나 소속보다는 순수한 모습으로 다가가죠. 그런 모습을 보다 보니 음악가들도 구분 지어 생각하게 되었어요.
‘구분 지어 생각한다’는 게 어떤 의미죠?
활동 영역이 넓어지며 음악적으로 존경해온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볼 수 있었는데요, 음악적인 면과 그 사람의 인간적인 면은 또 다른 영역이더라고요. 가끔 두 가지가 모두 맞아떨어지는 사람을 만나면 너무 감사하지만요.
후자에 속하는 음악가 중 지금 생각나는 사람이 있나요?
지휘자 임헌정 선생님도 존경스럽고, 며칠 전 함께 연주한 키릴 페트렌코도 생각나요. 베를린 필의 새로운 수장이 된 키릴 페트렌코는 그 자체로 너무나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최고 자리에 올랐지만, 관계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작은 인연과 약속을 소중히 하죠. 임헌정 선생님도 권위 의식이 전혀 없는 겸손한 분이세요. 간혹 좋은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라기보다 자신의 음악적 지식을 어필하기 위한 코멘트를 하는 지휘자들을 보는데요, 선생님은 정반대에요.
음악가 외에 더 생각나는 분이 있다면요?
데이비드 스트라우빙거. 제 악기를 만들어 주시는 분이에요. 사실 악기보다도 패드 제작으로 더 유명한데요, 전 세계 플루트의 80~90%에 이분의 패드가 사용되고 있어요. 이분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궁금해요.열정이 대단한 분이에요. 70대 후반의 나이에도 매일같이 플루트 제작에 몰두하며 새벽 2~3시까지 작업하세요. 아직도 너무 재미있다면서. 모든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인다는 점도 존경스러워요. 그 나이에도 자신이 만든 악기에 어떤 문제점은 없는지 계속해서 조언을 구하고 연구하세요. 아쉬운 점을 이야기하면 오히려 더 기뻐하며 작업실로 달려가죠. SNS를 통해서도 많은 사람과 소통하고 있는데요. 팬들이 남긴 댓글에 일일이 답하는 것도 인상적이에요.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 아닐까요. 무슨 질문을 하면 그에 대한 답을 하는 게 맞는 거잖아요. 되도록 다 답변을 달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사람들과 소통하는 가운데 얻는 것도 많을 것 같아요.제가 사는 동네에 있는 분들은 모두 음악 비전공자인데요, 그들의 생각을 듣고 있자면 재미있고 새로워요. 가끔 이상한 질문을 남기는 분들도 있지만요.(웃음)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다면?
SNS상은 아니었고 직접 만나 들었던 이야기였어요. 왜 클래식 음악가들은 무대에서 다 이상한 옷만 입느냐더군요. 유행에 뒤떨어진 드레스나 웨이터처럼 입고 오케스트라에 앉아있느냐고요.
그래서 뭐라고 답해주었나요?
“정말 왜 그럴까?” 이렇게 이야기하다 보면 클래식 음악이 흥행하지 못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해요. 빠르게 변하고 있는 세상 속에서 클래식 음악만 계속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잖아요. 오케스트라 공연은 꼭 서곡으로 시작해서 협주곡, 교향곡으로 이어져야 하나요? 장소나 관객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고, 바뀌어도 괜찮은 거라고 생각해요.
SNS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는데요, 소셜 미디어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는 연결고리. 플루트와 삶에 대한 이야기로 공감과 영감을 주고받는 역할을 하는 곳이죠. ‘나 이만큼 잘났어요’가 아니라 ‘이게 나의 일상이고, 난 이렇게 생각하는데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요?’를 시작으로 대화의 문을 여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