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한편의 소설이 연극으로 재탄생하려면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
순환. 결국은 삶의 순환에 관한 이야기인가.
장강명 작가의 소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든 생각이다. 작품에는 피해자와 가해자, 시간과 공간이 어지럽게 얽혀있다. 끊임없이 인간의 패턴에 대해 말한다. 그 흐릿한 패턴을 따라가며 어렵사리 글을 좇았다. 이 작품을 두고 누구는 기억, 누구는 속죄, 누구는 용서라고 하더라.
그래서인가. 지난해 9월, 이 작품이 연극으로 오른다 했을 때 반가웠다. 마음에 남겨둔 작품 속 남자와 여자가 어떠한 형태로 실체화될까. 그러한 기대감. 그리고 미처 읽어 내지 못한 작품의 빈틈. 그 빈틈을 각색자와 연출가는 어떻게 파고들었을지 실컷 상상해봤다. 연극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좋은 성과를 냈다. 연말에 제55회 동아연극상 작품상,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올해의 연극 베스트3, ‘한국연극’ 공연 베스트7에 이름을 올렸다. 2018년, 소위 ‘연극계 주요 상’을 휩쓸며 작품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오는 10월, 이 연극이 다시금 남산예술센터에 오른다. 공연을 앞두고 원작자 장강명과 원작의 편집자 황예인, 소설을 연극 대본으로 각색한 극작가 정진새, 연극을 연출한 강량원을 만나 소설과 연극의 변용 과정에 관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눴다.
소설, 그 산을 만드는 과정
2018년 9월에 초연한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하 ‘그믐’)은 지난해 화제작이었습니다. 국내 여러 연극상에 이름 올린 작품들이 거의 안 겹쳤는데, ‘그믐’만은 공통으로 호명됐죠. 이 작품 속에 모두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감성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황예인 2015년 8월에 이 책을 만들었고, 그해 말에 극단 동으로부터 연극화하고 싶다는 메일을 받았습니다. 극단 동이 어떤 단체인지 잘 몰랐는데 2016년에 ‘배서니, 집’을 봤어요. 배우들이 신체 쓰는 방식이 독특하더라고요. 출판사에서 일하다 보면 공연화나 영상화에 관한 연락이 자주 와요. 계약을 하기까지도 어렵고, 계약이 돼도 작품이 나오기까지도 더뎌요. 하다가 무산되는 작품도 많고요. 그리고 제가 본 대부분의 작가는 완성된 작품을 보고 많이 실망했죠. 이번 소설은 편집자 입장에서는 계약이 잘 되고, 작품이 잘 나오고, 원작자와 관객 반응이 좋아서 기쁩니다.
정진새 이 작품에 대한 염려가 많았어요. 첫 번째는 원작을 보지 않은 관객이 공연을 이해할 수 있을까. 두 번째는 소설을 읽은 독자가 실망하지 않을까 걱정했죠. 그런데 일반 관객은 물론 평론가까지 두루두루 좋아하는 상황이 신기했어요. 작년에는 붕 뜬 기분이었다면, 이번에는 냉정하게 사태를 살펴볼 예정입니다. 좋다면 뭐가 좋은 건지, 소설로 읽은 분들과 공연으로만 본 분들이 어떻게 다르게 감각하는지요.
장강명 작가는 한 글에서 이상적인 문학편집자는 “(작가와 함께) 같은 산을 바라보면서, 그 산의 정상으로 오르는 길을 함께 찾고 고민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죠. ‘그믐’이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으로 수상돼 단행본 작업할 때 어떠한 ‘산’을 바라보며 ‘오르는 길’을 함께 고민했나요?
장강명 저는 소설을 이런 식으로도 써보고, 저런 식으로도 써보고 그래요. 예를 들어 ‘댓글부대’나 ‘한국이 싫어서’는 쓸 때부터 산의 모양이 뚜렷했죠. 그런데 ‘그믐’은 안개에 싸인 산이었어요. 가끔 ‘그믐’이 기억에 관한 건지 속죄에 관한 건지 질문을 받아요. 작품에서는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이 대비가 됩니다. 비인간적인 것은 도구였던 것 같고, 인간적인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시간보다는 사람의 특성을 보여주고 싶었죠. 글을 다듬으면서 말로는 못하겠지만 감으로 아는 것들이 있는데, 황예인 편집자는 센스 있게 잘 이해해주셨습니다.
황예인 작가상 심사할 때는 이름을 가리고 해요. 당시 장강명 작가가 발표한 작품으로는 ‘표백’과 ‘댓글부대’가 있었어요. 당선작 ‘그믐’이 기존 장강명 작품과 너무 달라 놀랐어요. 우리가 아는 장강명은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고, 한국 사회를 잘 다루고 싶어 하는데, 이렇게 결이 다른 작품을 쓰기도 하는구나 생각했죠. 장강명이 이런 것도 잘 쓰는 작가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만든 책을 다시 보면 부끄러울 때가 있어요. 그런데 이 작품은 장강명 작가가 쓰고 싶던 것, 보편적으로 누구나 고민할 수 있는 것을 놓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이 ‘소설’이 ‘연극’으로 매체가 변한다고 했을 때, 원작자와 편집자가 기대하거나 걱정한 점이 있을 것 같은데요.
장강명 ‘댓글부대’와 ‘그믐’이 비슷한 시기에 연극화 제안이 들어왔어요. 사실 ‘댓글부대’는 쓰면서도 연극과 잘 맞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믐’은 이걸 어떻게 연극으로 만들까 싶었어요.
황예인 기대와 걱정은 똑같았어요. 소설의 어떤 설정이 마음에 들어서 2차 저작권을 문의하는 분들이 있어요. 마음에 드는 부분만 살리고 변형하는 거죠. 사실 ‘그믐’은 시간 조합을 새롭게 나열해도 재밌는 작품일 거예요. 그래서 연극으로 만들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시공간 제약이 많은 게 연극의 특성이잖아요. 원작에서 교차되는 시간을 연극 관객이 어떻게 납득할까 싶었죠. 이게 원작의 가장 큰 형식이지만 버리고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각색, 견고한 산을 옮기는 과정
강량원 연출가는 정진새 작가의 ‘브레인 컨트롤’을 인상 깊게 보고 ‘그믐’의 각색을 의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진새 작가도 SF 장르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요. ‘그믐’ 각색을 제안받았을 때 가장 먼저 든 고민은 무엇이었나요?
정진새 ‘그믐’이 훌륭한 SF 소설이기는 하지만, 한국 사회에 날선 비판도 들어가 있어요. 그러면서도 서정적인 작품이고요. 황예인 편집자가 말한 것처럼 전작과는 다른 느낌이잖아요. 강량원 연출이 ‘그믐’ 각색을 제안했을 때, 왜 하필 ‘그믐’일까 생각했어요. 이 작품이 과연 연극으로 각색될 수 있을까 싶었죠. 한편으로는 강량원 연출에 대한 존경심이 들었어요. 한국 작가를 잘 알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죠. 저 역시 장강명 작가의 팬이어서 소설을 거의 다 읽었거든요. 선형적으로 흘러가는 연극 속에서 과연 층위를 두고 ‘그믐’을 각색할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극단 동이나 강량원 연출은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저에 대한 의심이었어요. 각색 작업은 처음이었거든요. 저는 구조를 잘 짠다기보다는, 상상력으로 현혹시키는 극작가에 가까워요. 강량원 연출이 원래 작업을 길게 하는 편이란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을 버텨내면 좋은 작품이 나오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많은 고민 끝에 각색을 맡게 됐습니다.
연극을 보고 대중은 상반된 피드백을 했어요. 누구는 “소설의 줄거리를 충실이 옮겼다”고 했고, 누구는 “원작과 매우 다른 작품”이라고 하더군요.
정진새 두 말 모두 저에게는 기분이 좋습니다. 소설을 충분히 옮겼다는 것은 원작을 크게 훼손하지 않았다는 칭찬 같고요. 원작과 다르다면 그것도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죠. 작품이 잘 돼서 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사실 ‘원작 장강명’과 ‘각색 정진새’ 사이에서 어떤 부담감이 있었죠.
강량원 저와 정진새 작가는 다 칭찬으로 들었던 것 같네요. 스토리는 정진새 작가가 잘 넣어서 아마 비슷했을 거예요. 저는 무대에서 구조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소설의 몸과 연극의 몸은 다르죠. 저와 극단 배우들은 이 소설의 물성을 어떻게 무대의 물성으로 가져올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장강명 누가 저보고 이 연극이 원작과 같은지 다른지 물어보면 이런 느낌이에요. 흰 물감과 흰 소금이 있는데, 두 개가 흰색이어서 같다고 얘기하는 것처럼 당황스럽죠. 같은 것 같기도 하고, 완전히 다른 감흥도 있고요. 그래서 연극과 소설은 물감과 소금처럼 다르다는 생각입니다.
황예인 저는 원작의 주제를 잡아서 편집했잖아요. 연극 대본을 읽는데 어떤 장면들이 제 기억에 없더라고요. 그래서 책을 다시 찾아봤는데 다 들어가 있었어요. 자기 경험에 따라서 비껴가는 것들이 있잖아요. 연극 때문에 내가 뭘 놓치고, 뭘 기억하고 있는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 것 같아요. 무엇보다 소설로 체험한 시간의 방향이 입체적으로 드러나면서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각색을 하면 소설이 지닌 모호한 부분이 명확해지기도 하고, 더 흐려지기도 하죠. 각색은 반복이기도 하지만 차이이기도 합니다. 특히 연극 무대는 시간의 제약이 있어요. 기존 스토리에서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죠. 연극 ‘그믐’은 원작에서의 무엇이 명확해지고, 무엇이 덜어졌나요?
정진새 처음에는 다 담으려고 한 것 같아요. 결국 원작에서의 선택과 집중은 기능적으로 됐습니다. 연극이 요구하는 조건에 맞춰서 주요 인물 서사에 집중해야 했죠. 강량원 연출과 얘기하는 과정을 통해 여자와 남자, 엄마, 우주알 이야기가 남게 됐어요. 장강명 소설가가 착안한 세계관에는 다 동의했고요. 이전에 장강명 작가의 소설을 다 읽어서인지 작가의 의식에 빙의되더라고요. 미루어 짐작하는 거지만, 이 부분은 이러한 의도로 썼겠구나 싶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이 이 작품에도 있어요. 작품 속 담임 선생님을 통해 중년 남성이 가진 폭력성을 봤죠. 그 폭력성이 남학생들에게 전이되고, 그것 때문에 피해를 입는 여린 사람들이 포착됐어요. 제가 SF나 구조 같은 현란한 설정에 포커스를 두고 있을 때에는 강량원 연출이 폭력과 속죄에 대해 환기해줬죠.
장강명 연극 ‘그믐’을 보면 배우들이 위태로운 무대에서,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떨면서 해요. 작품 끝으로 갈수록 가엽고 안쓰러웠죠. 소설에서는 여자가 기억을 다르게 하고 있던 것이 반전처럼 나오는데, 연극에서는 그게 덜어졌어요. 그런데도 아쉽지가 않더라고요. 그냥 가여운 인간들이 무대에서 연기를 통해 나오니까 좋았던 것 같아요.
문학으로서 소설이 성취한 점이 있을 텐데요. 이것이 공연예술로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요? 장르가 변용되면서 대중과의 소통 전략도 달라질까요?
장강명 연극이나 영화 등 다른 장르는 소설이 이룬 성취를 번역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별개의 다른 성취를 해야 하죠. 이번 연극을 보면서 저는 그런 성취를 저릿하게 느꼈습니다. 흔히 책 많이 읽는 분들 중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영화가 아무리 뛰어나도 원작보다 감흥이 떨어진다는 말이요. 요즘 대중은 책보다는 영화를 많이 보니까, 원작을 읽으라고 애써 좋은 말을 해주시는 것 같은데요. 문학보다 영상예술이 더 훌륭한 예도 많이 있죠. 마치 촉감과 청감을 비교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무대화, 새로운 생명을 품은 산
강량원 연출의 메소드, 즉 극단 동의 분위기가 이 작품과 잘 맞았습니다. 극단 동은 2년간 작품을 발전시키면서 단원들이 함께 소설을 읽는 워크숍을 진행했죠. 각 단원들이 해석한 원작 캐릭터를 어떻게 정리해 무대화했나요?
강량원 캐릭터를 안 만들려고 했어요. 배우들이 자신의 감정과 비슷하게 연기하면서 결과적으로 그 캐릭터가 누군지 잘 모르는, 어떤 인물인지 또렷하지 않은, 그래서 관객이 더 저 사람에게 귀 기울이도록 했어요. 배우들이 철저히 작품을 이해해야지만 할 수 있는 거죠. 배우가 역할을 구현하는 존재를 넘어서, 창작의 주체로 서야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극단의 작업 방식이 그래요. 현재 연극계에 낭독 공연이 많아졌어요. 글자를 그대로 읽으면 더 상상할 수 있잖아요. 문자적인 언어 소통 방식을 무대에서 직접 활용하는 낭독 공연이 많아진 것처럼, 배우들이 원작에 서술된 느낌대로 했다고 생각합니다.
정진새 원작을 너무 오래 읽어서 나중에는 배우들이 좀 지쳐 보였어요. 그래서 테이블 작업할 때는 오히려 작품의 거리를 두는 쪽으로 했던 것 같아요. 주인공이 고등학생이었을 1990년대에 배우분들은 뭐하고 계셨는지, 그런 이야기들도 나눴고요. 테이블 작업이 끝나고 배우들이 직접 몸을 움직일 때는 활기차게 즐기셨던 것 같습니다.
원작자와 편집자는 기존에 상상했던 작품 속 인물들이 무대 위에 구체화되면서 느끼는 이질감이 있을 것 같아요.
황예인 저는 외모나 옷차림 등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편은 아니고, 목소리나 분위기를 그려요. 강량원 연출이 말한 것처럼 원작 인물들이 다른 인물로 느껴지진 않았어요. 한 덩어리처럼 보이는 느낌이었죠.
장강명 소설의 끝에는 결국 인간이 패턴이 아니라는 걸 보여줘요. 관념적이죠. 인물이 선명하지 않고 흐릿해요. 연극에서도 흐릿한 사람이 나와서 조용히 말하더군요. 그런데도 존재감이 엄청난 거예요. 사람이 몸을 움직이면서 말을 하니까요. 소설 속 인물이 연극에서는 존재감이 뚜렷해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황예인 소설의 인물에게는 슬픔 감정을 느꼈는데, 연극에서는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소설에서도 패턴이라는 말이 나오죠. 패턴에 사로잡혀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들을 연극에서는 더 표현하고 있다는 느낌이었어요. 대사를 하고 몸을 쓰면서 무대를 도는데, 내용보다는 그 감각 자체로 괴롭고 안쓰러웠습니다. 좋은 이질감이었죠. 소설을 읽을 때보다 더 센 강도를 느꼈어요.
배우들이 마치 무대와도 싸우고 있는 것 같아서 더 처연한 마음이었습니다. 배우들은 둥글고 경사진 무대를 계속 돌아요. 이러한 회전 방식은 원작에서 말하는 삶의 패턴을 구현한 건가요?
강량원 사실 단순한 이유였어요. 우주알이 그믐 때 시공간 연속체가 겹쳐지면서 달에서 지구로 내려오잖아요. 달과 지구는 계속 도는데, 무대를 돌릴 수가 없는 거예요. 배우가 직접 돌아야지만 가능합니다. 무대가 경사져서 배우들은 몸을 기울여 돌았어요. 실제 우리를 바라보면 곧게 살아있지 않죠. 다 훼손된 몸이에요. 기울어진 몸이요. 기울인 배우의 모습과 실제 사람의 모습이 잘 맞는 것 같았어요.
정진새 원작에도 경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이를테면 엄마가 비탈진 경사를 올라가는데 차 때문에 비켜서다가 넘어지는 상황이요. 또한 서울 곳곳에 있는 좁은 골목들, 거길 힘들게 올라가는 엄마의 모습이 있어요. 강량원 연출과 6개월 동안 소설을 이야기하면서 묘하게 이런 것들이 무대에 기입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무대가 나왔을 때 많이 놀라진 않았어요.
소설에서 연극으로 장르 변용을 할 때 가장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장강명 요즘 고민하는 건데요. 문학이나 연극이나 지금 큰 위기가 오는 것 같아요. OSMU를 넘어 이제는 IP 비즈니스라고 이야기하더군요. 콘텐츠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이 작품을 토막 내 팔 수 있는 걸 다 파는 시대입니다. 우리에게 진지한 위협이 되고 있어요. 저를 보고 문학이라고 부르지 않고, 원 콘텐츠를 만드는 크리에이터라고도 말하겠죠. 허울 좋은 말이지만, 어떻게 하면 원 콘텐츠로 자본을 만들 수 있는지 생각하는 거예요. 21세기에 창작하는 사람들에게는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받아들이면 어느 순간 정말 원 콘텐츠 창작자가 돼버리고 말 거라는 고민이 있어요.
강량원 문학이 연극이 될 때 스토리를 그냥 가져오는 건 별로인 것 같아요. 그 작품이 가진 생명을 온전히 가져와야 해요. 그 생명이 도대체 뭔지 생각해보면, 아주 끝까지 파고들어야 하는 문체의 끝 같아요. 문장의 끝이요. 그걸 다 옮겨 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어떤 소설을 연극으로 가져올 때, 스토리보다는 문장과 구성의 결을 다 옮기고 싶어요. 독자의 경험을 연극 관객에게 그대로 경험하게 하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글 장혜선 기자 사진 강태욱(Workroom K)
연극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한 장강명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작품 속 남자와 여자는 고등학교 시절 연인이었다. 동급생 살인죄로 교도소에 들어간 남자는, ‘우주알 이야기’라는 소설을 써 여자가 일하는 출판사에 보낸다. 여자는 소설 내용이 자신들의 이야기인 것을 알고 남자를 찾아 재회하고, 남자는 시간을 이전으로 되돌릴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일방향의 시간 개념을 뒤집어 기억이 주는 고통의 무게를 새로이 바라보게 된 것이다. 주인공 남자는 그믐날 자신 속에 들어온 ‘우주알’을 받아들여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볼 수 있게 되고, 시간을 한 방향으로만 사는 사람들의 기억 속 고통을 어루만진다.
연극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10월 9~27일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