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세계를 물들인 한국인 성악가 3인의 목소리
베이스 박종민의 ‘비상’
베이스 박종민이 푸치니 오페라 ‘라보엠’ 에서 철학자 콜리네 역으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이하 메트)에 정식 데뷔한다. 박종민은 프랑코 제피넬리 연출 버전으로 오는 10월 25일부터 상연되는 메트 ‘라 보엠’에서 8회 공연을 펼칠 예정이다.
박종민의 공연일에 함께 무대에 오르는 아티스트는 지휘 마르코 아르밀리아토, 미미 역 알린 페레스, 무제타 역 올가 쿨친스카, 로돌포 역 매튜 폴랜차니, 마르셀로 역 데이비드 비치치이다. 박종민은 이미 빈 슈타츠오퍼, 영국 로열 오페라에서 콜리네 역할을 전막 규격으로 성공적으로 소화해 호평받은 바 있다. 8월 15일 광복 74주년 기념 음악회를 앞둔 그와 만나 그동안 독일에서의 생활과 뉴욕 메트 데뷔에 대한 소감, 그리고 자신이 그리는 음악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나.
스포츠 팬이어서 어제 밤 있었던 배구 경기를 보다 밤을 새웠다. 워낙 어린 시절부터 운동을 좋아해서 요즘도 축구·농구·등산을 즐긴다. 어제도 등산을 다녀왔다.
스포츠와 음악은 왠지 안 어울릴 것 같은데.
알고 보면 비슷한 점이 많다. 두 분야 모두 경쟁을 즐겨야 하고 그 순간 집중해서 관객 앞에서 최선을 다해 모든 것을 보여주고 들려줘야 한다.
8.15 광복 74주년 기념 음악회에서의 무대를 앞두고 있다. 뜻 깊은 공연이어서 의미도 클 것 같다.
가곡 ‘청산에 살리라’와 주옥같은 오페아 아리아들을 노래한다. 해외 무대에서도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만의 정신, 가치가 표현된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어서 발표되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정서와 동양적인 선율이 조화된 음악이라면 세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음악을 통해 긴장된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도움이 되고 싶다.
이제 곧 뉴욕 메트 오페라에 데뷔한다. 2011년 11월 빈 슈타츠오퍼, 2014년 영국 런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 코벤트가든 데뷔에 이은 기쁜 소식이다. 진심으로 축하한다.
성악을 늦게 시작했다. 어머니가 음악선생님이셔서 늘 음악과 함께 했지만 어린 시절엔 밖에서 친구들과 축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웃음) 음악과 스포츠, 어학을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이루고 싶은 꿈들이 하나씩 생겨났다. 차이콥스키 콩쿠르 무대에 서는 것과 세계적인 오페라 극장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이었다. 모두 이루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정말 기쁘고 감사하다.
그동안 세계적인 오페라 극장과 다양한 무대에서 많은 오페라를 무대에 올렸다. 이런 활동을 통해 음악가로서 가장 크게 얻은 것은 무엇인가.
다양한 국적의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힘이 되었다. 유럽, 미국은 물론 멕시코·칠레·일본 등 각 나라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생활 속에서 알게 되어 음악을 해석하고 표현하는데 무척 도움이 되었다. 언어만으로는 전달될 수 없는 섬세한 뉘앙스의 표현들은 그들의 가치관과 생각을 알지 않고는 이해되기 싶지 않다. 우리가 생각하는 슬픔과는 다른 그 나라만의 슬픔과 기쁨, 행복이 존재하는 것은 삶의 방식과 가치관,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다. 노래하면서 때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감정들을 서서히 이해하기 시작한 건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였다.
특히 빈 국립 오페라극장은 클래식 음악이 위기라고 하는 이 시대에 전 세계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마법 같은 곳이다.
음악 활동을 하면서 그것이 단순히 오래된 전통과 유명세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청중이 무엇을 원하는지 언제나 고민하고 연구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프로그램 구성도 각 계층의 연령대와 선호하는 레퍼토리에 따라 다양하며 티켓 가격도 우리나라 보다 싸고 공연을 보면 얻게 되는 다양한 혜택도 마련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의 오페라 시장도 좀더 열린 시각이 필요할 것 같다. 일반 대중들에게 오페라가 무엇인지 알게 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좋은 기획, 좋은 음악으로 청중에게 다가간다면 그들은 또 다시 오페라 극장을 찾을 것이다.
2011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수상 이후 세계적인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무대 경험들을 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콩쿠르 수상 이후에 오는 슬럼프 때문에 힘들어 하는 연주자들도 있는 듯하다.
다행히 나에게는 그런 슬럼프는 없었다. 콩쿠르를 준비할 때도 1등을 목표로 하지는 않았다. 누구나 음악도들에게는 자신이 잘 하는 곡이 있고, 또 새롭게 도전해야 할 곡도 있다. 콩쿠르를 준비할 때 이 곡들을 함께 준비하면서 다양한 레퍼토리를 쌓는 시간으로 만들어 간다면 의미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다양한 경험은 먼 훗날 무대에서 멋진 색깔을 만들어 내는 토양이 되는 것 같다. 결국 자신만의 음성을 찾아야 한다. 마음을 움직이는 노래가 나오기 까지는 깊이가 익어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한국 음악계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공부한 선·후배들의 활약으로 더욱 활기를 띠고 있다. 그 어떤 세대에서도 없었던 세계적인 수준의 연주자들이다. 한국 음악계의 현재와 미래가 매우 밝게 느껴지는데.
함께 공부한 친구들 중 좋은 음악 동료들이 무척 많다. 세계적인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어 자랑스럽다. 앞으로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협업 무대들이 더 많아져서 다양한 음악 무대가 청중에게 선보여졌으면 좋겠다. 사회와 국가적인 차원의 문화 예술 교류 프로그램들이 많이 기획되고 지속적으로 지원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베이스의 경우 오페라에서 맡는 역할이 지적이고 근엄한 캐릭터가 많다. 젊은 나이인데 캐릭터의 성격이 이해 안되는 경우도 있을 듯한데.
베이스는 왕·군인·아버지·심판자·중재자 또는 작가나 철학가처럼 극의 중심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이상적인 역할이 많다. 젊은 나이라서 그런지 가끔 캐릭터 성격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있다.(웃음)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이해될 때가 올 거라 생각한다. 가곡 속 사랑과 이별, 상실과 슬픔, 희망을 주제로 한 음악들은 마음에 더 잘 와 닿는 경우가 많다. 오페라와는 또 다른 감동이 있고 마음 깊이 이해되는 감정이라 앞으로 더 많은 무대에서 청중과 만나고 싶다.
평소 어디에서 음악적인 영감을 받나?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에서 받는다. 유럽에 있을 때 도나우 강을 바라보면서 슈베르트와 슈만의 마음을 헤아려 보기도 하고 음악의 흐름을 조용히 읖조려 보기도 했다. 시도 많이 읽으려고 한다. 시는 함축적인 언어이기 때문에 노래의 가사를 이해하고 다각도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음악은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음악은 인류가 만든 가장 우수한 창작품이다. 그 안에 담긴 웃음과 눈물을 자연스럽게 느끼고 공감했으면 좋겠다.
지금 어디까지 와 있다고 느끼는가. 가야할 길에 대한 확신이 있나.
출발선에서 이제 10미터, 20미터도 가지 않았다. 지금부터 시작인 것 같다. 앞으로 더 많이 레퍼토리를 늘리고 열심히 무대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다. 무엇보다 ‘노(No)’를 해야 할 때 할 수 있는 음악가이고 싶다. 그것은 스스로 나의 상태, 내가 가야할 길이 어디인지 알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10월 뉴욕 메트 오페라 무대에서의 공연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글 국지연 기자
테너 김건우의 ‘확신’
‘인생은 넓은 의미의 예술이고 각자의 삶은 자신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예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같은 돌을 준다 해도 누군가는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이를 위대한 조각품으로 만들어 낸다. 돌을 다루는 사람의 능력에 달린 것이다. 이처럼 삶을 잘 이해하는 사람은 예술가가 되고, 그의 삶은 작품이 된다. 주어진 인생을 그냥 흘려보낼 것인가, 세상의 기준에 맞추어 그 물결을 급급히 좇아갈 것인가, 아니면 자기만의 삶을 창조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테너 김건우의 시선은 마지막을 향해 있다. 대단한 확신과 함께.
지난 7월, 런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는 앞으로의 오페라 무대를 이끌어갈 새로운 얼굴에 기뻐하며 기립박수를 보냈다. ‘연대의 아가씨’ 주역 토니오로 오른 김건우를 향한 것이었다.
“들인 시간과 노력에 비해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모든 것을 분출해야 하다 보니 간혹 연주 이후에 오는 허탈감이 클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죠. 감사함만 가득하더군요. 유명 스타 캐스팅도 아닌 무대를 찾아 객석을 가득 채운 런던의 청중들, 그들이 마음을 열고 보내는 환호와 기립박수가 짜릿했습니다.”
김건우는 2015년 몬트리올 콩쿠르 1등을 시작으로 이듬해 서울국제음악콩쿠르 2등, 맨해튼 콩쿠르 성악 부문 대상, 그리고 오페랄리아 콩쿠르 1등 및 청중상을 받았다. 굵직한 성과 이후 여러 가지 제안도 많았으나 그는 고심 끝에 로열 오페라 하우스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을 선택했다. 서른 하나, 다소 늦은 나이라 볼 수도 있었지만 그의 생각은 확고했다. 첫 시즌 3개의 프로덕션이 동시에 진행되는 과도한 스케줄에 백스테이지에서 쓰러지는 일도 있었지만, 그의 열정과 노력에는 변함이 없었다. 실력과 노력, 이 두 가지가 그를 ‘연대의 아가씨’로 이끈 것이 아니었을까.
“솔직히 마지막으로 ‘연대의 아가씨’를 하지 않았다면 제 선택에 대해 절반 정도는 후회했을 것 같아요. 조역·단역만 하며 쉴 틈 없는 시간을 보냈으니까요.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 참가자 중 수료 이전에 메인 무대의 주역을 따낸 것은 제가 처음이라 하니, 새로운 길을 만든 것 같아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는 처음 노래를 시작했던 때보다 음악을 더 사랑하게 된 순간을 기억한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하게 되었고, 다른 악기보다도 노래에 더 마음이 끌렸다. 그리고 파바로티 무대와 ‘7인의 음악인들’(고성현·김남두·김영욱·백혜선·장중진·정명훈·조영창이 함께한 앙상블) 공연은 그에게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오며 음악에 대한 확신을 주었다.
“성격이 모험적이지도 않고, 타고난 것도 아니다 보니 큰 콩쿠르나 무대에서 좋은 결과를 가지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던 것 같습니다. 무언가에 도전하기 전에 그것을 다 파악해야 하거든요. 물론 완벽한 준비는 있을 수 없지만, 어떤 상황에도 대비할 수 있도록 내가 가진 것들을 몇 번이고 수정하죠. 그러다 보니 시간은 오래 걸렸을지 모르지만, 굉장히 탄탄하게 다져졌습니다.”
그의 매일에는 나아감이 있다. 주어진 것에만 머무는 것도, 또 주어지지 않은 것을 탓하지도 않는다. 그저 인생의 순간들을 모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소리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은 2010년 중앙콩쿠르를 통해서였습니다. 첫 콩쿠르였고 3등을 했죠. 그전까지 내 소리의 콤플렉스라 여겨졌던 것이 오히려 강점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항상 ‘왜 내 소리는 보통의 성악가 같지 않을까’를 많이 고민했거든요. 뮤지컬 같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 그런데 여기서 알게 되었죠. 내 목소리의 톤과 색깔이 그동안 들어보지 못했던 소리였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의 목소리, 자연스러운 소리와 발성에 확신을 가진 그는 세계무대로 비상했다. “나는 이런 무대를 본 적이 없다.” 오페랄리아 콩쿠르 직후 도밍고가 그에게 건넨 말이다. 가온 도를 중심으로 아래로는 E, 위로는 한 옥타브 위의 F#까지 소화하는 김건우는 밝고 경쾌한 소리의 리릭 레제로 테너다. 화려한 기교를 요구하는 벨칸토 오페라를 주 레퍼토리로 하지만, 베르디의 작품 또한 소화한다.
“다양한 무기가 필요했어요. 진한 빛깔의 소리가 큰 극장에서는 강한 전달력을 가졌지만, 작은 공간에서는 오히려 튕겨나가 버렸거든요. 그 사이의 밸런스를 고민했고, 지금은 다양한 무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테너 우베 하일만은 가수로 올라가야 할 계단의 높이에 비해 전성기는 너무 빨리 지나간다 했고, 테너 이용훈은 무명의 신인보다는 스타를 세워 흥행을 보장받으려는 극장의 추세를 안타까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노래하는 이유, 김건우는 그 의미를 ‘나눔’에서 찾았다.
“제 슬로건 중 하나가 ‘배워서 남 주자’예요. 만약 제가 전 세계 그 누구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외모를 갖추었다면 ‘세계 1등’이 되겠다고 말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한 많은 무대에 오르고, 사람들과 만나며 한 다양한 경험을 후배들에게 전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게 제 사명 같아요. 더불어 유럽과 아시아의 오페라 시스템이 가진 간극을 줄여나가는 역할도 하고 싶습니다. 한국의 좋은 성악가들이 더 많은 무대에 오르고, 관객 또한 더욱 좋은 무대를 볼 수 있도록 판을 키우는 거죠.”
얼마 전, 롯데콘서트홀에 김건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피아노 선율 위로 흐르는 강렬한 음색에는 음악을 향한 그의 확신이 담겨있었다. 그는 이제 또 다른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 오는 11월, 이탈리아 베르가모에서 열리는 도니체티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새로운 프로덕션의 ‘니시다의 천사’를 세계 초연하고, 이후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여러 무대를 선보일 예정이다. 김건우의 순간이 쌓여 다음을 이끌어갈 힘으로 피어날 그때가 기다려진다.
글 이미라 기자 사진 황필주(studio 79)
바리톤 김기훈의 ‘여유’
음역대가 가장 중요하겠지만, 베이스·바리톤·테너를 나누는 또 하나의 중요한 기준은 목소리 자체의 색깔이다. 확실한 저음 영역을 맡는 베이스와는 달리 바리톤과 테너를 나눌 때는 특히 색깔이 큰 역할을 한다. 노래할 때 테너의 선이 나오느냐가 중요한데, 멜로디적인 선이라기보다 버거워 보이지 않는다는 뜻. 바리톤이 테너 곡을 부르면 마치 남의 노래를 하는 것처럼 버겁다. 대신 테너가 바리톤 노래를 할 때는 약간의 밋밋한 느낌이 있다.
지난 7월 플라시도 도밍고가 주최하는 오페랄리아 성악 콩쿠르에서는 테너 키로 노래한 바리톤이 2위와 청중상까지 받았다. 버거웠냐고 물었더니 그렇단다. 해프닝의 주인공은 한국인 바리톤 김기훈. 젊은 성악가로서 해외 무대에서의 활동을 시작한 김기훈은 2016년 독일 하노버 슈타츠오퍼에서 활동을 시작했으며, 오페라 ‘라보엠’ ‘리골레토’ 등에 출연했다. 극장 솔리스트로서는 2018/2019 시즌을 마지막으로 2019/2020 시즌부터는 프리랜서로의 활동을 앞두고 있다. 앞서 지난 6월에는 제16회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남자성악 2위를 차지하며 본격적인 세계 활동의 신호를 알렸다. 끔찍했을 법한 기억이지만 오페랄리아에서의 경험을 묻자, 그는 특유의 반달 웃음을 지으며 생생한 후기를 들려줬다.
“오페랄리아에서는 오페라 아리아와 스페인 전통 오페레타를 뜻하는 사르수엘라(zarzuela), 두 부문의 경연을 치른다. 세미파이널에서 사르수엘라를 부를 때였다. 반주자는 오페랄리아에서 약 15년간 반주해온 사람이었는데, 바리톤 키가 아닌 테너 키를 연주한 거다. 콩쿠르 역사 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더라. 첫 세 박 동안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다. 돌아서야 하나 끊어야 하나 심사위원들에게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그러나 전 세계로 라이브 스트리밍되고 있었고, 오디션도 아닌 경연이었다. 이미 노래는 시작했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불렀는데, 정말 힘들었다. 2절로 갈수록 데미지가 계속 쌓여 결국 고음 부분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어떻게든 노래를 끝내고서 반주자를 돌아보자 그때까지도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내 말을 듣고 나서야 화들짝 놀라며 연거푸 사과했다. 도밍고가 걸어 나오며 내 차례 다음 사람의 노래 이후에 한 번만 더 불러줄 수 있겠냐고 하더라. 목도 멘탈도 모두 나간 상태라 그러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한 콩쿠르에서 같은 곡을 2번 노래했다. 그러나 관객들은 환호했다. 바리톤이 테너 키를 소화하니까 신기해하면서 손뼉을 치고 웃더라. 그 덕에 청중상까지 받았나 보다.(웃음)”
올해 참여한 콩쿠르에서 연이은 2위를 기록했지만, 현지 반응은 오히려 ‘기훈 킴’에게 뜨거웠다. 특히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는 마린스키 극장 소속 가수들이 결과 발표 이후 심사위원들에게 찾아가 항의를 할 정도였다고. 그랬던 그도 언어에서 오는 어려움은 피할 수 없었다.
“1·2차 때는 러시아 가곡, 3차 때는 아리아가 과제로 주어졌는데, 모두 차이콥스키가 작곡한 곡들이었다. 이전에는 한 번도 러시아어를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발음을 따라 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파이널 전에는 감기에 걸려 목소리가 안 나오기도 했지만, 무대를 얼마 앞두지 않고서 마법같이 소리가 나왔다. 경연이 끝나고서 모든 무대를 포함해 그렇게 큰 박수갈채를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그때의 환희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빛날 미래를 꿈꾸다
세계 유수 콩쿠르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김기훈이지만, 시작은 소박했다. 전남 곡성에 위치한 작은 교회의 성가대 단원이었던 그는 신성모 교수와 함께하는 성가대 세미나에서 본인의 재능을 발견했다.
“세미나에서 교수님께서 노래를 불러보라고 하셨다. 처음에는 익숙한 대중가요 톤으로 노래했는데, 한 번 더 해보라고 하셔서 성악 톤으로 불렀다. 어디서 배웠던 게 아니라 KBS1 ‘열린음악회’ 같은 프로그램을 보고서 혼자서 성악 톤을 따라 할 수 있었다. 함께 그룹사운드를 하던 친구들 앞에서 장난스레 ‘타임 투 세이 굿바이’와 같은 곡을 부르곤 할 때면 모두 놀라는 반응이긴 했지만, 내게는 특기라기보다 개인기였다. 노래를 들은 교수님께선 성악을 배운 적이 없다는 말을 듣고서 매우 놀라셨다. 이후 목사님과 부모님에게 나를 꼭 성악을 시키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부모님께서는 음악을 업으로 삼는 것을 절대 반대하셨다.”
김기훈은 부모님과 담판을 지어야 했다. 테스트를 받으러 가서 “노래 좀 한다” 정도의 반응이라면 당장 그만두겠다고 했다. 대신 극찬을 받거나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다면 성악을 공부하게 해달라고 했다.
“자신감이 있었던 게 아니다.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 성악이라고 생각했고, 잘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 절박했다. 그래서 확신이 필요했다. 노래 어느 정도 하는 어중이떠중이가 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레슨실을 운영하고 계시던 김치곤 선생님께 테스트를 받으러 갔고, 결과는 극찬이었다. 처음엔 기쁜 마음보다 의심이 크기도 했지만, 음악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일단 믿고 다녀보자는 것이 성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
그때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약 1년간의 레슨 끝에 김기훈은 연세대 음대를 입학했고, 김관동 교수를 사사하며 수석 졸업했다. 2016년부터는 독일 하노버 슈타츠오퍼에서 솔리스트로 활동했고, 독일 하노버 음대 석사를 만장일치 만점으로 졸업했다.
“연세대와 하노버 슈타츠오퍼 간 협력 프로그램이 있었다. 한 달간 극장에서 연수를 받은 뒤, 마지막 콘서트를 하고서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1명을 뽑아 1년 동안 일을 시키는 프로그램이었다. 1년간 무급이었는데, 그동안 콩쿠르로 받았던 상금으로 버텼다. 1년 이후 극장으로부터 제안을 받아 솔리스트로 승격했다.”
극장 전속가수로 활동한 것이 도움이 되냐는 질문에 그는 무대 경험을 쌓았다는 점에서 안됐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사실 그곳에서 맡았던 역할은 모두 조연이었다고 털어놨다. 과연 어떤 사람들이 주역 무대에 서는지가 궁금했다.
“좋은 계약을 갖고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스타성이 있는 사람이나 유명 가수는 게스트로 오는 경우가 많고, 주로 경력이 많거나 기획사가 좋은 경우 주역으로 무대에 선다. 나 역시 이번 콩쿠르들의 입상 이후 여러 기획사와 관계자로부터 오퍼를 받았다. 해외 활동은 클래식 매니지먼트 ‘아스코나스 홀트(Askonas Holt)’와 함께 하게 됐다.”
이제부터 김기훈은 세계무대에 주역으로 활발하게 오른다. 오는 10월부터 내년 1월까지 독일 러스톡 극장에서 ‘라 트라비아타’를, 내년 3월부터 7월까지 영국 글라인드본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카르멜회 수녀들의 대화’ ‘사랑의 묘약’에 출연한다. 2021년에는 워싱턴 케네디 센터 오페라하우스에서 ‘라 보엠’의 마르첼로 역으로 분한다. 그의 목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는 메트로폴리탄이나 빈 슈타츠오퍼와 같이 세계적인 극장을 주 무대로 하는 성악가가 되고 싶다. 이를 위해선 설득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내가 노래를 했을 때 충분한 공감대를 끌어낼 수 있어야 하며, 저 사람의 노래에는 무언가가 있다고 관객들이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 소프라노 하면 조수미 선생님을 떠올리듯, 바리톤 하면 김기훈이 생각나게 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하노버 슈타츠오퍼에서 ‘쫓겨난’ 이야기를 하면서까지 그는 웃고 있었다. 참으로 낙천적인 사람이다.
“나온 것이 아니라 잘렸다. 극장장이 바뀌면 그곳에 있던 솔리스트들은 자동으로 물갈이가 된다. 극장장이 자기 사단을 데려오거나, 자신이 뽑으려고 했던 사람을 앉히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해 몇십 명이 동시에 나가게 됐다. 살벌하지 않나. 그렇지만 흔히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때 당시에는 걱정이 앞섰다. 꾸준히 돈을 받으면서 유학하고 있었는데, 직업이 없어진다고 하니 불안하더라. 그런데 이번 콩쿠르를 겪으면서 자유의 몸이 된 게 오히려 잘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글 권하영 기자 사진 황필주(studio 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