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 레비/KBS교향악단(협연 김유빈)

함께 이룬 성장과 성취

우수 컨텐츠 잡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10월 30일 9:00 오전

REVIEW

10월 1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어둠이 내려앉는 저녁 하늘은 바라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닌다. 천상병 시인은 그의 시 ‘귀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위기의 KBS교향악단은 상임지휘자 요엘 레비와 함께 기사회생했다. 이들은 두 차례 계약 연장을 통해 총 6년의 시간 동안 돈독한 신뢰관계를 보여주었다. 서로 통제권을 움켜쥐려고 할 때가 아니라 상대에게 믿고 맡길 때 오히려 자유로운 움직임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들은 음악으로 보여주었다. 요엘 레비는 지휘로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케스트라가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커다란 판을 펼쳐놓았다.

이날 1부와 2부는 마치 빛과 그림자 같은 작품 배치를 선보였다. 1부는 밝고 유쾌한 모차르트 플루트 협주곡으로 시작했다. 협연은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종신 플루트 수석으로 활동하는 플루티스트 김유빈이 맡았다. 덧붙일 말이 필요 없을 만큼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연주였다. 안정적인 자세, 여유로운 숨결과 함께 앳된 청년의 순수함이 묻어나는 싱그러운 음색이 돋보였다.

김유빈은 소리를 잘 낼 뿐만 아니라 잘 듣는 연주자이다. 젊은 연주자로는 드물게 음악을 자유롭게 풀어놓으면서도 절제할 줄 알았다. 그가 쌓아온 탄탄한 기본기와 엄격한 훈련이 연주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오케스트라와 자신의 소리를 사려 깊게 들으며 예민하게 조절하는 김유빈의 눈빛에서 밝은 미래가 엿보였다.

모차르트 협주곡에서 해맑은 세계를 그려냈다면 2부에서는 온갖 어두운 것들이 들끓는 심연의 세계가 펼쳐졌다. ‘태풍처럼 몰려오는 비극’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날 정기연주회 2부 연주곡은 말러 교향곡 6번 ‘비극적’이었다. 그러나 KBS교향악단의 연주는 고무적이었으며 희망적이었다. 오케스트라의 모든 악기군이 잘 다듬어져 매끄러웠다거나 악기군 간에 완벽한 균형을 이루었기 때문은 아니다. 다소 약하거나 아쉬운 부분들이 있었지만 그것은 휘몰아치는 폭풍 같은 전체 흐름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투박한 손길에서 작품의 거친 질감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요엘 레비는 교향악단이 작품 앞에 용감하게 맞서도록 계속적으로 사기를 북돋았다. 그의 앞에는 언제나처럼 악보 없이 오직 지휘봉과 오케스트라뿐이었다.

말러를 강타한 운명의 타격으로 상징되는 해머가 등장하는 마지막 악장에서 이 역전의 드라마는 긴 여운을 남겼다. 해머가 내리치는 나무상자 위에는 흰 가루와 검은 천이 놓여 있었다. 강한 두 번의 타격 이후 흰 가루는 높은 천정의 조명 끝에 닿을 때까지 연기처럼 서서히 올라갔다. 이는 절망이나 패배, 죽음에 항복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명이자 극적인 전환을 상징하는 듯 했다. 암흑의 시기에 힘겹게 성장을 시작한 KBS교향악단은 요엘 레비와 함께 작년에는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말러 교향곡 9번으로 실황 음반까지 발매했다.

오는 12월 임기 만료를 앞두고 요엘 레비는 한 인터뷰에서 “끝이 아니다”라고 반복했다. 비록 그가 떠나도 이들이 함께 이룬 성장과 성취는 아름다운 기억으로 오래 남을 것이다. 지는 해를 보며 또 다시 밝아올 아침을 기대하는 이유이다.

서주원(음악평론가) 사진 KBS교향악단

Leave a reply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