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클래식 음악이 스며든 제천에서 보낸 영화 같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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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9월 2일 11:08 오전

SPECIAL REVIEW

 

지역예술제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풍경이 있다. 방문객을 환영하는 펄럭이는 현수막과 곳곳에 설치된 이벤트 부스들, 저마다 다른 티켓을 들고 상영시간표를 확인하느라 분주한 모습들. 식당이나 길거리에서 모르는 얼굴을 마주해도 같은 브로슈어를 들고 있다면 어쩐지 반가운 마음이 드는 그런 순간들 말이다.

지난 8∼13일에 열린 제15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 다녀왔다. 많은 관객이 모이는 토요일, 서울의 새벽안개를 뚫고 일찌감치 도착해 꽉 찬 하루를 보냈다. 더없이 낭만적이었던 순간을 지면으로 전한다.

 

10:00 작곡가 하차투리안의 내면을 들여다보다

제천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줄을 길게 서야만 먹을 수 있다는 달인의 찹쌀떡 한 상자를 가뿐히 사들고는 곧장 극장으로 향했다. 작곡가 아람 하차투리안이 발레음악 ‘가야네’를 작곡하는 과정을 극화한 ‘하챠투리안의 칼춤’(감독 유수프 라지코프)을 보기로 마음먹은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영화는 하차투리안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 줌 렌즈를 당긴다. 전쟁, 그리고 혁명의 폭력과 무질서가 개개인의 일상을 헤집던 1940년대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차투리안이 느끼던 양면적인 감정을 음울하고 차가운 풍경 아래 묵직하게 그려낸다. 창작에 대한 열망과 예술적 영감에 대한 간절함, 그리고 국가 검열과 통제가 주는 좌절감을 동시에 경험할 수밖에 없던 하차투리안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섬세하게 묘사된다. 당대의 풍경을 재현하는 회색빛 화면, 뿌옇게 먼지 낀 듯 답답한 현실이 냉정하게 펼쳐지는 한편, 그 속에서 여린 내면을 꽁꽁 감춘 채 뜨겁게 울부짖는 하차투리안의 모습이 예술적인 장면들을 빚어낸다. 마지막 순간에 연주되는 ‘가야네’ 중 ‘칼의 춤’ 장면까지 영화는 숨 쉴 틈 없이 관객의 몰입을 이끈다.

하차투리안과 동료애를 나누던 쇼스타코비치, 오이스트라흐가 어느 눈 쌓인 길 한복판에서 함께 민속 음악을 연주하는 장면, 하차투리안이 고요한 밤중 꿈을 꾸듯 상상 속에서 불러내는 장면들은 음악가 하차투리안을, 또 인간 하차투리안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음악에 담긴 의도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 당하던 시대, 그에 비해 찬란하기만 한 음악들. 현대의 우리가 보고 듣는 아름다움의 새로운 얼굴을 이 영화를 통해 발견할 수 있었다.

 

16:00 지휘자 안토니아 브리코의 뜨거웠던 순간을 만나다

‘더 컨덕터’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을 피해 20분을 달려 의림지에 들렀다. 더운 공기 틈으로 얼굴을 내미는 반가운 바람을 맞으며 저수지를 둘러싼 산책로를 걸었다. 근처 오래된 놀이공원의 낡은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대중가요의 선율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영화의 여운과 한데 뒤섞였다.

오후에 만난 영화 ‘더 컨덕터’(감독 마리아 피터스)는 ‘하챠투리안의 칼춤’처럼 실존인물의 삶을 소재로 하지만, 그 표현 방식은 완전히 달랐다. ‘하챠투리안의 칼춤’이 ‘음악’ 이야기였다면 ‘더 컨덕터’는 음악 ‘이야기’랄까. 1938년, 여성 최초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던 네덜란드 출신의 안토니아 브리코의 일대기가 영화의 어법을 따라 흥미롭게 펼쳐졌다.

네덜란드 이민자 출신으로 양부모에게 그리 많은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자란 가난한 윌리(브리코의 어린 시절 이름). 그가 보수적인 유럽의 사교계와 음악학교, 연주회장을 거쳐 편견을 극복하고 데뷔 무대를 치르기까지의 스토리에 대해 말한다면 사실 많은 이가 기시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빌렘 멩겔베르크·카를 무크 등 실존 인물들과의 인연과 같은, 사실을 기반으로 한 소소하지만 재미있는 장면들, 극적으로 펼쳐지는 클래식 음악 작품들, 그리고 무엇보다 경쾌함을 잃지 않는 연출이 뻔하지 않은 감흥을 선사했다.

그러나 역시나 현시대까지 여성 지휘자들의 한계가 계속되고 있다는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엔딩은 다소 식상했다. 여성 연주자들로만 구성된 악단의 탄생을 그린 클라이맥스의 감동이 오히려 여운을 갖지 못하고 사그라져 버렸다. 영화의 의미를 굳이 영화가 직접 말해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20:00 청풍호반의 낭만적인 밤

‘하챠투리안의 칼춤’

달이 떠오르자 불을 밝히고 있던 청풍호 무대 위 조명이 꺼졌다. 1927년의 무성영화 ‘이기주의자’(감독 미콜라 쉬피코프스키)의 상영과 폴란드 연주자 마르친 푸칼룩의 라이브 연주를 위해서다. 낮 동안 곳곳에 흩어져 음악과 이야기, 그리고 제천의 풍광을 즐기던 사람들이 호숫가로 모여들었다. 아이들과 그들 주변의 모기를 쫓는 어른들, 젊은 연인부터 또래 무리 등 다양한 연령층의 관객이 한데 어우러지는 모습은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의 장점으로 꼽을 만하다. 무성영화로부터 많은 음악적 영감을 받는다고 밝힌 푸칼룩은 권력에 눈이 먼 우스꽝스러운 인물 아폴로 쉬미구예브를 풍자하는 코미디 영상에 신비롭고도 경쾌한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덧입혀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는 한국 관객들에게 그리 친숙하지 않던 음악영화라는 장르에 집중하고, 휴양영화제의 콘셉트를 유지하며 성공적인 지역예술제의 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15년의 세월을 가늠하게 하는 노련한 운영 방식으로 올해에도 37개국 127편의 영화 상영과 한국영화 100주년을 기념하는 상영회, 국내외 음악영화 발전을 위한 포럼 및 아카데미를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선보였다. 언제든 믿고 떠날 수 있는 예술적인 여름휴가지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 반갑다.

글 김호경(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제천국제음악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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