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

나를 대변하는 음악적 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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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10월 7일 10:52 오전

INTERVIEW

카펠라 안드레아 바르카와의 오랜 호흡으로 베토벤의 다섯 피아노 협주곡을 전하다

 

©Nicolas Brodard

음악이 직업이라 그런지 내 주머니에 들어 있는 명함을 다른 처음 만난 사람에게 건네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그 어색함은 단지 낯섦이나 쑥스러움이 아니라, 내 이름이 적힌 작은 종이 카드를 남에게 주는 일이 막중한 책임이 담긴 중요한 행동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기에 생기는지도 모른다.

“베토벤의 다섯 피아노 협주곡들은 그의 음악적 명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작 후기에 만들어진 작품이 없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최초의 작품부터 피아노가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대표 악기라는 작곡가의 확신이 느껴지죠.”

안드라스 쉬프의 말이다. 만약 베토벤의 명함이 아니라 쉬프 자신의 명함이었다면 그 안에 들어갈 첫 이름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없이 편하고 자신의 집처럼 느껴지는 바흐와 다른 방법으로 존경과 경외를 바치는 베토벤의 간판 레퍼토리이기에 쉬프가 임하는 자세는 더욱 신중하다. 오랜 호흡을 자랑하는 카펠라 안드레아 바르카를 이끌고 협주곡 전곡 연주에 나서는 쉬프에게 깊은 연구 끝에 얻어진 홀가분한 자신감과 음악을 공유하는 파트너에 대한 흐뭇한 확신이 느껴진다.

“우리는 가족과 같아요. 솔리스트로 다양한 활동을 하는 쟁쟁한 연주자들이 우정으로 뭉친 연주단체죠. 훌륭한 팀은 좋은 음악가가 되는 것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늘 함께하면서 각자가 사랑하는 것들을 나눌 수 있는 준비도 필요하죠. 실내악 연주에서의 기본은 서로의 소리에 귀를 세우는 일인데, 단원들은 그런 부분에서 탁월합니다. 대부분의 멤버들이 나이가 지긋한 연주자들이지만, 만들어지는 소리가 늘 젊고 풋풋한 것은 이런 기본기와 원칙에 충실하기 때문이죠.”

쉬프가 ‘우리’라고 강조하는 카펠라 안드레아 바르카는 그가 1999년 실내악 분야에 오랜 경험이 있는 멤버들을 직접 뽑아 결성한 실내악단이다. 이미 창단 직후부터 2005년까지 잘츠부르크 모차르트 주간에서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연주하는 경험을 쌓았고, 그 후 쉬프와 함께 유럽과 아시아의 콘서트, 페스티벌을 종횡무진하고 있다. 20년을 헤아리는 시간 동안 만들어 온 음악작업들은 이제 피아니스트와 오케스트라가 한 몸처럼 느껴지는 단계에 올랐다. 쉬프의 협주곡이 친숙한 애호가들에게 관심의 포인트는 역시 오케스트라와의 대화에서 나타날 다양한 음색과 악상의 예측 불허의 조화일 터, 이미 명연으로 기억된 지 오래인 베르나르드 하이팅크와의 음반과는 사뭇 다른 질감일 것이 분명하다.

“마에스트로 하이팅크와 같은 지휘자와의 작업은 피아니스트라면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행복감을 전달해 주죠. 카펠라 안드레아 바르카와의 연주는 조금 더 실내악적인 울림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모두 지휘자를 바라보는 대신 서로의 소리를 듣는 데 집중하니까요.”

 

변화하는 마스터피스

협주곡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와 지휘자의 1인 2역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음에도, 본격적인 지휘 무대에 대한 계획은 ‘없다’고 단언하는 모습이 흥미롭다. 바꿔 말하면 아직도 건반 위에서 새롭게 발견해야 할 것이 많다는 생각일 것이다. 차분하고 학구적인 이미지가 강하지만, 친숙한 마스터피스들이 대부분인 그의 디스코그래피에서 의외의 호기심이나 실험 정신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그중 취리히 라이브 실황이었던 ECM의 베토벤 사이클은 우리의 눈과 귀를 기분 좋은 충격에 빠트렸다. 14번 ‘월광’의 1악장에서 들려준, 알고 있었으나 지금껏 시도하지 못했던 독특한 페달링은 잊을 수 없는 하이라이트였다.

 

©Priska Ketterer

“베토벤은 가장 창의적인 방식으로 페달을 활용한 첫 번째 작곡가였습니다. 1번과 2번 협주곡에 등장하는, 서로 다른 화성이 연이어 등장하는 긴 패시지에서 댐퍼를 현으로부터 떨어트리는 방식으로 화음들이 섞이는 효과를 냈는데,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미래 지향적인 아이디어였죠. 환상곡 풍의 정서를 가득 담은 ‘월광’ 1악장에서 제가 시도했던 사운드도 비슷합니다. 필사본과 초기 에디션을 연구하다 보면 지금도 놀랍고 새로운 발견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베토벤뿐만 아니라 바흐 연주에서의 페달링도 지금까지 실험 중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겠네요. 과거 댐퍼 페달을 전혀 쓰지 않고 연주해 본 적도 있지만, 요즘은 너무 내 고집만 부리지 않고 연주 장소의 음향 상태를 고려한 적절한 페달링을 생각합니다. 어느 경우에도 소리의 명료함은 중요하니까요.”

최근 발매된 슈베르트의 작품집은 쉬프의 포르테피아노 연주로 화제를 모았다. 과거 모차르트의 소품집 등에서 시도했던 시대 악기 연주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는 것일까.

“이 레코딩에서 1820년대에 빈에서 만들어진 포르테피아노를 사용했습니다. 적당히 빛바랜 부드러움과 센티멘털한 선율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음 빛깔이 정말 마음에 들었죠. 시대악기를 바라보는 관점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지금은 현대악기로 슈베르트를 연주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포르테피아노의 소리에 빠져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위상, 안정감을 잃지 않는 무대 매너와 연주 스타일의 쉬프이지만, 그의 연주 인생을 예전부터 알아 온 팬들이라면 은근하면서도 다양하게 변화한 그의 관심사와 레퍼토리에 호기심이 생길 법하다. 젊은 시절 쉬프의 모습이 지금과 달랐다고 증언해준 인물은 다름 아닌 그와 동갑내기 ‘피아니스트’ 정명훈이다. 그는 최근의 인터뷰에서 “지금은 성직자나 철학자의 고고한 이미지가 많지만, 예전의 쉬프는 무대에서 카사노바같이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피아니스트였다.”고 언급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출전했던 1974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실황에서 쇼스타코비치의 프렐류드와 푸가를 선택해 불꽃이 사방으로 튀는 듯한 터치와 절묘한 리듬감으로 건반을 장악하던 21세의 쉬프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얼굴의 연주자였다. 문득 그의 20세기 프로그램을 들은 기억이 오래됐다는 느낌이다.

“버르토크, 야나체크, 그리고 드뷔시의 음악은 꽤 자주 무대에 올립니다만, 이들 이후의 음악 중에는 마음에 다가오는 작품이 거의 없어서 잘 연주하지 않습니다. 리스트에 느낀 거리감은 그 이유가 조금 다른데, 아마도 부다페스트 리스트 아카데미에서 공부할 때 그의 작품이 잘못 해석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작곡가나 작품에 대한 호불호는 누구에게나 존재하죠.”

언젠가 20세기 후반 만들어진 피아노 작품들이나 쉬프만의 인상적인 색채로 덧입혀진 리스트의 마스터피스들을 듣게 될 날도 오지 않을까. 60대 후반을 바라봄에도 두 시간을 훌쩍 넘기는 리사이틀 프로그램 내내 집중력을 잃지 않는 정신력과 체력을 유지하고 있는 연주자이기에 기대감은 더욱 커진다.

“한 시간이 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흔들림 없이 연주해 낼 수 있는 비결에 대해 묻는 이들이 많습니다. 어디까지나 훈련과 반복 학습에 의해 가능한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노력 없는 재능은 의미가 없죠. 음악가로서의 ‘위대함’은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신의 축복이지만, 그 위대함을 유지하는 데에는 늘 부족한 우리의 안간힘이 필요해요. 성공과 재능을 이어주는 끈은 노력뿐입니다.”

김주영(피아니스트·음악 칼럼니스트)

 

안드라스 쉬프 & 카펠라 안드레아 바르카

11월 12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11월 13일 오후 8시 아트센터 인천 콘서트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2번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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