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러미 프로젝트’ & ‘산책하는 침략자’

인간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외계인도 아는데

우수 컨텐츠 잡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10월 2일 9:00 오전

REVIEW

 

잠시 공포영화 이야기를 해야겠다. 공포영화에서 공포를 일으키는 대상에 대해서, 그 존재는 당시 대중의 무의식과 욕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불안과 불온의 결정체라는 해석이 있다. 과거 냉전시대 가장 무서운 존재가 외부에서 공격해오던 죠스였던 것처럼. 그런데 1980년대 이후 그 양상이 달라졌다. 영화 ‘에어리언’이나 ‘터미네이터’가 특별했던 것은 공포의 대상이 인간 바깥이 아닌 내부, 혹은 미래에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생명과 생존을 위협하는 공포가 이제는 인간 자체라는 인식의 변화를 보여주었고, 현재는 수많은 좀비물로 구체화되면서 인간이 가장 무섭고 가장 두려운 존재라는 합의에 이르렀다. 여름도 지나간 시점에 공포영화 이야기를 한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느끼는 공포가 더 확대되고 있음을, 그럼에도 그것을 극복하는 것 역시 인간임을 보여주는 두 편의 연극을 말하고 싶어서다. 공격과 침략이라는 가학적 단어를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절대 원하지 않는다는 지향을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여성연출가 작품인데, 중견으로 접어든 남인우 연출과 신예를 훌쩍 넘어선 이기쁨 연출이 보여준 공격과 침략에 대응하는 연극적 방법도 흥미로운 관람 포인트였다. 덧붙여, 두 작품의 번역자인 마정화와 이홍이는 각각 영어권 작품의 번역과 일본 작품 번역의 전문가다. 흔히 말해 어벤저스급이다. 좋은 번역, 성실한 번역이 작품 완성도의 첫걸음이자 핵심임을 두 작품이 보여주었다. 번역자도 번역극의 중요한 창작자임을 간과해서는 절대 안 될 일이다.

 

‘래러미 프로젝트’ ©최용석

‘래러미 프로젝트’

당신은 안 그렇다고 말할 수 있나요?

1998년 미국 와이오밍의 래러미에서 발생한 동성애자 증오범죄를 추적한 작품 ‘래러미 프로젝트’는 프로그램북에 밝혔듯, 2년에 걸쳐 8명의 배우들이 주민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편집하여 워크숍을 통해 완성한 작품이다. 피해자 매튜 셰펴드가 동성애자였고, 그것을 인지한 피의자들이 혐오를 전제한 폭력으로 피해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 살인 사건은 미국 전역에 충격을 주었고, 작가이자 연출가 모이세스 코프먼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 듯이 이 사건에 집중했다고 한다.

이러한 접근 방법 덕분에 작품은 시종일관 래러미가 특별한 곳이 아님을, 이런 혐오와 증오범죄가 래러미라는 공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것은 남인우 연출의 공간 활용과 연출 콘셉트에서도 드러난다. 선돌극장의 작은 무대 위에 의자들이 중앙을 향해 빼곡하게 놓여 있고, 관객은 객석이 아닌 무대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이 지점에서 객석을 모두 버린 기획자와 연출가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의자들이 중앙을 향했다고 해도 그 공간은 서로 비켜갈 정도의 여유뿐, 거의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몇 가지 소품이 놓인 의자는 배우들의 것이었고,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 의자가 관객의 것이었다.

무대와 객석을 구분하지 않고, 무대 자체를 없애버린 콘셉트는 인터뷰 내용의 보고 형식이라는 희곡의 특징을 최적화한 선택이었다. 인물들끼리 충돌하거나 심한 갈등 때문에 그들의 공간이 필요한 작품이 아니라는 점, 거기에 누구나 물어볼 수 있고, 지역의 누구든 대답을 할 수 있는 형식이기 때문에 그들이 지닌 개별성과 보편성이 관객과 섞여 앉은 배우들의 동선으로 선명하게 드러났다. 특히 배우들이 의자에 앉아 대사를 할 때 어쩔 수 없이 배우 주변의 관객이 시야에 들어올 수밖에 없는 배치는 상당히 놀라운 효과를 만들어 냈다. “저 말을 하고 있는 사람(배우) 옆에 있는 당신, 당신은 래러미 사람들과 다른가요? 당신은 안 그랬을 것 같나요? 당신은 그렇지 않다고, 예외라고 생각하시나요?” 작가나 연출가가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묻고 싶은 말을 관객 스스로 다른 관객에게, 그리고 다시 자기 자신에게 묻고 있었던 것이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벌어진 살인사건은 인간이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공포라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고, 그것을 건조하게, 다양한 사람의 입장을 묶어서 무대화한 연극 ‘래러미 프로젝트’는 이해와 배려가 배제된 증오와 혐오 속에서는 당신도 피해자가 될 수도,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환기시켜준 작품이었다.

 

‘산책하는 침략자’ ©옥상훈

‘산책하는 침략자’

당신은 이것을 잃고도 살 수 있나요?

2019년 ‘아르코 파트너’로 공연된 ‘산책하는 침략자’는 외계인과 인간의 이야기다. 연극에서 외계인이라니, 그것도 지구를 침략하려는 외계인. 정말 말 그대로 외계인 같은 설정인데, 흥미로운 것은 이 외계인이 인간에게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외계인과 인간의 이야기이지만 결국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작품의 출발인 외계인이 개념을 채집한다(가져간다)는 설정은 참으로 놀라운 설정이다. 인간의 고유성은 사고를 한다는 점이고, 그 사고의 특성은 인지의 단계를 넘어서 개념화되었을 때 발생된다. 따라서 개념을 잃은 인간은 혼란을 겪게 되고 사고회로가 틀어지며 결국은 정체성이 모호해지게 되는 것이다. 외계인을 통해 인간이 무엇인가, 인간의 사고가 갖는 고유성은 무엇인가를 물어보는 이 작품의 질문은 점점 더 나아가 인간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로 향한다.

남편 신지와 별거 상태였지만 무엇인가 달라진 남편을 보살피고 보호하면서 나루미는 사랑하는 감정이 변하지 않았음을, 비록 그가 외계인이라고 할지라도 자신 옆에 남아있기를 바라는 묘한 감정을 갖는다. 필요한 개념들을 채집했으나 사랑이라는 개념을 채집하지 못한 신지에게 나루미는 자신이 주겠다고, 죽어버릴 남편을 바라보는 아픔보다 자신의 사랑을 외계인에게 건네주는 것이 덜 아플 것이라는 판단에 사랑이라는 개념을 외계인에게 준다. 사랑을 잃기 전 나루미는 무서워했고, 사랑을 채집하기 전 외계인은 주저했다. 구체적으로는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인간을 지탱하는 중요한 것임은 인간도 외계인도 직감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기쁨 연출은 다양한 공간을 오가야 하는 작품의 특성을 고려하여 무대 동선으로 야트막한 단으로 구획을 지어 활용했다. 이 단들이 중요 공간이 되기도 하고, 경계의 선이 되기도 하며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장면 전환마다 영상으로 공간의 정보를 제공했는데, 자막도 다양한 방식으로 처리하는 섬세함을 보여주었다. 외계인이 등장하는 만큼 음악도 단조로우면서도 반복되는 리듬을 활용하여 우주적인 혹은 외계인 같은 분위기로 설득되었다. 극단 활동이 축적되면서 배우들의 합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도 작품의 완성도에 큰 몫을 했다. 어떤 작품이든, 장르가 무엇이든 재미와 감동, 목표와 목적을 유효적절하게 버무려낼 줄 아는 이기쁨 연출과 창작집단 LAS가 성큼성큼 성장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산책하는 침략자’의 공감력 없는 외계인은 인간이 어찌 되든 분명 지구를 침략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나루미에 의해 사랑, 즉 인간의 모든 것을 알아버렸다. 드디어 외계인도 알게 된 것이다, 인간에게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필요한지. 인간이 되어버린 외계인은, 그렇기 때문에 지구를 침략하지 못할 것이라는 기대가 생겼다. 지구는 안전해졌다. 그렇다. 지구가 안전하기 위해서는 외계인도 인간으로 만들어버리는 그것, 인간의 모든 것, 사랑이 필요하다. 이때의 사랑은 이해와 배려가 전제되었음은 당연하다. 외계인도 아는 것을 인간은 왜 모를까? 알고는 있는데 실천을 하지 않는 것인가? 모르겠다. 가장 무서운 존재도 인간이고, 가장 힘나는 존재도 인간이고, 가장 모르겠는 존재도 인간이다.

배선애(연극평론가) 사진 플랜큐·한국문화예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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